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칼럼] 한글날을 셀리브레이트하자?
김행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자가 “드라마틱하게 엑시트하도록 하겠다고 한 말이 사퇴로 실현되었다. 577돌을 맞은 한글날을 전후해 일어난 사달이다. 만약 김 후보자가 취임해 한글날을 맞았다면, “프라우드한 한글, 한글날을 셀리브레이트하자고 했을 법하다.
한 일간지의 한글날 포토뉴스 제목이 “577돌 한글날에 도심 속 ‘숨은 한글 찾기’ 였다. 그만큼 도심 간판에서 한글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얘기다. 주요 식당가나 번화가를 거닐다 보면, 제국주의 열강의 조차지나 외국인 촌으로 느껴지는 경우가 적지 않다. 헤어숍, 헤어디자이너 등 직업과 그 종사자가 영어로 표기해야 전문적이고 세련되어 보이는 것으로 착각한다. 법학전문대학원은 로스쿨로 더 자주 불리고, 의사들은 서로를 닥터라고 부른다. ‘전망’을 ‘뷰’라고 하는 등 TV 예능 프로그램에서도 일상 용어를 굳이 영어로 말해 ‘교양’ 있는 척한다. ‘○○파크’ ‘○○캐슬’ ‘○샵’ 등 아파트 이름만 나열해도 이러한 예는 셀 수 없이 많다.
KBS 보도에 따르면, 역사와 전통을 기리는, 공주와 부여의 대백제전조차 온통 외국어로 채색되었다고 한다. 핵심 즐길 거리의 하나가 ‘수상 멀티미디어쇼’라고 소개되고, 공연 설명 자료에도 ‘워터 커튼과 워터 스크린을 활용한 미디어 맵핑’이라고 돼 있었다고 한다. 그 밖에도 ‘뿌리 환타지 헤어쇼’ ‘문중 퍼레이드’ ‘조선 황실 시니어 패션쇼’ ‘K-효 페스타’ 등을 접하면 한탄할 기운조차 없어진다.
한글날 기념 논평에서 여야는 한목소리로 자랑스러운 한글의 발전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했다. 말잔치뿐이었다. 잘못된 외국어 사용에 대한 합당한 비판이나 조치가 한글날에서나마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정작 강조점은 정치 활동과 관련된 논평이었다. 세종대왕의 민생 정신과 애민 사상을 본받고 막말을 삼가는 것도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한글날 본연의 의미가 더 강조될 필요가 있다. 목숨 바쳐 한글을 지키고 발전시켜온 주시경 선생과 최현배 선생의 뜻을 기려 한글 발전에 더 신경을 써야 한다. 한글 연구를 독립운동으로 생각했고 실제 옥고를 치르기도 한 이들은 세종대왕 옆자리에 모셔야 할 위인들이다.
김행 후보자 사례는 그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문화 전체가 그렇다는 강변을 하려는 게 아니다. 간판이나 상호 등에서 보듯 대중문화의 상당 부분이 그리된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국가 정책을 입안하고 집행할 인물들이 그에 영합하거나 앞장서기까지 해야겠는가. 부끄러운 문화를 지적하고 비판하는 목소리도 적잖다.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한다.
보그 병신체에 젖은 사람들은 오히려 일반 시민보다 정부 인사들이다. 보그 병신체는 세계적 패션 잡지 ‘보그(Vogue)’의 제호에 비속어 ‘병신’을 결합한 말이다. 영어 단어를 소리 나는 대로 쓰고 주로 조사와 어미만 우리말로 붙이는 한글판 보그식 문체를 말한다. “거번먼트 인게이지먼트(Government Engagement, 정부의 관여)가 레귤레이션(Regulation, 규정), 2023년 어그레시브(aggressive, 공격적)하게 뛰어보자.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해 12월21일 제12차 비상경제민생회의 겸 제1차 국민경제자문회의 마무리 자리에서 내놓은 발언이다. 가짜뉴스가 아닐까, 귀를 의심했다. ‘멤버 YUJI’라는 용산 내간체가 있으니 이것은 용산 사랑체라고 해야 하나.
기성 질서를 지키는 것이 보수다. 우리나라의 기성 질서는 무엇인가. 식민지 시기에 기성 질서는 제국주의 질서였고, 보수는 그것을 지키고자 했다. 유감스럽게도 우리나라는 해방되었어도 독립하지 못했었다. 친일 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해 해방 후에도 식민 지배 질서가 기성 질서로 유지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미군정 통치와 국가운영 능력 부족이 이유로 제시되었고, 그것이 일정한 명분으로 인정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우리나라 경제력은 OECD 10위권 안팎이다. 국제적으로 선진국으로 인정받았다. 이제는 나라의 독립성과 고유 문화를 지키는 것이 보수의 가치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경제력과 국력에 걸맞은 품격 있는 보수를 기대하는 것은 아직 시기상조인가.
언어를 잃은 나라는 미래가 없다. ‘한글’이라는 말을 만들고 우리말 문법을 최초로 정립한 주시경 선생의 말을 새기자. “오늘날 나라의 바탕을 보존하기에 가장 중요한 자기 나라의 말과 글을 이 지경으로 만들고 도외시한다면, 나라의 바탕은 날로 쇠퇴할 것이요, 나라의 바탕이 날로 쇠퇴하면, 그 미치는 바 영향은 측량할 수 없이 되어 나라 형세를 회복할 가망이 없을 것이다. 이에 우리나라의 말과 글을 강구하여 이것을 고치고 바로잡아 장려하는 것이 오늘에 시급히 해야 할 일이다.”
정병기 영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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