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의 마지막까지 線 긋다 떠난 '단색화 거장' 박서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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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색화 거장' 박서보 화백이 지난 14일 별세했다.
박 화백은 생전 "단색화는 서양 미술계에 없었던 '수렴의 미술'"이라고 강조해 왔다.
박 화백은 인터뷰에서 "단색화를 통해 보는 이의 고통과 번뇌를 빨아들이고 싶다"며 "이를 위해 색에 정신의 깊이를 담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10년간 세계 미술계에서 한국 단색화의 예술적 가치가 조명된 데는 박 화백의 역할이 컸다는 평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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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폐암 판정 후에도 왕성한 작품 활동
‘단색화 거장’ 박서보 화백이 지난 14일 별세했다. 향년 92세.
그는 지난 2월 SNS를 통해 “폐암 3기 판정을 받았다. 작업에 전념하며 더 의미 있게 시간을 보낼 것이다. 아직 그리고 싶은 것들이 남았다”고 밝힌 뒤 최근까지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해왔다. 8월에는 신작을 그리는 사진과 함께 “이 나이에도 시행착오를 겪는다. 했던 작업을 물감으로 덮고 다시 그으며 차츰 길을 찾아가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고인은 한국 추상미술과 단색화를 대표하는 최고 인기 작가로, 후학과 사회를 위한 기부를 아끼지 않는 ‘미술계 큰 어른’으로 평가받아 왔다. 1950년대 국내 주요 추상미술 운동에 참여했고, 1960년대부터 연필로 도를 닦듯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선을 긋는 ‘묘법’ 시리즈를 제작하며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개척했다.
그가 개척한 단색화는 ‘물감을 쌓고 뜯어내고 점을 찍는 등 작가의 신체를 이용해(촉각성) 반복적인 작업(행위성)을 하고, 이를 통해 정신을 수양하고 탐구하는(정신성)’ 미술로 정의된다. 도공이 물레를 돌리고 석공이 돌을 자르듯 묵묵히 수행하는 한국적 정신이 담겼다는 게 미술계 평가다.
지난해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고인은 묘법의 개념을 떠올렸을 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좋은 예술이란 과연 뭘까, 그 답을 내 안에서 찾으려고 엄청나게 노력하고 있었어. 그런데 어느 날 네 살배기 둘째가 형이 글씨를 쓰는 걸 보고 흉내를 내더라고. 방안지 칸에 글자를 적으려는데 아무리 해도 안 되는 거야. 제풀에 화가 나서 종이에 마구 연필을 휘갈기더라고. 이게 바로 체념의 몸짓이구나, ‘비움’이구나 싶었어.”
박 화백은 생전 “단색화는 서양 미술계에 없었던 ‘수렴의 미술’”이라고 강조해 왔다. 선비가 사군자를 치는 것처럼 동양에서 예술은 수신(修身)의 수단이었고, 그래서 자신을 표현해 내보이는 ‘발산의 미술’인 서양 미술과 전혀 다른 매력이 있다는 설명이었다. 박 화백은 인터뷰에서 “단색화를 통해 보는 이의 고통과 번뇌를 빨아들이고 싶다”며 “이를 위해 색에 정신의 깊이를 담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오랫동안 ‘안 팔리는’ 화가였다. 2000년대만 해도 작품 경매 낙찰가는 3000만원대를 맴돌았다. 2015년 이탈리아 베네치아 비엔날레 병행전시로 열린 ‘단색화’전이 주목받으면서 본격적으로 빛을 봤다. 박 화백은 본지 인터뷰에서 “그림이 안 팔려도 ‘반드시 내 시대가 온다. 지금 세상이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뿐’이라고 확신하면서 죽자사자 그렸다”고 회고했다. 1976년작 ‘№ 37-75-76’은 2018년 홍콩 크리스티경매에서 200만달러(약 25억원, 낙찰 수수료 포함)에 팔리며 최고가 기록을 썼다.
지난 10년간 세계 미술계에서 한국 단색화의 예술적 가치가 조명된 데는 박 화백의 역할이 컸다는 평가다. 단색화는 이제 한국을 대표하는 미술 장르이자 하나의 고유명사가 됐다. 세계 미술계 어디서나 한국 미술 하면 ‘Dansaekhwa(단색화)’를 말할 정도다.
2019년 국립현대미술관은 박 화백의 회고전을 열며 ‘지칠 줄 모르는 수행자’라는 전시 제목을 달았다. 고인은 지난해 베네치아비엔날레 전시를 준비하다가 과로로 쓰러져 바닥에 얼굴을 찧는 등 온갖 고생을 하면서도 결코 붓을 놓지 않고 작업을 마무리했다.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아직도 할 일은 많은데 해는 저물어 갑니다. 저물라면 저물어야죠. 하지만 나는 나대로 인공조명을 비춰서라도 끝까지 내 할 일을 하겠습니다.”
그 말대로 박 화백은 생의 마지막까지 선을 그었다. 유족으로는 부인 윤명숙 씨를 비롯해 2남1녀가 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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