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관 칼럼]이재명의 지팡이에 졌다
尹 ‘군림하는 통치자’ 이미지 겨냥
내년 총선, 결국 누가 더 절박하냐의 싸움
與 ‘차분한 변화’ 넘어 ‘창조적 전환’ 모색해야
반면 ‘빨간 점퍼’ 차림의 국민의힘 김기현 대표는 “힘 있는 여당 후보, 대통령과 핫라인이 있는 후보”를 외쳤다. 결과는 17%포인트 차의 여당 참패. 이 대표의 약자 코스프레가 먹혔고 윤석열 마케팅은 통하지 않았다. 선거 패인을 놓고 중도층 이반, 높은 정권견제론 등 여러 진단이 나온다. 한마디로 유권자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 사람의 마음은 ‘오만한 강자’보다 ‘모자란 약자’ 쪽으로 기우는 경향이 있다. 그 약자의 문제점을 일일이 따지지 않고…. 변덕스러운 인간의 속성이다.
민주당은 사실 약자가 아니다. 윤 정부는 대선에서 승리했지만 거대 야당의 벽에 부딪혀 사사건건 휘둘린 사례가 한둘이 아니다. 권력의 반도 행사하지 못하고 있는 형국이다. 그런데도 희한하게 절대 다수의 국회 의석을 가진 민주당은 약자, 여권은 강자처럼 비치고 있다. 이는 프레임 싸움에서 밀린 탓으로만 볼 일은 아니다. 이 대표의 ‘지팡이 전략’이 뻔하게 보이면서도 일부 중도층까지 잠식할 수 있었던 건 그 대척점에 ‘군림’ 이미지의 통치자가 있기 때문이다.
윤 대통령은 비겁함을 싫어하는 성정이라고 한다. 살아 있는 권력에 맞서면서도 남들이 이루지 못한 성공의 역사를 써 왔기에 더 그럴지도 모르겠다. 승부사적 기질이란 측면에선 노무현 전 대통령과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다른 건 ‘말(言)’이다. 설득과 공감보다는 “나를 따르라”는 식의 스타일. 이게 인사나 정책 추진에서 하나둘 쌓이며 정치가 아닌 통치의 이미지로 이어졌다.
윤 대통령은 보선 열세에 대해 “왜 진작 제대로 보고하지 않았느냐”는 식의 반응을 보였다는 얘기가 들린다. 사실이라면 의아하다. 보궐선거 귀책 사유자 사면 복권으로 사실상 공천을 하라는 지침을 준 것도, 당정일체의 직할 체제를 만든 것도 용산 아닌가. 그런 점에서 “강서가 원래 험지” “선거 방식의 문제” 등의 패인 분석은 맞지도 않고 곁가지일 뿐이다. 진단이 정치공학적 차원이면 교훈과 해법도 그 수준을 맴돌 수밖에 없다. 그보다는 이번 선거의 함의를 큰 눈으로 인식하고 변화의 계기로 삼는 능동적 자세가 필요하다.
윤 대통령은 “차분하고 지혜로운 변화”를 주문했다고 한다. ‘차분함’에 방점이 있는 건지, ‘변화’에 방점이 있는 건지 아리송했지만 결국 여권은 ‘차분한 수습’의 길을 택한 듯하다. 일각에선 비대위 전환, 나아가 연말 신당 추진 등 해법과 로드맵을 내놓고 있지만 다들 조심스러운 눈치다. 총선 공천장이 급한 당내 인사들이 김기현 체제의 결단을 대놓고 입에 올리려 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결국 ‘창조적 전환’의 길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창조적 전환은 당의 문제만일 수 없다. 이번 선거의 ‘교훈’을 지엽적인 선거 전략 분석, 패인 분석에만 머물러선 안 되는 이유다. 용산의 성찰이 핵심이다. 왜 설득과 소통이 부족한 강자로 비치고 있는지 돌아봐야 한다는 것이다. 코피 터져가며 국정 챙기느라 정신이 없다고 한다. 그러나 국정의 대부분은 시스템으로 돌아가는 것이지, 대통령의 개인기와 지시로만 돌아가는 게 아니다.
코로나 사태를 겪으며 수많은 약자들이 쏟아졌다. 이들은 새 대통령이 자신들의 삶을 보살펴주길 기대했다. 이들에게 어떤 모습을 보였는가. “가장 중요한 것은 이념”이라며 민생 대신 ‘이념’을 내세우는 듯한 대통령으로 스스로를 자리매김했다. 대통령 메시지에서 민심을 받들겠다는 얘기를 듣기 힘들다. 검찰, 감사원 등 권력기관 뉴스만 쏟아진다. 바로 그 틈을 이 대표의 지팡이가 파고든 것이다.
내년 총선, 윤 대통령과 이 대표 중 누가 더 절박하냐의 싸움이 될 것이다. 절박함은 국민에 대한 두려움에서 나온다. 승리의 열기도 있지만 ‘패배의 분기(憤氣)’도 있다. 패배의 분기는 그냥 사그라들 수도 있고, 판세를 바꾸는 동인(動因)이 될 수도 있다. 저자세와 낮은 자세는 다르다. 저자세는 굴욕이지만 낮은 자세는 국민과 진심으로 교감하는 길이다. 오동잎은 이미 떨어지기 시작했다. 누가 더 처절하게 낮은 자세로 내년 봄을 준비할까. 역사의 미소는 공짜가 아니다.
정용관 논설실장 yongar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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