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 명문 하버드대학교에서 나온 이스라엘 규탄 성명이 일으킨 후폭풍이 거세다. 하버드대 학생들로 구성된 팔레스타인 연대 그룹(Harvard Palestine Solidarity Groups)은 지난 7일 이슬람 무장 단체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침공한 이후 이스라엘을 규탄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성명이 발표된 후 ‘하버드 국제 앰네스티’ 등의 하버드 내 34개 단체도 공동으로 서명했다. 이에 하버드 총장과 지도부가 성명을 발표했지만, 미국 정치권 인사의 반발은 끊이지 않고 있는 모양새다. 또 지난 11일(현지시간) 하버드 일부 학생단체가 ‘팔레스타인 지지’ 주장을 철회한 가운데 국내 대학에서도 이와 비슷한 성명이 게시돼 갑론을박이 이어지고 있다.
◆하버드 학생과 지도부 간 마찰
하버드 팔레스타인 연대 그룹은 성명에서 “사건은 진공상태에서 발생한 것이 아니다”며 “지난 20년 동안 가자지구에 사는 수백만 명의 팔레스타인인들은 ‘야외 감옥’에서 살게 강요받았다”고 밝혔다. 또 이들은 “이스라엘의 폭력은 75년 동안 팔레스타인 존재의 모든 측면을 구조화했다”며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앞으로도 이스라엘의 폭력을 온전히 감당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자 클로딘 게이(Claudine Gay) 하버드 총장은 9일 성명에서 “하마스가 자행한 테러리스트의 만행을 규탄한다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밝혔다. 이어 그는 다음날 발표한 두 번째 성명에서 “우리 학생들이 스스로 주장할 권리가 있지만 어떤 학생단체나 심지어 30여개의 학생단체도 하버드대학이나 지도부를 대변할 수 없다”고 전했다. 이와 별개로 하버드대 지도부는 9일 자체 성명에서 “이번 주말 이스라엘 시민을 겨냥한 하마스의 공격으로 촉발된 죽음과 파괴, 그리고 현재 진행 중인 이스라엘과 가자의 전쟁으로 인해 마음이 아프다”고 애도했다.
그러나 하버드대 측의 성명 발표에도 미국 정치권은 우려의 목소리를 냈다. 하버드대 총장이자 재무장관을 지낸 래리 서머스(Lawrence Summers)는 X(옛 트위터)에 “대학 지도부의 지연된 성명이 당장 필요한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한다”고 비판했다. 이어 그는 “테러범들이 음악 축제에 참석한 수백 명의 이스라엘인들을 살해하고 강간하며 인질로 잡았다”면서 “조지 플로이드의 죽음(2020년 흑인 남성 조지 플로이드를 체포하는 과정에서 무릎으로 짓눌러 숨지게 한 사건)이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하버드대학이 발표한 성명에서 도덕적 명확성에 근접하는 어떤 것도 찾을 수 없는 이유는 무엇인가?”라고 전했다.
하버드 로스쿨을 졸업한 공화당 테즈 크루즈(Sen. Ted Cruz) 상원의원과 공화당 엘리스 스테파닉(Rep. Elise Stefanik) 의원도 X에서 학생단체의 성명을 비판했다. 크루즈 의원은 “이스라엘과 함께할 것인지, 수천 명의 여성과 어린이를 강간·납치·살해하는 테러범들을 선택할 것인지를 고려했을 때 31개의 학생단체가 테러범들을 선택한 것이다”고 비판했다. 스테파닉 의원은 하버드 지도부를 향해 “사악한 반유대주의 발언을 즉시 공개적으로 규탄할 것”을 촉구했다. 또 그는 “하버드 학생 단체가 700명이 넘는 이스라엘인을 죽인 하마스의 야만적인 테러 공격에 대해 이스라엘을 비난하는 것은 혐오스럽고 가증스럽다”고 전했다.
◆하버드생 일부 입장 번복…신상 공개도
분쟁이 격화하는 와중 하마스의 기습 공격의 책임을 이스라엘로 돌렸던 하버드대 학생들이 비판 여론에 밀려 입장을 바꾸고 있다고 전해졌다. 11일(현지시간) 뉴욕포스트에 따르면 “모든 폭력 사태의 전적인 책임이 이스라엘 정권에 있다”는 취지의 성명에 서명한 하버드 학생단체 중 4개 모임이 지지를 철회했다. 하버드대 서남아시아 학생단체는 “성명에 동참한 사실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한다”며 “테러 조직 하마스의 학살을 강력하게 규탄한다”고 밝혔다.
이같이 학생들이 태도를 바꾸는 이유는 하버드생이 졸업 후 직장으로 선호하는 월스트리트의 싸늘한 분위기와 관련이 있다는 분석이다. 실제 헤지펀드(소수의 투자자로부터 자금을 모집하여 운영하는 일종의 사모펀드)계의 거물인 빌 애크먼(Bill Ackman) 퍼싱스퀘어 캐피털 회장은 이스라엘 비난 성명에 서명한 하버드대 학생 단체가 월스트리트의 ‘취업 블랙리스트’에 올랐다는 사실을 공개했다. 그는 X에 “많은 최고경영자들이 혹시라도 이스라엘 비난 성명에 참여한 하버드 졸업생을 채용하는 일이 없게 하겠다”면서 “학생단체 명단을 구하고 있다”고 밝혔다.
12일에는 ‘이스라엘 규탄’ 성명을 낸 하버드대 학생들의 이름과 사진이 공개돼 논란이 더욱 커졌다. 전날 하버드대가 있는 보스턴 시내에는 대형 전광판이 설치된 트럭이 등장했는데, 전광판에는 ‘하버드대의 대표적인 유대인 혐오자들’이란 문구와 함께 ‘이스라엘 책임론’ 성명에 서명한 34개 하버드 학생단체 회원들의 이름 및 사진이 게재됐다. ‘이들을 퇴학시켜라’는 등의 내용도 담긴 것으로 알려졌다. 학생들의 신원을 공개한 주체는 미국의 보수적 비영리단체인 ‘어큐러시 인 미디어’로 1960년대부터 베트남 전쟁에 비판적인 미국 언론에 대한 감시활동을 하는 등 보수 활동을 벌이는 단체다. 이 전광판 사진이 엑스(X·옛 트위터)를 통해 확산되면서 이번 갈등이 ‘신상털이’에 대한 논쟁으로도 번진 상황이다.
◆국내 대학서도 ‘팔레스타인 지지’ 논란?
15일 국내 대학가에서도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성명서가 내걸려 논란이 일고 있다. 해당 성명서는 수일전부터 고려대, 명지대, 서울대, 서울시립대, 연세대, 한국외대, 홍익대 등의 교정 내 게시판에 붙어있다. ‘노동자연대 청년학생그룹’이란 이름으로 게시된 성명서에는 “하마스의 공격은 이스라엘의 공격·학살에 맞선 정당한 저항”면서 “한국 청년 학생들도 필레스타인에 연대와 지지를 보내자”는 주장이 적혀있다. 또 “이스라엘에 저항하는 것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든 팔레스타인인들의 정당한 권리”며 “하마스의 공격은 최근 더 심화하던 이스라엘의 만행에 대한 대응이기도 하다”는 내용도 확인할 수 있다.
‘팔레스타인 지지’ 성명서를 접한 학생들 간 견해 차이는 온라인에서의 언쟁으로 나타났다. 대학생 온라인 커뮤니티 ‘에브리타임’에는 “팔레스타인을 옹호하는 대자보는 떼도 되는 게 아니냐”, “사실상 테러 동참하라는 포스터” 등의 비판하는 글이 올라오기도 했다.
반면 해당 성명에 대해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팔레스타인 지지가) 왜 비판받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팔레스타인이 실효 지배하고 있던 땅을 이스라엘이 강제 점령한 것도 잘못된 것 같다” 등의 반응도 보였다. 일부 학생들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중 어느 쪽을 지지하는 것이 옳은지를 두고 논쟁하는 것에서 나아가 서로의 정치적 신념을 비난하면서 논쟁은 격화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