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말로 강성층 표심 잡고 페널티는 無… 극단정치 악순환 [심층기획-국민 두 쪽 낸 ‘정치인의 입’]

김병관 2023. 10. 15. 1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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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 고성·막말에 잠식된 국회
타협·존중 대신 사생결단 전쟁터
이재명 체포안 표결 당시 국회 아수라장
韓장관 발언 때 野 야유, 與 “조용히 해”
여야 대표 연설 때도 의원들 고성 ‘훼방’
청문회·국감·대정부질문 비난전이 일상
극단정치 편승해 득 보는 정치인
막말이 ‘사이다 발언’ 포장돼 SNS 확산
부적절 발언 징계안 처분사례 거의 없어
‘인지도 높인다’ 공천 노리고 더 센 발언
“유권자 정치 불신… 민주주의 후퇴 징후”
정치인들의 말이 그 어느 때보다 격렬해지고 있다. 상대 진영을 향한 여야의 거친 막말에 국민들도 양극단으로 나뉘었다. 상호 존중과 관용은 낯설어졌고 협치의 공간도 좁아졌다. 사나운 말이 전쟁 같은 정치를 만들었듯 화합의 정치는 좋은 언어가 있어야 가능하다. 세계일보는 여야 정치인과 대통령 발언을 분석하고 한국 정치에 통합의 언어를 정착시킬 방안을 3차례 나눠 연재한다.
“의석에서 소리 지르는 행위 제발 좀 그만하십시오. 국민이 지켜보고 있습니다!”(김진표 국회의장)
한동훈 법무부 장관이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에 대한 체포 동의 요구 이유를 설명하는 지난달 21일 국회 본회의장은 한마디로 아수라장이었다. 민주당 의원들은 한 장관을 향해 “말이 되는 소리를 하라”고 야유했고, 국민의힘 의원들도 야당에 “조용히 하라”고 외치면서 정작 한 장관 발언은 알아듣기 힘들었다. 야당 의석에선 “당신이 장관이냐”, “장관하지 말고 검사 하라” 같은 모욕성 발언도 나왔다. 김 의장이 24분간의 한 장관 연설 동안 “조용히 경청해 달라”고 네 차례 요구했지만, 의원들은 고성을 멈추지 않았다.
국회 대정부질문과 국정감사 등 의사일정 전반에서 상대 진영을 향한 의원들의 비난과 막말, 고성이 일상이 되고 있다. 시민들의 의사를 고르게 대변하고 상호 존중과 타협을 통해 차이를 좁혀야 할 국회가 사생결단의 전쟁터로 전락했다는 비판이 나온다. 한국 정치가 정치인의 거친 언어로 양극화되고, 양극화된 정치가 정치인의 거친 언사를 부추기는 늪에 빠졌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막말·비난·고성이 일상인 국회

2020년 4월 21대 국회 개원 이후 자신과 생각이 다른 상대 당 의원을 조롱하고 무시하며 국회 회의를 방해하는 의원들의 행위가 꾸준히 반복되고 있다. 민주당 박영순 의원이 지난달 6일 대정부질문을 하는 탈북자 출신 국민의힘 태영호 의원을 향해 “북한에서 쓰레기가 나왔어”라고 소리 지른 게 대표적이다. 다른 민주당 의원들도 “부역자”, “빨갱이”라고 외치면서 태 의원의 질의는 잠시 중단됐다.
주요 정당 대표가 의정 방향과 정견을 발표하는 교섭단체 대표연설 땐 여야 의원들이 ‘목청 대결’을 벌인다. 지난 6월 국민의힘 김기현 대표의 연설 당시 민주당 의원들은 “일본 대변인”, “땅 대표”, “거짓말쟁이”라고 외치며 방해했다. 같은 달 민주당 이 대표 연설 때는 여당 의석에서 “죄를 지었으니까 그렇지”, “돈봉투를 안 받았어야지” 등의 비난이 나왔다.
국회의 권위를 드러내야 하는 인사청문회장, 국정감사장도 예외는 아니다. 지난 5일 김행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자 인사청문회에선 국민의힘 정경희 의원 발언 시간에 민주당 문정복 의원이 “야! 정경희!”라고 소리를 질렀고 뒤이어 다른 의원들이 “조용히 해”, “많이 컸다” 등 반말로 설전을 벌였다.
◆막말이 득이 되는 한국 정치
전문가들은 한국의 정치언어가 정치 양극화, 팬덤 정치화 속에서 급격히 나빠지고 있다고 진단했다. 정치인의 도 넘은 발언을 금기시하는 정치제도와 문화의 발전은 더딘 반면, 상대 세력에 대한 막말로 이득을 얻을 수 있는 요소는 많아지고 있다는 것이다.
윤태곤 더모아 정치분석실장은 15일 “막말을 했을 때 페널티나 마이너스 없이 지지층에게 속 시원하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제어가 안 되는 것”이라고 평했다. 실제로 국회법에 국회 회의에서의 모욕 발언과 방해 행위에 대한 징계 규정이 있지만 발동된 사례는 찾아보기 힘들다.
조진만 덕성여대 교수(정치외교학)는 “진영 양극화가 심하다 보니 진영 내 사상 검증도 심한 편”이라며 “강성 지지자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는 게 당에서 주요 직위를 확보하고 세를 결집하는 확실한 방법이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내년 총선을 앞둔 올해는 공천을 받기 위한 충성 경쟁 속에서 의원들의 발언 수위가 높아지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자극적인 발언 한마디로 높은 홍보 효과를 누릴 수 있는 미디어 환경도 요인으로 꼽힌다. 일례로 민주당 정청래 의원이 지난 2월 대정부질문에서 한 장관에게 “아주까리기름 먹느냐. 왜 이렇게 깐족대느냐”고 말하는 장면을 담은 영상은 유튜브, 틱톡, 인스타그램 등에서 재생산되며 100만회가 넘는 높은 조회 수를 기록했다. 여당 대변인 출신 한 관계자는 “바른말을 하는 정치인이 주목을 받지 못하는 현실이 지금과 같은 상황을 만들었다”며 “자극적인 말을 해야 기사 제목으로 뽑히고 소셜네트워크에서도 클릭을 유도할 수 있지 않느냐”고 했다.
◆막말 정치, 민주주의 위협

정치인의 막말 근절은 1987년 민주화 이후 공고화되던 한국 민주주의가 한 단계 더 성숙할지, 후퇴할지가 달린 문제라는 평가도 나온다. 지병근 조선대 교수(정치외교학)는 “정치적 관용은 자유민주주의의 기본인데 생각이 다른 상대방을 존중하는 정치문화가 우리나라에 아직 정착되지 않은 면이 있다”며 “정치인들이 상호 무시하고 합법적인 틀 내에서 상대를 최대한 죽이는 정치를 하는 게 민주주의 후퇴의 징후”라고 지적했다.

지 교수는 이어 “그런 것들을 중단시키려는 과감한 의지가 필요하다. 이는 한국 민주주의가 선진 민주주의로 가느냐, 권위주의적 잔재가 지속되는 민주주의에 머무느냐를 가리는 문제”라고 덧붙였다.

차재원 부산가톨릭대 특임교수도 “타협을 통해 한 걸음씩 나아가는 게 정치인데 상대를 죽여야 할 적처럼 생각한다면 오히려 뒤로 가는 것”이라며 “그 결과로 유권자 상당수가 정치를 외면하게 된다면 민주주의의 근간은 흔들릴 수밖에 없다”고 했다.

김병관·유지혜·최우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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