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자들 퇴근 뒤 집결 ‘밤의 싸움’ 주도…정부 폭압 맞서
- “기성세대 잘못에 왜 학생이 다치나”
- 시내 장악한 탱크 보고 울분 치밀어
- 부산 중·서구, 마산 창·남성·오동동 등
- 오후 6시 전후 모여들어 시위 합세
- 대학생들의 평화적 낮 시위 있었다면
- 밤엔 관공서·경찰차 파괴 등 과격해져
- 중앙정보부 연행자 대다수가 노동자
- 민주주의 파괴에 저항권 표출로 평가
1979년 10월 18일 저녁. 26세 청년 가스설비공 곽동효 씨는 부산 중구 남포동에 깔린 탱크를 보곤 울화통이 치밀었다. 그는 한 택시기사에게서 ‘이번에 잘못하면 학생들이 많이 죽게 생겼다’는 말을 전해 들었다. 전날엔 최루탄을 뒤집어쓴 여학생이 치마가 찢어진 채 울음을 터뜨리는 모습도 목격했다. 그날 계엄령이 떨어진 부산은 시내 곳곳에 군인이 깔렸다. 이해할 수 없었다. ‘유신 같은 기성세대 잘못에 왜 학생이 다쳐야 하는가’. 대통령도 내 손으로 직접 뽑지 못하게 만들어놓곤 시민에게 죄를 씌우는 광경에 울분이 치솟았다. 그는 퇴근 뒤 곧장 시내로 달려갔다. 부마민주항쟁 발발 3일 차였다.
곽 씨는 군인들에게 따져 물었다. “당신들 형제고 친구인데, 제대해서 고개를 어떻게 들고 다닐 것이냐.” 머지않아 곽 씨 주위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한 중년 남성이 외쳤다. “이러지 말고 부산시청(당시 중앙동)으로 갑시다.” 마침 누군가 대형 태극기를 준비해왔다. 1000여 명이 태극기를 앞세워 애국가를 부르며 행진했다. 대열 선두에 곽 씨가 있었다. 시위대는 돌을 던져 파출소를 부수거나 경찰관을 쫓아내기도 했다.
시청에 이르자 군용트럭 한 대가 시위대 앞에 멈춰 섰다. 무장 군인들이 시위대에게 곤봉을 휘둘렀다. 진압을 피해 버스정류장으로 달아난 곽 씨는 뒤따라온 경찰에게 몽둥이로 머리를 맞았다. 피가 터져 나오는 가운데서도 그는 필사적으로 도망쳐 버스에 올랐다. 경찰 신고가 두려워 병원은 엄두도 못 냈다. “나는 학생도 아니었고 조직도 없는 노동자였습니다. 노조만 들어도 피해가 컸던 시절입니다. 잡혔으면 분명 용공으로 몰렸을 겁니다.”
▮‘낮의 시위’와 달랐던 ‘밤의 싸움’
곽 씨의 증언이 보여주듯 10·16부마항쟁의 또 다른, 혹은 진정한 주역은 노동계층이었다. 노동계층 시위의 주 무대는 부산 중·서구, 마산 창·남성·오동동 등 도심이었다. 이들은 오후 6시 퇴근 시간을 전후로 모여들었다. 학내·가두시위가 해산돼 먼저 도심에 집결한 학생들과 자연스럽게 합세했다. 해가 지고 밤이 찾아오면서 본격적인 싸움이 시작됐다. 낮의 시위는 행진 중 맞닥뜨린 경찰에게 소리를 지르거나 빈 음료수병·자갈 등을 던지는 정도였으나, 밤이 되면서 투석은 물론 경찰관의 곤봉을 빼앗는 수준으로까지 커졌다. 파출소나 동사무소 같은 관공서는 파괴를 피하기 힘들었다. 국가의 건물이나 차량을 대상으로 한 방화 시도도 이어졌다.
노동계층의 시위는 즉흥적이었으나 결속력이 대단했다. “모이자”는 외침에 순식간에 한 곳으로 집결했다. 누군가 애국가를 부르면 모두가 따라 불렀다. 당시 신설돼 서민에게 큰 부담이던 부가가치세를 폐지하라는 주장, 김영삼 총재 제명을 철회하라는 목소리도 도심 시위에서 새롭게 등장했다. 학생 주도 시위와는 또 다른 면모였다. 계엄령 이후인 10월 21일 사상구(당시 북구) 학장동 사상공단 일대에 시국 비판 벽보가 여럿 붙는 등 시위가 어려운 상황에서도 노동계층은 계속해서 저항했다.
▮유독 잔혹했던 처사
반공이 곧 국시인 시절, 노동자가 ‘정치적 투쟁’에 나서는 것은 목숨을 내놓은 것과 같았다. 시위는커녕 노조 가입조차 큰 불이익이 뒤따랐다. 그래서인지 노동계층에 가해진 폭력은 시위 주동자급으로 잔혹했다. 없는 죄까지 뒤집어씌우는 지경이었다. 남포파출소 방화범 조작 사건이 대표적이다. 그해 10월 17일 밤 9시55분께 이곳에서 불이 났다. 경찰은 당시 시위대가 이곳을 습격했다는 이유만으로 방화로 단정, 황창문(당시 27) 씨 등 3명을 붙잡았다. 세 사람은 생면부지였다. 그런데도 공범으로 몰린 이들은 4~5일간의 폭행과 허위자백 강요 끝에 없는 죄를 털어놨다. 황 씨는 2019년 재심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출소 뒤 얻은 폐결핵으로 1996년 생을 마감한 이후였다.
수사기관에 고초를 겪은 대다수는 노동계층이었다. 국제신문이 15일 단독 입수한 중앙정보부의 1979년 10월 24일자 ‘연행자 직업별 현황’만 봐도 그렇다. 중정은 당시 연행된 1513명(부산 1033명 마산 480명)을 16개 직업으로 분류해 상황을 기록했다. 학생이 440명(29%)으로 가장 많으며, 공원(工員·공장 노동자)이 234명(16%)으로 뒤를 잇는다. 공원의 수에 잡급직(200명·13%) 노동(70명·5%) 운전수(49명·3%) 선원(29명·2%)을 더하면 총 582명(38.5%)의 노동계층이 붙잡힌 것으로 파악된다. 특히 경공업 중심지였던 마산은 당시 정부가 추진한 중공업화학화에 경제적 피해를 본 노동계층이 많았다. 때문에 학생(63명)보다 공원 등 노동계층(총 252명)의 참여가 두드러졌다. 주동자 격인 A 급 연행자 수도 학생 44명, 노동계층 31명으로 비슷했다.
▮민주주의 위한 마지막 수단 ‘저항권’
노동계층의 시위는 분명 파괴적이었다. 도심 상가·주택은 적잖은 피해를 봤다. 그러나 주요 타깃은 파출소나 동사무소와 같은 관공서와 경찰차량, 진압에 나선 경찰과 같은 ‘국가’였다. 정권에 재갈이 물려진 언론도 공격 대상이었다. 공공질서 파괴는 목적이 아니었다. 민주주의를 엉망으로 만든 이들이 걸어온 싸움에 응했을 뿐이었다.
이를 두고 학계는 민주주의를 되찾기 위한 회복적 폭력, ‘저항권’이 발동한 것으로 해석한다. 경남대 이은진 사회학과 명예교수(부마민주항쟁진상규명위원회 상임위원)는 “늦은 밤 어둠이 내린 거리에는 노동자의 파괴적 저항이 있었다. 도심 시위는 노동자들에게 맡겨졌다”며 “취조 기록을 보면 주동이 아닌 학생에겐 ‘학생이라면 시위도 할 수 있다’는 인식이 읽힌다. 반면 노동계층은 단순 가담자도 거칠게 연행해 혹독히 고문했다”고 전했다. 그는 또 “유신 등으로 헌정질서가 유린됐고, 국가 스스로 이를 회복하리라 기대하기도 불가능했다. 폭력 말고는 노동계층이 망가진 국가에 맞설 수단이 없었다. 정당한 저항권 수행으로 봐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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