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인터넷의 등장으로 많이 달라졌지만, 예전에는 지식의 집대성 중 최고의 하나로 대영백과사전이라고 불리는 인사이클로피디어 브리태니커를 꼽았다. 여기 수록된 항목들은 세계 수준의 전문가들이 권위 있는 설명을 제공하고 있다. 그런데 이 백과사전에서 'Writing systems'라는 항목을 찾아보면 한글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우리의 유산인지 알 수 있다. 세계적 언어학자들이 한글을 현재 사용되고 있는 문자 중 최고의 발전 단계에 있는 유일한 문자로 평가하며, "한글은 인류의 위대한 지적 유산 중 하나"라고 극찬하고 있다. 우리 국민소득이 100달러 전후였던 1960~1970년대에 발간된 백과사전에도 이렇게 기록돼 있으니, 당시 우리나라의 국제적 위상을 생각한다면 이러한 평가는 파격적이며 진실로 한글의 위대성을 인정받은 것이라 생각한다.
세종대왕은 즉위 후 곧 집현전을 확대 개편하고, 당대 최고의 유학자들과 '전문가'들을 배경을 가리지 않고 두루 중용하여 많은 혁신을 만들어냈다. 화포, 자격루를 비롯하여 농사직설, 의방유취 등 백성들의 삶과 직결된 혁신적 작품들이 쏟아졌는데, 이 중 가장 으뜸은 역시 한글이다. 하지만 한글은 창제 이후 기득권자들인 양반들의 반대로 아녀자들의 글로 치부되어 오다가 조선이 몰락한 후에야 보편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유럽에서는 구텐베르크가 인쇄술을 발명한 이후 지식이 소수 특권층의 전유물에서 벗어나 대중적 공공재가 되기 시작하였는데, 이는 서구 문명의 폭발적 발전으로 이어졌다. 만약 한글이 창제된 직후부터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면 어떻게 우리의 역사가 바뀌었을까 상상해본다. 세종 때에 주조된 금속활자인 갑인자와 한글의 조합이라면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지식 전달 수단을 보유한 것이니 말이다.
한글은 창제 당시 17개의 자음과 11개의 모음, 총 28자로 이루어졌으며 이를 다 사용하면 거의 모든 소리를 표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자주 쓰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4글자가 사라졌는데, 1933년 '한글 맞춤법 통일안'에서 지금의 24자로 굳어지게 되었다. 놀라운 통찰력으로 만들어진 훈민정음에서 오히려 퇴보한 것이다. 외국어 발음 표기로 어려움을 겪을 때마다 사라진 글자들이 있었으면 얼마나 정확히 표기할 수 있었을까 하는 아쉬움을 느낀다. 또 우리가 어려워하는 외국어 발음도 보다 쉽게 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이우일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부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