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명]정치의 사법화, 사법의 정치화

이재용 기자 2023. 10. 15.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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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용 여론독자부장
정치·정책이슈 판사 개인에 좌우되며
사법의 정치화 심화될 위험성도 커져
대법원장 공백 장기화 막고 공정 인사
정치·사법 제 역할 다하도록 만들어야
[서울경제]

지난달 24일 임기를 마친 김명수 전 대법원장은 퇴임 전 기자들과 만나 “정치의 사법화, 사법의 정치화가 점점 심화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정치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사법으로 넘어오니 정치의 사법화, 그것에 대해 판단하니까 사법의 정치화가 심해진다”고 덧붙였다.

‘정치의 사법화’와 ‘사법의 정치화’는 서로 연관돼 있는 개념이다. 우선 정치의 사법화는 정치인들이 중요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해 그 결정을 법원에 떠넘기면서 나타나는 문제다. 정치와 사법은 입법·사법·행정으로 나뉘는 ‘삼권분립’의 두 축이다. 정치는 대화와 타협을 통해 작동하지만 사법은 오직 법률적 판단에 따른다. 문제 해결 방식이 근본적으로 다른 만큼 정치 문제를 사법으로 풀면 논란과 갈등이 발생한다. 또 사법의 정치화는 사법에 정치적 성향이나 이해관계가 개입하는 것을 뜻한다. 사법적 판단은 일체의 정치적 고려 없이 법과 양심에 따라 내려져야 한다. 정치의 사법화와 사법의 정치화 모두 정치와 사법의 경계가 무너지며 나타나는 현상이다.

최근 정치의 사법화와 사법의 정치화를 동시에 보여준 사례가 있었다. 검찰이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에 대해 청구한 구속영장을 법원이 기각한 일이다. 앞서 이 대표는 자신에 대한 검찰의 수사를 두고 “정치 영역에는 여지가 필요한데 정치의 사법화가 심각하다”고 비판한 바 있다. 하지만 이 대표의 배임·뇌물·위증교사 등 혐의를 검찰이 수사하고 법원이 판단하는 것은 사법기관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피의자가 거대 야당의 대표라고 해서 그에 대한 수사와 재판을 정치의 사법화라고 비난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오히려 정치의 사법화의 진정한 문제는 정치·정책 이슈의 해법이 판사 개인의 판단에 좌우된다는 점이다. 이번에 영장 전담 판사가 이 대표의 구속영장을 기각하면서 이 대표와 민주당 내 ‘친명 세력’은 기사회생했다. 만약 다른 판사가 사건을 맡아 이 대표의 구속으로 결정이 났다면 민주당의 세력 구도는 뒤집어졌을 것이다. 판사의 자의적 판단에 의존하는 정치의 사법화는 일반 상식에 어긋나는 결정이 내려질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다.

한편 사법의 정치화도 이 대표 구속영장 기각 과정에서 드러났다. 영장 전담 판사는 이 대표 구속영장 기각 사유 중 하나로 “피의자가 정당의 현직 대표로서 공적 감시와 비판의 대상인 점을 감안할 때 증거인멸의 염려가 있다고 단정하기 어렵다”는 점을 들었다. 구속영장 기각에 정치적 고려가 있었음을 인정한 셈이다.

이번 사례를 떠나 사법의 정치화를 심화시킨 장본인은 김 전 대법원장이다. 김 전 대법원장 체제에서 법원행정처 및 일선 법원의 요직은 법원 내 특정 성향 단체 출신 판사들이 꿰찼다. 대법원에서는 문재인 정부에 유리한 결정이 잇따랐고 하급 법원은 문재인 정권에 불리한 재판을 질질 끌며 버텼다.

결국 정치의 사법화보다 더 심각한 문제가 사법의 정치화다. 대화와 타협이 불가능한 작금의 한국 정치 현실을 감안하면 정치의 문제를 법원이 판단하는 정치의 사법화는 불가피한 측면이 있다.

사법의 정치화를 해소하려면 새 대법원장이 공정한 인사를 통해 김 전 대법원장 재임 기간 사법부에 만연했던 정치적 편향성을 제거해야 한다. 하지만 민주당이 이균용 대법원장 후보자의 임명동의안을 부결시키면서 사법부 수장 공백이 길어지고 있다. 대법원장 임명을 정치가 좌우할 수 있음을 보여줘 사법을 정치에 종속시키려는 의도다. 이 대표의 재판을 최대한 지연시키고 유리하게 끌고 가려는 속셈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법원장 자리는 정쟁의 대상이 아니다. 대법원장 공백 사태가 길어질수록 사법의 정치화는 더 심각해질 수밖에 없다. 민주당은 다수 의석을 앞세워 사법부를 길들이려는 시도를 멈춰야 한다. 윤석열 대통령 역시 이번에는 상대편도 인정할 만한 능력과 균형 감각을 갖춘 대법원장 후보자를 지명할 필요가 있다.

정치와 사법이 어떤 식으로든 서로 얽히지 않고 각자의 자리에서 제 역할에 충실할 때 민주주의가 발전할 수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이재용 기자 jylee@se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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