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심항쟁 도화선 ‘동아대 시위’ 푸대접 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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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오빠에 대해 얘기할 기력이 없습니다. 희망고문 같은 상처를 다시 받기 싫어요. 오빠의 순수했던 마음은 하늘이 평가할 거라 생각합니다."
부마민주항쟁 이틀 차인 1979년 10월 17일 당시 동아대 시위의 주역 고(故) 이용수 씨 동생 정숙(67) 씨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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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이상 오빠에 대해 얘기할 기력이 없습니다. 희망고문 같은 상처를 다시 받기 싫어요. 오빠의 순수했던 마음은 하늘이 평가할 거라 생각합니다.”
부마민주항쟁 이틀 차인 1979년 10월 17일 당시 동아대 시위의 주역 고(故) 이용수 씨 동생 정숙(67) 씨의 말이다. 그는 민주화를 꿈꿨던 오빠의 헌신이 인정받기를 오랜 시간 기다려왔다. 그러나 지금 그에겐 국가에게 희망을 품을 마음도, 원망할 힘도 모두 소진됐다.
이 씨는 항쟁 당시 동아대 학도호국단 사단장을 맡고 있었다. 1980년대 사회운동을 주도한 총학생회와 달리, 당시 학도호국단은 그 이름에서 짐작되듯 어용적 성격을 보였다. 그런데도 이 씨는 전날인 10월 16일 부산대 봉기 소식을 전해듣고는 시위에 앞장섰다. 동아대 시위는 그날 저녁 학생과 시민이 벌인 도심 항쟁의 도화선이었다.
시위를 주동한 죄로 이 씨는 41일간 구금됐다. 정신을 잃을 정도의 고문에 친구 얼굴조차 알아보지 못할 정도였다. 고문에 못 이겨 투신까지 기도했다. 고문의 후유증인지 그는 1987년 9월 4일 33세의 이른 나이에 세상을 등졌다. 임종 전 그는 “좋은 세상이 오는 것 같은데 나는 못 보고 가겠구나”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동아대 시위가 없었다면 항쟁은 하룻밤 싸움에 그쳤을지 모른다. 그런데도 이 씨는 지금껏 역사의 찬밥 신세다. 모교인 동아대는 이 씨는 물론 당시 시위를 기리는 일조차 관심이 없다. 외려 기념 조형물을 건립해주겠다는 부마민주항쟁기념재단의 제안을 거절했다. 10월 16일을 학교 기념일로 제정한 부산대와 대조적이다. 국무총리 소속 부마민주항쟁진상규명위원회 구수경 위원장은 “동아대 시위는 도심 항쟁으로 이어지는 중요 계기로 재조명이 필요하지만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고 있다. 이제라도 온당한 노력이 따라야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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