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끝별의 소소한 시선] 아가의 작은 손아귀 안에 우리 미래가

한겨레 2023. 10. 15.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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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끝별의 소소한 시선]

이십대 청년이 먼저 읽고 그리다. 김재영

정끝별 | 시인·이화여대 교수

첫 임신 소식을 전한 조카에게 “장하네”, 둘째를 임신했다는 후배에게 “진정한 애국자네”, 그 둘째가 쌍둥이라는 말에 “나라를 구했네”라는 덕담이 절로 나왔다. 여성·노동·계급 분야의 국외 석학은 0.78이라는 세계 최저 출산율을 보고 “대한민국 완전히 망했네요!”라며 머리를 감싸 쥐었고, 국내 한 기관에서도 700년 후 대한민국은 소멸할 거라 진단했다.

반출산주의자는 말한다, 아이들이 겪는 모든 고통을 예방하는 유일한 방법은 아이들을 태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라고. 부모는 아이를 탄생시킬 권리가 없다고. 급진적 페미니스트도 말한다, 여자라면 반드시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인류의 통념은 존재론이 아니라 정치·사회적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고. 이구동성 인간 혹은 여성은 출산의 수단이 아니라고. 틀린 말은 아니라서 아, 그럼, 우리나라는 어쩌라고?

출생과 관련된 디스토피아 하나, 영화 ‘가버나움’의 첫 장면이다. 살인죄로 수감된 빈민가 출신 소년이 부모를 고소해 원고석에 앉아 있다. 판사가 묻는다, “왜 부모를 고소했지?”. 소년이 대답한다, “나를 이 세상에 태어나게 해서요”, “아이를 돌보지 않은 부모가 지긋지긋해요”. 또 판사가 묻는다, “부모에게 원하는 게 있나?”. 소년이 대답한다, “더는 아이를 낳지 못하게 해주세요”.

선진국들의 출생률은 날로 저하되고 있는데도 빈곤국들의 높은 출생률로 세계 인구는 여전히 80억을 넘어서고 있다. 지금 지구에선 5초에 한명씩 굶어 죽어가고 기아 인구도 3억을 넘었다. 반출산주의자는 ‘낳음을 당하지’ 않음으로써 인구과잉으로 인한 기아와 자원고갈, 인권과 환경권과 동식물권 등의 문제를 해결 또는 억제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세계 인구의 절반을 감염시킬 목적으로 바이러스를 퍼트린다는 가상의 추리소설 ‘인페르노’가 가상으로만 읽히지 않는 이유다. 출생률 최저인 우리나라에서도 아이를 유기하고 살해하고, 방치하고 학대하는 사건은 비일비재하다.

출생 관련 디스토피아 그 둘, 8분 남짓한 ‘엑토라이프’(인공양육기)라는 가상의 영상이다. 인공 탯줄로 연결된 아기가 자라는 수백의 투명 타원형 인공양육기들이 원형경기장 관람석처럼 배치되어 관리된다. 한국이나 일본 등 저출생 국가들을 위해 개발하는 시설로 10년 이내에 실현 가능하다고 덧붙이고 있다. 이 엑토라이프는 1932년에 발표된 에스에프(SF)소설 ‘멋진 신세계’의 한 장면을 영상화한 것이다. 거대한 세계정부의 통제 속에서 모든 인간은 인공수정과 인공양육으로 태어나고 길러진다. 태어날 때부터 지능과 노동력에 따라 교육과 미래가 결정되고 계급으로 구분되는 ‘멋진 신세계’는 오늘날 낯설지 않다. 성관계는 자유롭되 연애와 결혼은 거부된다. 부모나 친족의 관계는 중요하지 않고 ‘꽃과 책’도 금지된다. 감정과 사랑은 사라지고 ‘소마’라는 마약을 통해 최고의 행복과 안정을 느낀다.

영화 ‘가타카’는 ‘엑토라이프’와 ‘멋진 신세계’ 중간쯤에 위치한다. 자연임신과 인공임신이 선택 가능한 미래 현실에서 자연임신으로 태어난 열성 유전자 주인공과 인공임신에 의해 선택적으로 조작된 우성 유전자 동생의 대결적인 삶을 그린다. 인공이 자연을 지배하는 계급사회다.

다시 현실로 돌아와, 딸 둘을 낳고 키운 워킹맘으로서 아이를 낳지 않아야 하는 이유를 대라면 입이 마를 지경이다. 우리의 출생률 저하가 여성, 노동, 계급에 더해 교육, 고용, 주택, 양육, 가족, 노인, 젠더, 양극화 등의 문제들과 구조적으로 얽혀 있기 때문이다. 그중 가장 큰 이유는 아이들이 불행하다는 거다. 최소한 불행한 사람을 낳고 키우지 말아야 할 도덕적 의무는 있다는 데 동의한다.

‘덮어놓고 낳다 보면 거지꼴 못 면한다’라는 1960년대 산아제한 표어가 양육과 (사)교육 비용에 비례해 계급 격차가 양극화되는 지금-여기에서도 유효하다는 게 아픈 현실이다. “둘만 낳아 잘 기르자”라는 1970년대 산아제한 표어도 이제는 다자녀 장려 메시지로 오히려 유효하다. 이제는 “한 아이를 키우는 데 ‘온 국가’가 필요해”진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의 지혜를 모아 젊은이들이 결혼하고 싶고, 또 아이들을 키우고 싶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 모두의 슬기를 모아 여성들이 마음 편히 아이를 낳을 수 있고 또 낳고 싶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 무엇보다 아이들이 행복하게 자랄 수 있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 “흔들리는 종소리의 동그라미 속에서/ 엄마의 치마 곁에 무릎을 꿇고/ 모아 쥔 아가의/ 작은 손아귀 안에/ 당신을 찾게 해주십시오”(정한모, ‘가을에’)가 디스토피아의 기도가 되지 않으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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