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박 감독님’을 아세요? [사이공 모닝]
5년 전 처음 베트남에 발을 디뎠습니다. 그야말로 우당탕탕거리며 베트남 구석구석을 휘젓고 다니는게 취미입니다. 우리에게 ‘사이공’으로 익숙한 베트남 호찌민에서 오토바이 소음을 들으며 맞는 아침을 좋아했습니다. ‘사이공 모닝’을 통해 제가 좋아하던 베트남의 이모저모를 들려드리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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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항저우 아시안 게임에서 베트남은 한국에 아픈 패배를 안겨주었습니다. 한국 여자 배구 대표팀이 첫 경기부터 베트남에 역전패를 당했기 때문이지요. 앞서 아시아 선수권이 개막할 때까지만 해도 한국과 베트남의 경기는 주목 받지 못했습니다. 세계 랭킹 35위였던 한국과 47위인 베트남의 실력 차가 분명했기 때문이지요.
아시안 게임이 시작되자 상황은 달라졌습니다. 아시아 선수권에서의 부진으로 한국은 세계 랭킹은 40위로 추락했고, 베트남은 39위로 도약해 두 국가의 순위가 ‘도긴 개긴’인 상황에서 아시안 게임을 시작했죠. 한국 대표팀의 전력을 분석하기 위해 북한 선수들까지 경기장을 찾은 상황에서 베트남에 충격의 역전패를 당한 한국은 결국 아시안 게임에서 17년 만에 ‘노 메달’이라는 충격적인 결과를 기록했습니다. 승패에 연연하지 않고, 과정에 집중하는 게 요즘 시대의 ‘쿨함’이라고는 하지만 과정에서부터 문제가 있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는 걸 보면 충격적인 패배가 맞긴 했나 봅니다.
앞뒤로 뚱뚱한 브라운관 텔레비전을 보며 자랐거나 88 서울 올림픽의 굴렁쇠 소년을 기억하는 분들이라면 ‘체력은 국력’이라는 말이 익숙하실 겁니다. 국제 스포츠 대회에서의 성적이 국가 경쟁력을 상징하던 시절이 있었죠. 메달과 상관없이 국가를 대표해 사력을 다한 선수들에게 박수를 쳐주자는 주장에 전적으로 찬성하지만, 여전히 국제 스포츠 게임에서의 승패 여부가 전 국민의 관심사인 것도 사실입니다.
이번 아시안 게임에서 베트남은 21위로 금메달 3개, 은메달 5개, 동메달 19개를 따냈습니다. 메달 수로 따지면 14위입니다. 금메달 42개, 은메달 59개, 동메달 89개를 획득한 참가국 2위(메달 수 기준)인 우리나라에 한참 뒤지는 성적이지요. 11위를 차지한 북한(금메달 11개, 은메달 18개, 동메달 10개)에도 못 미칩니다. 하지만 여자 배구팀 말고도 베트남이 깜짝 놀란 성적을 낸 종목이 또 있습니다. 그것도 한국 ‘박 감독님’의 도움을 받아서 말이죠.
◇한국 ‘박 감독님’ 모셔간 베트남, 한국 꺾고 41년 만에 금메달
이번 항저우 아시안 게임에서 베트남에 첫 번째 금메달을 안겨준 종목은 사격입니다. 사격 남자 10m 공기 권총 개인전에서 팜 꽝 후이 선수가 우리나라 이원호 선수를 제치고 금메달을 획득한 것이지요. 베트남이 사격 종목에서 금메달을 따낸 것은 41년 만에 처음입니다.
후이 선수는 금메달을 따낸 후 베트남 언론 뚜오이쩨와 단독 인터뷰를 하면서 “처음 팀에 합류했을 때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부분을 주장하고, 박 감독님의 말을 듣지 않아 국가 대표팀에서 원래 팀으로 돌려보내진 적도 있었다”며 “마음을 고쳐먹고 다시 팀에 복귀해 박 감독과 수년 간 훈련에 매진해 금메달을 딸 수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성적도 성적이지만 그의 인터뷰에서 들리는 단어가 익숙합니다. 바로 ‘박 감독님’이라는 단어입니다. 베트남의 한국 감독이라면 박항서 감독이 먼저 떠오르시겠지만 여기서의 박 감독님은 베트남 사격 국가 대표팀의 박충건 감독입니다.
박충건 감독은 2014년부터 베트남 사격 국가 대표팀 감독을 맡고 있습니다. 그가 지도한 호앙 쑤언 빈 선수가 2016년 리우 올림픽에서 우리나라 진종오 선수를 꺾고 올림픽 신기록을 기록하며 금메달을 획득했었지요. 베트남 스포츠 역사상 첫 올림픽 금메달이었습니다. 박항서 전 베트남 축구 국가 대표팀 감독보다 먼저 베트남 스포츠 계에 신화를 만들어 낸 ‘원조 박 감독’인 셈입니다. 현재는 그의 제자이자 올림픽 메달리스트인 빈 선수와 함께 베트남 사격 국가 대표팀 감독으로 선수들을 지도하고 있습니다.
◇박 감독님 그리운 베트남 축구팀, 한국 이길 수 있을까?
뭐니 뭐니 해도 베트남에서 가장 유명한 한국인은 박항서 전 베트남 축구 대표팀 감독일 겁니다. 2017년부터 5년 넘게 베트남 축구 국가 대표팀을 이끌었던 역대 최장수 사령탑이지요.
지난 2019년 12월 인도네시아와의 ‘2019 동남아시안(SEA) 게임’ 결승전을 베트남 친구들과 함께 봤었습니다. 인도네시아 선수의 태클에 대해 주심이 반칙 선언을 하지 않자 심판에게 항의하던 박 감독이 경기장에서 퇴장 당했던 바로 그 날이죠. 감독의 퇴장에도 베트남은 3대 0으로 승리해 60년 만에 처음으로 동남아시안 게임 금메달을 목에 걸었습니다. 그날 길거리는 ‘빵빵~빵,빵!빵!’하는 오토바이 경적 소리와 베트남 국기를 든 사람들로 가득 찼고, 베트남 언론들은 ‘아버지 리더십’이라며 극찬했습니다. 아직도 그날의 열기가 생생합니다. 이후에도 박 감독이 이끄는 베트남 축구 팀은 여러 차례 우승컵을 차지하며 동남아의 축구 약체에서 동남아 축구 강국으로 거듭났지요.
최근 베트남에서 박 감독의 이름이 다시 회자되고 있습니다. 베트남 축구 국가 대표팀의 성적이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올해 1월 박 감독이 물러난 후 과거 일본 대표팀을 이끌었던 필립 트루시에 감독이 베트남 축구팀을 맡고 있습니다. 지난 5월 열린 동남아시안 게임 남자 축구 준결승에서도 인도네시아에 패배해 결승 진출에 실패했고, 최근 열린 중국, 우즈베키스탄과의 경기에서도 득점을 올리지 못했습니다. 이 때문에 “베트남 축구팀이 박항서 감독의 스타일로 돌아가야 한다”는 분석이 나오기도 합니다. 기사에는 “박항서 감독 때에 비해 너무 취약하다” “과거가 그립다” 같은 댓글이 달립니다.
오는 17일, 한국 축구 국가 대표팀과 베트남의 친선 경기가 벌어집니다. 이번 경기는 베트남의 요청으로 성사됐다고 합니다. 베트남은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 95위로 우리나라(26위)보다 떨어집니다. 벌써부터 베트남 언론에서는 비관적인 전망이 나오고 있습니다. 양 팀의 전력 차이가 명확한 가운데, 트루시에 감독의 베트남이 한국을 상대로 좋은 성적을 거둘 가능성이 낮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번 경기는 우리에게도 좋은 기회인 것으로 평가되고 있습니다. 오는 11월부터 시작되는 2026년 북중미 월드컵 아시아 2차 예선과 아시안 컵까지 동남아시아 국가와 맞대결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상대 전력을 파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박 감독 없는 베트남 축구팀이 이번 경기에서 과거의 영광을 재현할 수 있을까요? 이번 경기의 또 다른 관전 포인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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