[조일훈 칼럼] 부채 7000조원…'文 정부 탓하기' 시효는 끝났다
어느새 '부채공화국' 오명
빚더미 경제에 투자·소비 질식
부채 조정 타이밍 놓친 尹 정부
文 정부 유산만 탓할 게 아니라
결연한 각오로 구조조정 추진해야
조일훈 논설실장
경제위기는 더 이상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갑자기 터진다. 사전에 경고된 숱한 구조적 문제가 한꺼번에 수면 위로 떠올라 쓰나미처럼 덮친다. 1997년 외환위기도 그랬다. 위기에 이른 과정을 사후적으로 복기해 봤더니 망하지 않은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막대한 경상수지 적자, 과다한 기업부채,관치에 찌든 금융, 정치적 목적을 위해 짓누른 환율, 대미·대일 외교 약화, 구조개혁 실패, 야당의 비협조…. ‘펀더멘털은 괜찮다’는 레토릭 뒤에 숨어 있던 경제의 민낯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3저 호황이 끝난 1990년대 초부터 오랫동안 진행된 병세였지만 방만과 무사안일에 찌든 경제는 시시각각 다가오는 파국을 예견하지 못했다.
지금 상황이 그 시절과 많이 다르긴 하다. 외교력이 탄탄하고 비교적 넉넉한 외환보유액과 해외순자산도 있다. 하지만 부채 문제는 그야말로 악성이다. 간단히 셈을 해봤더니 어느새 7000조원에 육박한다. 2분기 말 가계부채 1860조원, 기업부채 2700조원, 8월 말 기준 중앙정부 부채 1110조원, 지방정부 부채 33조원, 지난해 말 기준 전세부채(보증금) 1060조원을 합친 것이다. 지난해 실질 국내총생산(GDP·1968조원)의 3배가 넘는 규모로 국민 1인당 1억3000만원꼴이다. 외환위기 때는 중국이라는 거대 신흥시장이 회복의 발판 역할을 해줬지만 이제는 거꾸로다. 불황에 빠진 중국 경제성장률이 1%포인트 떨어질 때마다 우리 성장률은 0.3%포인트 하락하는 구조다.
모든 경제주체가 빚더미에 올라앉은 마당에 투자와 소비가 살아날 리 없다. 부채로 쌓아올린 거품은 곳곳에서 터지고 있다. 유동성이 넘치던 시절, 자애롭고 시혜적인 정책이 남겨놓은 부실은 곳곳에 껌딱지처럼 덕지덕지 붙어 있다. 전력산업은 일찌감치 파탄 났으며 산업 재편과 기업 구조조정은 아득한 기억 속에만 남아있다. 정쟁이 전부인 국회는 전통적 구조조정 기법인 워크아웃 제도 일몰을 넘겨버렸다. 이제 곧 도산기업들로 법원이 미어터질 것이다.
굳이 어느 정부를 탓할 것도 없다. 문재인 정부뿐만 아니라 윤석열 정부조차 부채 조정 문제를 기약 없이 미루고 유예해왔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말로는 긴축을 외치면서 실제 행동은 달랐다. 중앙은행은 정공법(금리 인상)을 외면하면서 경기 침체와 금융시장 불안을 가리켰다. 전원 서울대 경제학부 출신으로 구성된 금융통화위원회 7인은 아는 게 너무 많고 걱정도 한가득이어서 그런지 장고만 거듭했다. 얼마 전 “미국과의 금리 차이가 현재 환율과 금리에 적정 수준으로 반영돼 추가적 통화 긴축은 필요 없을 것 같다”는 당국자의 설명은 기가 막힌다. 자신들이 기준금리를 올리지 않아도 시장이 알아서 시중금리와 원·달러 환율을 올리는 방향으로 움직였다는 것이다. 홀가분해서 참 좋겠다. 올 들어 득달같이 불어난 가계부채는 누가 책임질 건지…. 시장이 그토록 현명하고 선도적이라면 도대체 금통위는 뭣 하러 두는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지난 1년 새 15%나 불어난 공기업 부채(670조원)도 말 따로, 행동 따로의 전형이다. 전 정부의 탈원전 폐해가 컸다고는 하지만 한사코 전기요금 현실화를 미루는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러고도 공공기관 개혁을 외칠 수 있나. 민간기업 부채는 골치 아프니 그냥 덮고 가자는 분위기였다. 코로나19를 빌미로 도입된 중소기업·소상공인 대출금 상환유예는 정권이 바뀐 뒤에도 지속돼왔고 살얼음판을 걷는 부동산 부실도 그대로다. 경기가 너무 나빠질 것 같아서, 기업 줄도산은 막아야 할 것 같아서, 선거도 생각해야 해서…. 핑계와 변명이 넘쳐나니 구조조정과 정책금융 방책들은 설 자리가 없다. 그사이에 부채 원리금은 계속 불어나고 경제 적폐들은 켜켜이 높아진다. 폴 크루그먼 말대로 “경제가 호황이면 구조적 문제들이 가려질 수 있다”지만 지금은 그런 시기가 아니다. 시간은 우리 편이 아니다. 모든 정세가 불리하고 불확실하다. 반도체 경기가 살아나도 특별히 달라질 것이 없다. 일정 수준의 고통 없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없다. 이렇게 많은 부채를 끌어안고 금리 연 20%, 원·달러 환율 2000원 시대가 다시 오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나. 환율 1000원에서 2000원은 멀어 보이지만 1350원에서 2000원은 금방이다. 지난 정부 과오를 탓할 시기도 지나갔다. 지금부터는 모두 윤 정부 책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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