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도 악연도 만드는 청문회…‘김행랑’ 사태가 보여준 것은 [대통령의 연설]

문재용 기자(moon.jaeyong@mk.co.kr) 2023. 10. 15. 1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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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행 여성가족부 장관 후보자가 서울 강서구청장 보궐선거에서 여당이 패배한 다음날 자진사퇴했습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 9월 단행한 개각에 포함된 3명의 장관 후보자 가운데 유일한 낙마사례인데요.

임명 과정에서 다른 후보자들에 대한 비판도 적잖이 제기됐지만, 김 후보자가 유독 정권에 큰 부담으로 작용한 것은 이른바 ‘김행랑’으로 불리는 청문회 이탈사건의 영향이 큽니다. 지난 5일 인사청문회에서 여야간 논쟁이 격화되던 끝에 김 후보자가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린 일이죠.

청문회는 사건사고의 진상을 밝히거나, 주요 공직자에 대한 인사검증을 위해 대상자를 국회로 불러 의원들로부터 질의를 받게 하는 것을 뜻합니다. 대의민주주의를 택하고 있는 국가인 만큼 국민들이 궁금해할만한 사안을 의원들이 대신 물어보는 기능을 하는 것인데요. 그만큼 국회가 가진 중요하고도 막강한 권한 중 하나이며, 김 후보자의 이탈사건이 큰 의미를 지니게 된 모습이죠.

대통령의 연설 이번 회차는 청문회에 대한 역대 대통령들의 언급을 살펴보려 합니다. 민주화 이후 전직 대통령들이 모두 국회의원을 거친 만큼 의원시절부터 청문회와 인연이 깊은 사례도 많고, 대통령이 된 후에는 가장 중요한 통치수단인 인사권에 제약을 거는 탓에 악연을 갖게된 일도 많았습니다.

헌정 최초 제5공화국 청문회...초선 노무현·이해찬 ‘청문회 스타’로
한국에서 청문회가 처음 개최된 것은 지난 1988년입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물러난 뒤에도 그의 최측근이었던 노태우 전 대통령이 정권을 이어받으며 각종 비리에 대한 진상규명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는 실정이었는데요. 하지만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여소야대 국회가 들어서며 청문회 제도가 입법되고 곧장 시행되는 수순을 밟게되죠.

청문회 중계방송이 최고시청률 81%를 기록할 정도로 전 국민이 지켜보는 이벤트였으며, 전두환·노태우 정권에 대한 반감이 거세지고 청문회에서 활약한 노무현·이해찬 의원 등은 일약 스타덤에 오르게 됩니다.

5공화국청문회 질의에 나선 노무현 당시 국회의원과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노무현재단>
연설기록에서 관련언급이 처음 나온 것은 청문회가 시작되고서도 20여일이 지난 뒤인 11월22일 서울신문 창간기념 특별회견입니다. 여기서 노 전 대통령은 청문회 이후 민심이 안정되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에 “이러한 문제를 대의정치의 장 위에 끌어올려서 잘잘못을 가리는 자체가 크게는 민주주의의 발전된 모습으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라며 “그런 과정에서 진통이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과거처럼 문제를 덮어둠으로써 갈등 요인으로 남게 하는 것은 문제를 더욱 깊게 하는 결과가 될 것입니다”라고 말했습니다.
5공비리 청문회<국회>
노 전 대통령은 이때까지만해도 청문회의 순기능을 먼저 이야기할 정도였지만 상황이 점점 악화되며 이런 여유도 사라지게 되는데요. 12월 연합통신 창사8주년 특별회견에서는 “문제는 지난 시대의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그것을 정리하고 청산하자는데 있습니다”라며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청문회도 좋고 국회의 특위활동도 좋지만, 우리가 지금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적한데 무한정 과거에만 얽매여 있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청문회 정국이 어느정도 정리된 후인 1990년6월 일본 문예춘추지 회견에서는 “나라를 위해 전임 대통령이며 오랜 동지이기도 한 분을 국회의 청문회에 세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가장 가까운 친구를 국회의원으로부터 사퇴하도록 강요했습니다”라며 “이 모든 일들을 나라를 위해, 대의를 위해, 정치와 역사의 진보를 위해 눈물을 흘리며 했던 것입니다. 쓰라린 정치적 결단이었습니다”라고 소회를 밝히기도 합니다.

인사청문회 도입한 노무현...이명박 정권에서는 한미FTA 청문회까지
이후로 국제통화기금(IMF) 사태의 원인을 규명하기 위한 청문회를 비롯해 많은 청문회가 개최됐지만 대통령 연설에 언급되는 일은 드문 편입니다. 기본적으로 국회에서 벌어지는 일인 만큼 대통령이 과하게 개입하는 모습이 적절치 않은 것도 사실이죠.

청문회가 다시 대통령 국정의 중심소재로 등장한 것은 노무현 전 대통령 임기중입니다. 마침내 인사청문회가 도입된 덕분인데요. 사실 인사청문회를 처음 공약으로 내세운 것은 김대중 전 대통령이었지만, 노 전 대통령 임기때 여소야대 국회구성과 맞물려 실제로 제도가 도입되게 됐죠. 최초의 청문회인 5공 청문회도 여소야대 구도하에 개최된 것을 보면 행정부 권력과 입법부 권력이 엇갈리고 대립하는 순간마다 청문회의 중요도가 높아지는 모양입니다.

노 전 대통령의 연설기록에서 인사청문회가 처음 언급된 것은 임기중반인 2005년 신년 기자회견입니다. 여기서 노 전 대통령은 “청와대 바깥의 다른 기관에 검증을 맡기는 쪽으로 제도를 개선할 생각입니다”라며 “국회 청문회를 해야 하는 사람의 폭을 좀 넓히자, 국무위원급은 국회 청문회를 거치게 하자는 방안도 그런 뜻으로 말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임기말 제62주년 경찰의 날 기념식 연설에서는 “경찰청장에 대한 인사청문회와 임기제를 도입되면서 권력의 눈치를 보지 않는 국민의 봉사기관으로 거듭 났습니다”라고 말했는데요. 차관급인 경찰청장까지도 인사청문회 대상에 오른 것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은 임기 직후 한미 FTA로 곤욕을 치뤄 관련 청문회까지 열린 것에 대한 언급이 남아있습니다. 그는 FTA 비준을 요청하는 내용의 2008년 5월 ‘국민에게 드리는 말씀’을 통해 “17대 국회에서 이미 무려 59차례나 심의했습니다. 공청회와 청문회도 여러 번 거쳤습니다. 제가 5월 국회를 요청한 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라고 강조했습니다.

文, 조국 법무부 장관 임명하며 “인사청문회 마쳐 절차적 요건 모두 갖춰”
문재인 전 대통령은 오랜기간 인사청문회 제도가 본래 취지와 달리 정쟁의 수단으로 전락한 것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드러내왔습니다.

임기중 연설기록에도 이같은 견해가 잘 묻어나는데요. 2017년 6월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그는 “청문회에서 후보자를 강도 높게 검증하고 반대하는 것은 야당의 역할입니다. 야당의 본분일 수도 있습니다”라면서도 “그러나 그 검증 결과를 보고 최종적으로 판단하는 것은 국민의 몫입니다. 대통령은 국민의 판단을 보면서 적절한 인선이었는지 되돌아보는 기회를 갖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라 밝혔습니다.

2019년 정국의 모든 이슈를 집어삼켰던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임명과정에서도 청문회가 언급됩니다. 문 전 대통령은 임명장 수여식 연설을 통해 “인사청문회까지 마쳐 절차적 요건을 모두 갖춘 상태에서 본인이 책임져야 할 명백한 위법행위가 확인되지 않았는데도 의혹만으로 임명하지 않는다면 나쁜 선례가 될 것입니다”라 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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