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원주민 대변 기구 신설’ 개헌안, 국민투표서 부결

노정연 기자 2023. 10. 15.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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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현지시간) 호주 퍼스 미들랜드의 벨뷰 홀 투표소에서 주민들이 투표를 하기 위해 줄을 서있다. EPA

호주에서 원주민들의 존재를 헌법에 명기하고 이들을 위한 자문 기구를 신설하는 내용의 헌법 개정안이 국민들의 반대로 부결됐다. 원주민과의 화해를 내세우며 국민통합을 추진해 온 호주 정부의 움직임에 제동이 걸렸다.

앤서니 앨버니지 호주 총리는 14일(현지시간) 개헌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 개표 도중 반대가 찬성을 크게 앞지르는 것으로 나오자 부결 사실을 인정했다고 AFP통신 등 외신이 전했다.

이번 투표는 호주 원주민(애버리지널)과 토레스 해협 도서민을 ‘호주 최초 국민’으로 인정하고 이들을 대변할 헌법 기구 ‘보이스’를 설립하는 내용의 헌법 개정 찬반 여부를 묻기 위한 것이었다.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전국적으로 약 70%의 개표율을 기록한 가운데 반대가 60%로 찬성 40%를 크게 앞질렀다. 호주에서는 전국적으로 투표자 과반이 찬성하고 6개 주 중 4개 주에서 과반 찬성이 나와야 개헌안이 가결된다.

앨버니지 총리는 대국민 연설을 통해 자신이 바라던 결과가 아니라는 점을 인정하면서도 “화해를 위한 길은 종종 험난했다”며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14일(현지시간) 호주 멜버른의 한 개표소에서 개표 요원이 투표 용지를 정리하고 있다. EPA

호주 전체 인구(2600만 명)의 약 3.2%를 차지하는 원주민은 호주 대륙에서 6만년 이상 살아왔지만 헌법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주인이 없는 땅에 국가를 세웠다’는 논리에 기반해 작성된 호주 헌법에서 원주민은 사람이 아닌 ‘토착 동물’로 취급됐기 때문이다. 원주민들은 현재까지도 호주에서 사회·경제적으로 가장 불리한 계층에 속해 있다.

원주민 지위 향상을 공약으로 내세운 노동당과 개헌 지지자들은 국가 통합을 위해 헌법에서 원주민을 인정하고, 이들의 삶의 질을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지난해 5월 총선에서 노동당이 정권교체에 성공한 당시만 하더라도 개헌안에 대한 찬성 지지율은 80%에 달했다.

그럼에도 이번 투표에서 반대가 더 많았던 것은 원주민을 대변할 헌법기구 ‘보이스’에 대한 유권자의 이해도가 낮았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야당은 헌법에 특정 인종을 명기하는 것이 오히려 사회 분열을 부추길 수 있다며 반대해 왔다. 특히 정부가 ‘보이스’의 법적 권한이나 기능을 명확히 규정하지도 않은 채 개헌부터 추진하고 있다면서, “잘 모르겠다면 ‘반대’를 찍으라”는 캠페인을 펼치기도 했다. 호주 내 많은 이민자 사회에서도 원주민에게 과도한 권한을 부여하는 역차별이라면서 반대 목소리를 냈다.

이에 대해 원주민 지도자인 토마스 마요는 “개헌 반대자들이 각종 가짜뉴스를 퍼트리며 부결로 이끌었다”면서, 호주 백인들이 식민지 과거에 대한 반성 요구를 거부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가디언은 “원주민 권리 지지자들은 이번 선거 패배를 호주에서 화해와 인정을 진전시키려 싸워온 투쟁에 대한 타격으로 볼 것”이라며 “원주민들은 계속해서 차별, 열악한 건강 및 경제적 상황을 겪고 있다”고 지적했다.

호주의 앤서니 알바니즈 총리가 14일(현지시간) 캔버라의 국회의사당에서 국민투표 결과에 대한 성명을 발표하고 있다. EPA

이번 국민투표의 부결로 앨버니지 총리에도 정치적 타격이 불가피해졌다. 지난 8일 발표된 여론조사에서 앨버니지 총리의 지지율은 45%를 기록하며 지난해 5월 총리에 오른 뒤 최저치를 기록했다.

호주를 왕정이 아닌 공화정으로 전환하려는 움직임도 한풀 꺾일 것으로 보인다. 옛 영국 식민지였던 호주는 상징적이긴 하지만 아직도 영국 국왕을 국가원수로 삼고 있다. 정치 평론가들은 오래전부터 공화정 전환을 주장했던 앨버니지 총리가 이번 개헌에 성공하면 이 기세를 몰아 공화정 개헌을 추진할 것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이번 개헌 실패로 이런 계획을 추진하는 데 동력이 떨어지게 됐다.

노정연 기자 dana_fm@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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