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간 1500만명, 다음 끼니를 기약하지 못한다”
“얼마 전 아이가 여섯인 어머니가 우리 사무소에 찾아왔어요. ‘일자리를 잃었지만 여전히 아이들을 키워야 한다’며 ‘지원이 왜 중단됐느냐’고 호소하더군요. 이런 분들을 ‘빈손’으로 돌려보내야 하는 게 소장으로서 제가 겪는 가장 어려운 일입니다.”
샤오웨이 리(47) 유엔 세계식량계획(WFP) 아프가니스탄 사무소장은 최근 규모 6.3의 치명적 지진이 연이어 서부 헤라트 지역을 강타한 아프간을 뒤로한 채 지난 12일 한국을 찾았다. 세계식량계획의 주요 후원국인 한국의 외교부와 국회를 돌며 아프간이 겪고 있는 ‘인도적 위기’를 알리고 지원을 호소하기 위해서였다. 이날 국회에서 한겨레와 만난 리 소장은 “2021년 8월 탈레반 정권이 재집권한 뒤 현지의 식량 사정이 악화됐지만, 올해가 가장 심각하다”며 올겨울을 무사히 날 수 있도록 한국이 따뜻한 도움을 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그는 2021년 8월 탈레반이 재집권하면서 일자리를 잃은 “많은 여성들에게 우리 사무소의 식량 지원이 최후의 보루인 경우가 많다”며 “그래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거듭 강조했다.
1963년부터 아프간에서 활동을 이어온 세계식량계획은 아프간에 약 850명의 직원을 두고 있다. 주로 식량 위기에 놓인 주민들에게 밀가루, 콩, 소금, 식물성 오일을 공급하고, 2살 미만 아이와 임산부를 위한 영양식품 등을 제공한다. 하지만 ‘자금 부족’으로 올해 초 그동안 1300만명에게 지원하던 식량을 그 4분의 1에도 못 미치는 300만명에게만 지원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됐다. 인구 약 4천만명의 아프간에선 현재 1500만명이 다음 끼니를 확보하지 못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고작 5분의 1에게만 식량을 지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로 인해 생존의 위협에 놓이게 되는 것은 아프간 사회의 ‘절대 약자’인 여성들이다. 특히 미군의 갑작스러운 철수로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인 탈레반이 재집권하면서, 여성 인권이 유린되고 있고 경제적인 상황도 크게 악화됐다. 탈레반은 지난 2년 동안 여성들의 중등교육 기회를 박탈했고 여행을 제한했으며 복장 단속을 강화했다. 심지어 작년엔 여성의 국제기구 근무를 금지했고, 올해 7월엔 전국 미용실에 영업금지령을 내렸다. 이를 통해 미용업으로 생계를 꾸려가던 여성 6만여명이 실업 상태에 빠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여성의 인권 상황이 악화되고 경제활동이 위축돼 돈을 벌지 못하게 되면, 아이들은 밥을 굶게 된다. 리 소장은 “아이들이 학교에 가고 싶어 하는 열망이 무척 강하다. 조부모들도 자신의 손녀딸이 학교에 가길 원한다”며 “탈레반이 내놓은 여러 금지령에 대한 불만이 상당하다”고 전했다. 세계식량계획 아프가니스탄 사무소는 일자리를 잃은 여성들에게 장신구 제작, 봉제, 가공식품 생산 등 기술 훈련 기회를 제공하려고 힘쓰고 있다.
아프간을 한층 더 고통에 빠뜨리고 있는 것은 지난 7일(현지시각) 발생한 강진이다. 리 소장은 지진 발생 당일부터 유엔 국제이주기구(IOM)와 협동해 마을을 돌아다니며 지진 피해를 집계하고 식량 수요를 조사했다. 그는 “직원이 현장에서 상황을 알려오길, 일부 지역에선 마을 전체가 초토화됐고 95%의 건물이 완전히 무너졌다고 한다”며 상황이 매우 심각하다고 전했다.
더 큰 문제는 곧 겨울이 다가오고 있다는 점이다. 혹독한 추위를 자랑하는 아프간에서 올겨울 희생자를 최대한 줄이는 게 현재 그의 가장 큰 바람이다. 그는 “기후 여건상 내년엔 작황이 다소 나아질 것이라 기대되는데, 주민들이 최대 고비인 겨울을 무사히 넘겨 내년 생산활동에 참여하길 바라고 있다”며 “겨울을 날 수 있는 식량 확보가 무척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물론 혹독한 탈레반 정권하에서 구호 사업을 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다. 그는 탈레반에 휘둘리지 않고 국제기구로서 사업의 독립성과 중립성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식량 지원 대상을 줄여야 할 때 탈레반을 포함해 모든 이해당사자에게 사전에 상황을 설명합니다. 하지만 지원 대상을 결정하고 사업을 진행하는 것은 철저한 우리의 권한입니다. 탈레반과 일부 소통은 하지만 함께 일한다고는 볼 수 없어요.”
대만계 여성인 그는 다국적 로펌에서 변호사로 7년간 일한 뒤 아프리카에서 활동하는 비정부기구, 미국 국제개발처(USAID) 등을 거쳐 세계식량계획에서 일해왔다. 카불에 파견돼 근무하던 그는 지난 1월 아프가니스탄 사무소의 책임을 맡게 됐다. 리 소장은 귀국 즉시 지진 현장으로 달려갈 계획이다. 그는 “현지 직원들도 지진 피해를 많이 입었다”며 이들을 보살피는 게 급선무라고 설명했다. 한국의 독자들에게 각별히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냐고 묻자, “아프간 주민들이 겪고 있는 식량 위기와 인권 상황에 관심과 지지를 계속 보내 달라”며 “그게 결국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말했다.
김미향 기자 arom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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