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세 단색화 거장 “뉴욕, 딱 기다려 봐”... 마지막까지 신작 의욕 불태웠다

허윤희 기자 2023. 10. 15.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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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 별세한 박서보 화백
박서보 화백이 별세 넉 달 전인 지난 6월 자택이자 작업실인 서울 연희동 ‘기지’에서 자신의 작품을 배경으로 서 있다. 손에 들고 있는 갈색 노트는 올해 쓰고 있던 일기장. 1972년부터 하루도 빼놓지 않고 일기를 써왔다는 그는 50권의 일기를 보물로 꼽으며 “한국 현대미술사의 한복판을 지나온 사람의 기록이니 의미가 깊을 것”이라고 했다. /이태경 기자

“하루 사이 바람의 결이 바뀌었다. 가을인가. 바다 바위에 파도가 부딪히는 소리도 사뭇 차가워지고. 내년에도 이 바람에 귀 기울일 수 있으면 좋으련만.”

지난달 부산 바다 앞에서 써내려간 노(老)화가의 소망은 미완으로 남게 됐다. 주인 잃은 페이스북에는 내년 화이트 큐브 뉴욕에서 선보일 신작 작업에 마지막까지 의욕을 불태웠던 흔적이 가득하다. “연초부터 시작한 새 작업에 탄력이 붙기 시작했다. 이봐 Jay(화이트 큐브 CEO), 딱 기다려봐봐.”

단색화 거장 박서보(92) 화백이 14일 오전 별세했다. 지난 2월 폐암 3기 판정을 받은 화가는 당시 페이스북에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캔버스에 한 줄이라도 더 긋고 싶다”고 쓰고 최근까지 왕성하게 활동해왔다. 지난 6월 본지 인터뷰에선 수척해진 모습으로 “매일매일 내 몸이 약해지고 있는 걸 체감한다”며 “무릎이 꺾이고 손이 떨려 연필 선이 달달거리는 심장 초음파 선 같을 때가 있다”고 했다. 화백의 둘째 며느리 김영림씨는 본지 통화에서 “며칠 전 갑자기 상태가 안 좋아지셔서 병원에 입원 중이었다”면서 “의식을 차리셨을 때 ‘퇴원하자마자 작업을 해야 하니 배접해 놓아라’고 당부하신 게 마지막 말씀이 됐다. 투병 중 아무리 몸이 아파도 하루에 한두 시간은 연필을 잡으셨다”고 전했다.

지난 3월 제주 서귀포에서 열린 '박서보 미술관'(가칭) 기공식에 참석해 인사말을 하는 박서보 화백. /뉴시스

한국 현대미술의 상징과도 같은 화가다. 일제강점기인 1931년 경북 예천에서 태어나 1950년대 앵포르멜 운동을 이끌었고, 1970년대 초부터 ‘묘법’이라 불리는 무채색 단색화 작업을 해왔다. “스님이 온종일 목탁을 두드려서 참선의 경지에 들어가듯” 연필로 끊임없이 선을 긋는 반복을 통해 정신을 수양하고 탐구하는 작업이다. 민중미술이 지배하던 1980년대 한국 화단의 폐쇄성에서 벗어나 현대미술이 가야 할 방향을 제시한 거목이었고, 단색화를 세계 무대에서 인정받게 한 일등 공신이었다.

그도 한때 전위예술, 아방가르드의 선두주자였다. 청년 박서보는 1950년대 중반, 정부 주도 국전을 거부하고 반기를 들었다. “홍대 다닐 때, 김환기 선생 권유로 국전에 출품한 적이 있었는데, 극소수 작품 빼고는 전부 한 사람이 그린 것같이 보이더라. 분기탱천한 20대라 한탄을 했다. 일제강점기 지나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은 세대로서 어떻게 그림이 저렇게 저항 정신이 없을 수 있냐고.” 1956년 서울 명동 동방문화회관에서 4인전을 열고, 반(反)국전 선언문을 전시장 문 앞에 붙였다.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이 선언 후에야 앞으로 나아가야 할 작업의 방향성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게 됐다”며 “큰소리치고 나면 책임을 지려고 더 세차게 노력하는 법”이라고 했다.

올해 6월 9일 서울 연희동 기지재단에서 본지와 인터뷰한 박서보 화백.이태경기자

박서보의 대표작이자 단색화 초기를 상징하는 ‘연필 묘법’ 연작은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나왔다. 본지 인터뷰에서 그는 “노자, 장자를 읽고 또 읽으며 나는 서양 이론에 의한 화가였지, 기실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고 했다. “옛 선비들은 정쟁으로 피폐해진 자아를 다스리기 위해 글씨를 쓰고 난을 쳤어요. 반복적인 일을 하다 보면 몸과 마음이 맑게 걸러집니다. 그런 세계관으로 나를 비워내야 한다는 것까지는 다가갔는데, 어떻게 표현할지 방법이 없어 고민이 깊었어요.”

다섯 살 난 둘째 아들이 형의 국어 공책을 펼쳐 놓고 글씨 연습을 하는 모습을 보고 깨달았다. “종이가 구겨지고 제 맘대로 쓸 수 없으니 짜증 내면서 연필로 죽죽 그어버리는 걸 보고, 아, 저거구나, 저 체념의 몸짓을 흉내 내 보고 싶어 만든 작품”이 최초의 연필 묘법인 ‘Ecriture No. 6-67′이다.

박서보 화백의 묘법 'No.2-80-81'. /조선일보 DB

80세까지는 그도 안 팔리는 작가였다. 박서보는 50여 년을 뚝심 있게 작업해왔으나 단색화는 10여 년 전부터 재평가되기 시작했다. 2015년 베네치아비엔날레 병행 전시로 열린 단색화전은 국제 무대에서 단색화의 위상을 끌어올린 본격적 사건이 됐다. 2014년 파리 페로탱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영국을 대표하는 화랑 화이트큐브 전속 작가가 돼 2016년 런던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1975년 작 ‘묘법 No. 37-75-76′이 지난 5일 홍콩 소더비 경매에서 260만달러(약 35억원)에 팔리면서 그의 작품 중 최고가를 기록했다. 2019년 국립현대미술관은 박 화백의 회고전을 열며 ‘지칠 줄 모르는 수행자’라는 전시 제목을 달았다.

2014년 프랑스 파리의 대형 화랑 페로탱에서 단색화가 박서보 개인전이 열렸다. 사진은 자신의 '묘법' 작품 앞에 서 있는 박서보 화백. /조선일보 DB

생전 일기장 50여 권을 남겼다. 1972년부터 하루도 빼놓지 않고 쓴 일기다. 그는 “평생 치열하게 살아온 나의 흔적이 담긴 보물”이라며 “사람의 기억이란 왜곡되기 쉽고, 나이 들어 가면서 기억력에만 의존할 수 없어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고 했다.

올해 광주비엔날레에 상금을 쾌척해 ‘박서보 예술상’을 제정했으나, 첫 회 만에 상이 폐지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미술계 일부 그룹과 시민 단체가 개막식에 나타나 “광주 정신 먹칠하는 박서보 상을 폐지하라”고 외쳤는데, 소식을 접한 박서보는 페이스북에 담담히 썼다. “이 주장에는 치열함이 없다. 사실관계도 맞지 않고 사유의 흔적도 읽을 수 없다. 공부를 더 해야 한다.”

유족으로는 아내 윤명숙씨를 비롯해 2남 1녀가 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1호실, 발인은 17일 오전 7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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