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피란길에도 무차별 포격…‘인도적 대피’는 없었다

선명수 기자 2023. 10. 15.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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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하다던 도로서 민간인 사망
유일한 탈출구 ‘라파 통로’ 폐쇄
“대피령은 사실상 강제 이주 명령”
지상전 준비하는 이스라엘군 14일(현지시간) 가자지구와 인접한 이스라엘 국경 근처에 주둔한 이스라엘 군부대에서 군인들이 탱크에 올라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는 이날 군부대를 방문해 사실상 지상군 투입을 기정사실화했다. EPA연합뉴스

이스라엘이 약속했던 안전한 대피로는 없었다. 이스라엘은 대대적인 지상작전을 앞두고 가자지구 주민들에게 “24시간 안에 대피하라”는 최후통첩을 내렸지만, 명령에 따라 남쪽으로 향하던 주민들은 이스라엘군의 무차별 공습을 받았다. 목숨을 걸고 가까스로 이집트 국경 인근에 닿은 주민들도 막힌 국경 앞에서 피란처를 찾지 못하고 있다.

설령 국경이 열린다 하더라도 이는 ‘인도적 대피’가 아니라 사실상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가자지구 밖으로 추방하기 위한 ‘강제이주’ 명령으로, 국제법 위반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14일(현지시간) 외신 보도에 따르면 이스라엘군이 전날 가자지구 북부 지역 주민들에게 24시간 이내 대피하라는 명령을 내린 뒤 주민 수십만명이 탈출을 이어가고 있다. 가자지구 주민 230만명 중 절반에 달하는 110만명이 대상이다. 대피령 이틀째인 이날 포탄이 떨어지는 아비규환 속에 당나귀와 수레를 끌고 남쪽으로 향하는 인파로 대혼잡이 빚어졌다.

특히 이스라엘군이 대피 기한까지는 안전할 것이라고 보장했던 일부 도로마저 포격을 당해 피란길에 오른 민간인 다수가 죽거나 크게 다친 것으로 전해졌다. CNN과 BBC 등에 따르면 13일 가자지구 남쪽으로 향하는 도로인 살라 알딘과 알 라시드가 포격을 당해 70명이 숨지고 200명이 크게 다쳤다. 사망자 대부분은 여성과 어린이였다. 그러나 이스라엘군은 사건 발생 이틀 후인 15일 오전 이 공격은 자신들의 소행이 아니라고 부인하면서, 미사일이 아니라 지상의 폭발장치로 인한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가까스로 남쪽에 도달한 주민들도 갈 곳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다. 가자지구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탈출로인 ‘라파 통로’는 사실상 폐쇄됐다. 가자지구 남부와 이집트를 잇는 라파 통로는 이스라엘이 봉쇄한 가자지구 밖으로 탈출하거나 구호물자를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생명줄’이다.

앞서 미국 정부는 이중국적자 등 미국인의 통행을 허용하기로 이집트 정부와 합의했다고 밝혔지만, 목격자들에 따르면 이집트 당국은 가자지구와의 국경을 따라 군사력을 증강 배치하고 임시 시멘트 장벽을 설치하고 있다.

일부는 아예 대피를 포기하기도 했다. 아흐메드 오칼은 “남쪽으로 가는 길에 아내와 아이들의 목숨을 위태롭게 할 수는 없다”면서 “차라리 살던 집에서 죽겠다”고 말했다. 일주일째 이어진 폭격으로 이미 극심한 인도주의적 위기 상황에 놓인 가자시티의 알쿠드스 병원 역시 시설을 폐쇄하고 대피하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있다. 중환자들을 비롯해 인큐베이터에 있는 아기들, 어린이 환자 등을 이동시킬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세계보건기구는 이스라엘의 대피령이 병원에서 치료받고 있는 중환자에 대한 사실상 “사형선고”와 다름없다고 비판했다.

유엔 역시 100만명이 넘는 인구가 24시간 안에 대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이스라엘이 이를 철회할 것을 요구했지만, 이스라엘 정부는 대피 기한을 14일에 6시간 연장한 데 이어 15일 추가로 3시간 연장하는 데 그쳤다.

그러나 설령 이집트 국경이 개방돼 대피 통로가 열린다 하더라도 이스라엘이 가자지구를 완전히 포위해 공격하는 상황에서 주민대피령은 사실상 ‘추방’과 다름없으며, 이는 국제법상 전쟁범죄에 해당하는 강제이주라는 지적이 나온다. 애틀랜틱카운슬의 연구원이자 인권변호사인 기수 니아는 “이번 대피 명령은 민간인에 대한 강제이주 명령”이라며 “국제형사재판소가 조사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국제적십자위원회도 “이스라엘이 가자지구 포위 공격을 통해 식량과 물, 전기를 끊은 상황에서 주민들에게 집을 떠나라고 명령하는 것은 국제 인도법 위반”이라고 비판했다.

선명수 기자 sm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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