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마항쟁 계엄군에 ‘실탄 진압’ 허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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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 방어에 속할 때는 자위권 행사(실탄 발포)가 가능하다.'
15일 국무총리 소속 부마민주항쟁진상규명위원회에 따르면 항쟁 당시 박 대통령이 박찬긍 계엄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어 계엄상황에 대한 지시를 하던 중 사령관이 박 대통령에게 실탄 발포 여부를 물었다는 사실이 보안사 첩보요지 등의 기록에 의해 최근 확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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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자위권 행사 가능”…당시 계엄사령관에게 발언
진상규명위 최근 기록 확인…실제 총격 이어지지는 않아
‘정당 방어에 속할 때는 자위권 행사(실탄 발포)가 가능하다.’
1979년 10월 부마민주항쟁 당시 박정희 전 대통령이 계엄사령관에게 전한 말이다. 전두환 씨가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압을 두고 한 변명과 유사하다.
15일 국무총리 소속 부마민주항쟁진상규명위원회에 따르면 항쟁 당시 박 대통령이 박찬긍 계엄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어 계엄상황에 대한 지시를 하던 중 사령관이 박 대통령에게 실탄 발포 여부를 물었다는 사실이 보안사 첩보요지 등의 기록에 의해 최근 확인됐다. 이에 박 대통령은 ‘지휘관이 알아서 하라’는 취지로 답했다. 시위대를 향해 총격을 가해도 된다는 뜻을 내비친 셈이다.
박 대통령이 당시 부산 마산 상황에 실탄 발포를 염두에 뒀다는 사실이 알려진 건 이번이 처음이다. 계엄령이 포고돼 공수부대 등이 투입됐으니 실탄과 공포탄도 당연히 지급된 상태였다. 육군본부 작전상황일지를 보면 그해 10월 18일 오후 7시55분 부영극장에 시민 600명이 운집했는데, 경찰의 동원 요청을 받은 공수부대가 공포탄 40발을 공중에 발사해 해산시켰다는 기록도 나타난다.
다행히 계엄군이 실탄을 쏘는 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박 대통령의 발언을 알게 된 정승화 당시 참모총장이 “(자위권은) 법에도 있는 이야기다. 와전될 우려가 많으니 더 이상 (실탄 발포) 말이 나오지 않도록 하라”고 선을 그은 영향으로 보인다. 박 대통령은 항쟁 동향을 보고하던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에게 격분하며 “앞으로 만일 서울에서 이런 사태가 발생하면 내가 직접 발포명령을 하겠다”고 소리친 것으로 익히 알려졌다.
유신정권은 부마항쟁을 ‘양아치들이 일으킨 폭동’으로 몰았다. 그해 10월 22일 부마항쟁에 대해 중앙정보부는 ‘불량배 및 10대 무직 청소년들이 다수 가세해 각목을 들고 경찰과 관공서 건물에 투석과 방화 등 폭력을 행사했다’고 청와대에 보고했다. 내무부 소요사건 일지에는 10월 16일과 17일 시위의 특징을 시민이 “양아치 풍의 시위대원들에게 콜라와 소주병을 줘 제지하는 경찰관들에게 무차별 투석과 각목을 휘두르게 하는 등 소요가 폭도화됐다”고 적혀 있다. 항쟁 참여자를 ‘쏴버려도 괜찮은 사람들’ 정도로 격하하려 했다.
항쟁 참여자 상당수가 젊은 노동계층이었기에 이 같은 매도가 이뤄진 것으로 해석된다. 당시 저녁의 도심 시위는 노동자가 주도했다. 이들은 빼앗긴 민주주의를 되찾자는 학생의 외침에 호응해 퇴근 이후 밤늦은 시각 도심 곳곳을 행진했다. 시위는 이때부터 본격화했다. 시위대는 국가의 폭력과 억압에 투석과 방화로 맞대응했다. 억압에 짓눌린 울분을 파괴적 방식으로 표출한 것이다. 노동자는 저항 수단으로 폭력 외 마땅한 방법을 찾지 못한 채 국가를 상대로 ‘진짜 싸움’을 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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