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라엘, 피란길에도 무차별 포격…‘인도적 대피’는 없었다

선명수 기자 2023. 10. 15.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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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하다던 도로서 민간인 사망
유일한 탈출구 ‘라파 통로’ 폐쇄
“대피령은 사실상 강제 이주 명령”
이스라엘이 가자지구에 대한 대대적인 지상작전을 예고하며 가자지구 주민들에게 “24시간 안에 남쪽으로 대피하라”고 최후 통첩을 내린 13일(현지시간) 가자시티에서 주민들이 당나귀 등을 타고 피란길에 오르고 있다. AFP연합뉴스

이스라엘이 약속했던 안전한 대피로는 없었다. 이스라엘은 대대적인 지상작전을 앞두고 가자지구 주민들에게 “24시간 안에 대피하라”는 최후 통첩을 내렸지만, 명령에 따라 남쪽으로 향하던 주민들은 이스라엘군의 무차별 공습을 받았다. 목숨을 걸고 가까스로 이집트 국경 인근에 닿은 주민들도 막힌 국경 앞에서 피난처를 찾지 못하고 있다. 설령 국경이 열린다 하더라도 이는 ‘인도적 대피’가 아니라 사실상 팔레스타인 주민들을 가자지구 밖으로 추방하기 위한 ‘강제이주’ 명령으로, 국제법 위반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14일(현지시간) 외신 보도에 따르면 이스라엘군이 전날 가자지구 북부 지역 주민들에게 24시간 이내 대피하라는 명령을 내린 뒤 주민 수십만명이 필사의 탈출을 이어가고 있다. 가자지구 전체 주민 230만명 중 절반에 달하는 110만명이 이주 대상이다. 대피령 이틀째인 이날 포탄이 떨어지는 아비규환 속에 당나귀와 수레를 끌고 남쪽으로 향하는 인파로 대혼잡이 빚어졌다.

특히 이스라엘군이 대피 기한까지는 안전할 것이라고 보장했던 일부 도로마저 폭격을 당해 피란길에 오른 다수의 민간인이 죽거나 크게 다친 것으로 전해졌다. CNN과 BBC 등에 따르면 13일 가자지구 남쪽으로 향하는 도로인 살라 알딘과 알 라시드가 포격을 당해 70명이 숨지고 200명이 크게 다쳤다. 사망자 대부분은 여성과 어린이었다. 그러나 이스라엘군은 사건 발생 이틀 후인 15일 오전 이 공격은 자신들의 소행이 아니라고 부인하면서, 미사일이 아니라 지상의 폭발장치로 인한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지난 11일(현지시간) 이스라엘군의 포격으로 폐허가 된 가자지구 거리. AP연합뉴스

가까스로 남쪽에 도달한 주민들도 갈 곳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다. 가자지구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유일한 탈출로인 ‘라파 통로’는 사실상 폐쇄됐다. 가자지구 남부와 이집트를 잇는 라파 통로는 이스라엘이 봉쇄한 가자지구 밖으로 탈출하거나 구호 물자를 받을 수 있는 유일한 ‘생명줄’이다.

앞서 미국 정부는 이중국적자 등 미국인의 통행을 허용하기로 이집트 정부와 합의했다고 밝혔지만, 목격자들에 따르면 이집트 당국은 오히려 가자지구와의 국경을 따라 군사력을 증강 배치하고 임시 시멘트 장벽까지 설치하고 있다. 이집트는 팔레스타인 난민들의 피란이 이들의 영구적인 이주로 이어질 것을 우려하고 있다.

다만 사메 슈크리 이집트 외무 장관은 CNN에 “이집트 정부는 라파 통로를 공식적으로 열어뒀다”면서 “이스라엘의 공습으로 인해 가자지구 쪽에서 라파 통로로 접근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밝혔다.

가자지구는 이스라엘로 통하는 북부의 에레즈 검문소와 이집트로 통하는 남부의 라파 검문소 두 곳을 통해서만 밖으로 나갈 수 있다. 하지만 두 검문소 모두 닫혀 있어 가자지구 주민들은 ‘대피명령’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대피가 불가능한 상황이다.

일부는 아예 대피를 포기하기도 했다. 아흐메드 오칼은 “몹시 두렵지만 남쪽으로 가는 길에 아내와 아이들의 목숨을 위태롭게 할 수는 없다”면서 “차라리 살던 집에서 죽겠다”고 말했다. 대피에 나섰다가 곳곳에서 이어지는 공습으로 인해 다시 발길을 돌린 이들도 있었다.

일주일째 이어진 폭격으로 인해 이미 극심한 인도주의적 위기 상황에 놓인 가자시티의 알쿠드스 병원 역시 시설을 폐쇄하고 대피하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있다. 중환자들을 비롯해 인큐베이터에 있는 아기들, 어린이 환자 등을 이동시킬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세계보건기구는 이스라엘의 대피령이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중환자에 대한 사실상 “사형 선고”와 다름 없다고 비판했다. 국경없는의사회도 “인류와 의료에 대한 공격”이라고 지적했다.

유엔 역시 100만명이 넘는 인구가 24시간 안에 대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이스라엘이 이를 철회할 것을 요구했지만, 이스라엘 정부는 대피 기한을 14일에 6시간 연장한데 이어 15일 추가로 3시간 연장하는데 그쳤다.

13일(현지시간) 이스라엘군의 공습으로 부상당한 아기가 가자시티 내 시파병원으로 옮겨지고 있다. AP연합뉴스

그러나 설령 이집트 국경이 개방돼 대피 통로가 열린다고 하더라도 이스라엘이 가자지구를 완전히 포위해 공격하는 상황에서 주민 대피령은 사실상 ‘추방’에 다름 없으며, 이는 국제법상 전쟁 범죄에 해당하는 강제 이주라는 지적이 나온다. 애틀린틱카운슬의 연구원이자 인권 변호사인 기수 니아는 “이번 대피 명령은 민간인에 대한 강제 이주 명령”라며 “국제형사재판소가 조사에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국제적십자위원회도 성명을 통해 “이스라엘이 가자지구 포위 공격을 통해 식량과 물, 전기를 끊은 상황에서 주민들에게 집을 떠나라고 명령하는 것은 국제 인도법 위반”이라고 비판했다.

무엇보다 팔레스타인 주민들에게 이번 대피 명령은 제 2의 ‘나크바(Nakba·재앙)’와 다를 바 없다는 분석이 나온다. 나크바는 1948년 이스라엘 국가가 세워지면서 자행된 강제이주 조치로, 당시 75만명이 넘는 팔레스타인인들이 살던 땅에서 쫓겨났다. 이 과정에서 500개가 넘는 팔레스타인 마을이 파괴됐고 수천명이 목숨을 잃었다.

마크 린치 조지워싱턴대 국제관계학 교수는 외교전문지 포린어페어스 기고문에서 “가자지구 사람들은 가자지구 밖으로 대피할 경우 전쟁이 끝나더라도 결코 돌아올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며 “그들은 이스라엘이 1948년 그랬던 것처럼 팔레스타인인들을 강제 이주시키는 ‘나크바’를 수행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고 말했다. 린치 교수는 “이는 민간인들이 도망칠 수 있도록 인도주의적 통로를 만드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는 조 바이든 행정부의 구상이 착각인 이유”라고 지적했다.

가자지구 주민들을 실은 트럭이 13일(현지시간) 남쪽으로 향하고 있다. AP연합뉴스

선명수 기자 sm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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