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고과 10점’의 유혹…그 형사가 멈칫한 이유 [한겨레 프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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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프리즘] 박수지 | 이슈팀장
그 형사는 회의감이 든다고 했다.
언론은 형사가 살인이나 방화범 같은 진짜 ‘나쁜 놈들’을 잡는 사건을 주로 조명하지만, 사실 많은 형사가 편의점에서 물건 훔친 범인을 잡거나 휴대전화 분실 신고를 처리하는 데 대부분의 시간을 보낸다. 편의점 앞에 꽂힌 우산을 훔친 범인을 찾으려고 압수수색영장까지 신청해야 할 때면 ‘현타’가 오기도 했지만, 잡범을 잡는 일도 형사의 일이라고 그는 말했다.
정작 형사로서 그가 깊이 회의감에 빠진 이유는 인사고과에 반영되는 ‘배점표’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일년에 두 차례 진행되는 강절도 특별단속 때 본청 차원에서 택시강도 사건은 40점, 절도는 종류에 따라 5~20점으로 차등화되는 식이다. 시도청별로 죄종을 보다 세분화해 점수를 매기기도 한다.
문제는 경계에 있는 일들이다. 한번은 가게 인테리어 철거 과정에서 나온 고철을 임시로 인도 위에 내놨는데 다음날 사라졌다며 인테리어업자가 신고한 사건이 있었다. 알고 보니, 한 할아버지가 고철 더미를 주워다가 이미 고물상에 팔아 몇만원을 남긴 상태였다. 할아버지는 경찰 조사에서 처음엔 “버려진 고철인 줄 알았다”고 했다. 절도죄가 되려면 ‘훔치려는 고의가 있었다’는 게 입증돼야 한다. 그러나 아버지가 이런 일로 경찰서에 온 것이 부끄러웠던 자녀들은 “경찰에 잘못했다고 하라”고 채근했고, 할아버지는 고개를 숙이며 잘못을 시인했다. 형사는 “검사가 기소유예할 거니 별문제 없을 것”이라며, 절도 혐의로 사건을 검찰에 넘겼다.
검거된 피해자가 혐의까지 시인하니 형식적으로 문제 될 건 없었다. 그러나 그는 “현행 실적경쟁 체계는 절도 액수도 적은데다 초범인 민생범죄 사안에서조차 형사들이 감수성 떨어지는 판단을 하도록 만든다”며 “어차피 재판에 가진 않을 테니 ‘점수나 따자’는 식으로 합리화하는 게 없지 않다”고 말했다.
지난 8월 잇단 흉기난동 사건이 발생한 가운데, 서울 종로구 대학로에서 중증 발달장애인 60대 남성이 흉기를 들고 집 앞에서 돌아다녀 특수협박 혐의로 구속돼 송치된 일이 있었다. 그가 흉기를 들고 배회한 것은 사실이지만, 남을 해하려는 협박의 고의가 있었는지는 따져볼 일이었다. 하지만 기초적 의사소통 외에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그가 긴급체포 뒤 17시간30분 홀로 있던 중에 경찰발 언론 보도로 그는 “주변이 시끄러워 홧김에 죽이러 나간” 범죄자가 돼버렸다. 체포부터 구속, 검찰 송치까지 엿새면 충분했다. 일부 시도청에선 담당 형사가 특수협박 배점에 구속 가점까지 받을 수 있는 사안이었다.
기자도 종종 기사를 쓰는 것보다 쓰지 않기로 결정하는 게 어려울 때가 있다. 특히 현장 기자가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인 사안일수록 기사를 쓰지 않기로 했다는 결정에 ‘괜한 헛수고나 했다’고 생각할 것 같아 미안한 마음도 든다. 기사를 ‘쓴 것’은 기억해주지만 쓰지 않기로 결정한 것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는 것도 잘 안다. 그렇지만 민감한 사안일수록 섣부른 오보를 쓰는 대신 ‘쓰지 않을 용기’가 중요하다. 그걸 실패로 낙인찍는다면 무리한 기사가 나올 환경을 조장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송치하면 10점, 불송치하면 0점. 이런 제도는 형사가 피의자를 불러 조사하기도 전부터 이미 성급한 예단을 내리게 하는 유인을 강화한다. 경찰 내부 실적경쟁 제도 자체가 ‘애매한 범인’을 양산하는 구조인 셈이다. 설령 검찰에서 불송치 결정으로 바뀌더라도 이미 쌓은 점수는 그대로다.
정치인 등 유력 인사 수사는 ‘과잉 수사’나 ‘봐주기 수사’ 아닌지 일거수일투족 언론의 검증을 받는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고철 판 할아버지나 흉기를 든 장애인과 같은 사건은 아무도 모른 채 지나가기 일쑤다. “인권을 최우선 가치로 하는 공감받는 수사로 국민의 눈높이에 부응하겠다”며 경찰은 지난해 인권 수사규칙을 만들었지만, 정작 범인 낳는 ‘배점표’ 앞에서 그런 규칙은 존재 이유가 없다.
suj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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