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빈치의 모나리자 뚱보로 표현한 화가 "이 관대함·관능 보세요"
강영운의 사색(史色)
날씬한 것만 아름다운가
다빈치의 모나리자 전시할 때
패러디한 '12세 모나리자' 내놔
"이건 예술 아니다 매춘이다"
비평가들의 비난 이어지자
"예술은 모두를 위한 오아시스
매춘이라고 하면 매춘 맞아요"
분노할 줄 아는 작가
이라크전서 미군의 인권만행
'아부 그라이브의 학대' 그려
"진정 위대한 예술가라면
해답 아닌 문제를 찾아야죠"
세상에 평화를 외치다
콜롬비아에 비둘기상 설치
마약조직이 폭파시켜버리자
굴하지 않고 하나 더 만들어
지금 '비둘기' 필요한 곳은
이스라엘·하마스가 아닐까
"저에게 종이 한 장 줄 수 있겠소?"
노인이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기내 승무원을 불렀습니다. 종이와 펜을 하나 달라고 요청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의 자리에 펼쳐져 있던 건 신문의 한 기사. 일흔이 넘은 노인은 습작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눈시울은 붉었고 표정은 분노로 가득했습니다. 목적지에 도착한 뒤 그가 바로 향한 곳은 자신의 스튜디오. 습작한 종이를 들고 8개월을 작품 활동에 돌입합니다.
문제작 '아부그라이브의 학대' 시리즈의 탄생이었습니다. 2003년 이라크 아부그라이브 교도소에 갇힌 이들을 미군이 성적으로 학대하면서 생긴 희대의 인권 스캔들이었습니다. 화가는 세상의 부조리를 자신의 붓질로 비판한 것이었지요. 피카소가 게르니카의 학살을 세상에 알렸듯 그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아부그라이브에서의 인권침해를 고발합니다.
화가의 이름은 페르난도 보테로. 세상 모두를 '뚱보'로 그려내는 콜롬비아 출신의 거장이었습니다. 뚱보 누드 조각상도 그의 대표적 작품입니다. 풍만한 외향에서 풍겨오는 유머와 넉넉함으로 세계적 사랑을 받았지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는 두려움 없이 목소리를 낼 줄 아는 예술가였습니다. 화내야 할 때, 분노해야 할 때, 절규해야 할 때, 특히 더 그랬습니다. 2023년 9월 15일. 한 달 전 보테로가 영면에 들어갔습니다. 이제 역사가 돼버린 한 위대한 화가를 사색합니다.
어려움 속에서 화가의 꿈을 품다
보테로가 세상에 난 건 1932년 4월이었습니다. 콜롬비아 메데인이라는 지방이었지요. 당시 대부분의 세계가 그러했듯 그 역시 가난한 집안의 아이였습니다. 아버지는 짐바리 동물인 노새를 타고 도시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는 이동 상인. 어머니는 삯바느질로 살림에 보탬을 주려 했었지요. 아등바등 버티는 삶이었습니다. "몸이 안 좋으니, 아이들을 좀 데리고 나가 있어." 보테로는 어느 날 아버지의 표정이 좋지 않음을 느꼈습니다. 어머니가 아이들을 부르더니, 이웃집에 좀 놀러 갔다 오라고 일렀지요. 그리고 1시간30분 뒤 보테로의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습니다. 보테로의 나이 고작 네 살이었지요. 어려운 삶이었지만, 사랑이 풍만한 가정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이 그림에 애정과 재능이 있다는 걸 알고 지지해주었지요. "예술을 하다 굶어 죽기 십상"이라는 말이 상식처럼 통하던 시대였습니다.
10대 시절 투우장 인근 상점에 투우 관련 수채화를 팔아 받은 돈은, 겨우 2페소. 삶을 영위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금액. 보테로는 그런데도 "행복했다"고 전합니다. 위대함은 언제나 소소함 속에서 싹 트기 마련입니다.
뛰어난 그림 실력만큼이나 그는 따뜻한 연민의 마음을 가진 인물이었습니다. 본인도 어려웠지만, 자신보다 가난한 이들에게 따뜻한 시선을 보냈지요. 폭력경찰이 무고한 시민을 이유 없이 폭행하는 모습에 분노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이때의 감정을 '프렌테 엘 마르', 우리말로 바닷가에서라는 작품에 담았지요. 평화로운 바닷가에서 이유 없이 나무 봉에 팔다리가 묶여 짐승처럼 끌려가는 사람의 모습을 담았습니다.
보테로를 낳은 건 콜롬비아지만, 그를 키운 건 유럽이었습니다. 폭력과 빈부 격차가 만연한 고향 땅을 섬세한 감정의 예술가는 견디지 못했습니다. 위대한 화가 벨라스케스, 고야를 낳은 스페인 마드리드로 향합니다. 그는 여기에서 자신만의 화풍을 구현하는 것이 어떤지를 깨닫게 되지요.
르네상스 중심지에서 '뚱보' 첫발
"내 인생에서 가장 특별한 작품."
15세기 이탈리아 화가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 그의 작품에 보테로는 가장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전에 본 적이 없는 화풍에다가, 그 작품이 뿜어내는 에너지가 대단했기 때문이었지요. "그의 한 작품에만 수십 분을 머무르며 봤다"고 말했을 정도였습니다. 감동을 넘어선 숭고의 감정이었지요.
그는 이제 르네상스를 잉태한 피렌체에서의 삶을 준비합니다. 예술 역사상 가장 위대한 시대를 열었던 이들의 삶과 작품을 직접 눈에 담기 위해서였지요. 보테로는 이야기합니다.
"그 시절 이탈리아 화가들은 르네상스를 창조했습니다. 그 이후의 모든 회화는 르네상스의 변주입니다. 독특함으로 명성 높은 인상주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르네상스 화가를 전범으로 삼은 건 당연한 수순이었습니다.
보테로는 르네상스를 답습하지 않았습니다. 기술과 화풍을 재현하기보다는 새길을 창조하는 정신을 배우고자 했습니다. 보테로가 자신의 화풍으로 '풍성함'(Fullness)을 선택한 이유입니다. 르네상스 명화도 그의 시선으로 재해석을 시작했지요. 모나리자도 비너스도, 마리 앙투아네트도 모두 '뚱보'의 모습으로 탄생합니다. 통통한 여성을 누드화로 여럿 그렸습니다. 길고 날씬한 것만 미의 기준으로 삼았던 회화사에서는 결코 있을 수 없던 일이었습니다. 보테로는 넉살 좋게 이야기하지요. "저는 뚱뚱한 사람을 그리는 것이 아닙니다. 풍성에 대해 말하는 것이지요. 이 관대함과 관능이 저는 좋습니다."
1963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레오나르도 다빈치 모나리자가 전시됩니다.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서 국외로 나온 첫 사례였지요. 구름 관중이 모였습니다. 그리고 같은 시기, 인근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도 모나리자를 보기 위해 많은 인파가 몰렸습니다. 보테로의 패러디 '12세 모나리자'였습니다. 스타 화가로서 보테로가 탄생한 시기이지요.
칭찬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단순하게 뚱보로만 그리는 건 예술이 아니다. 즐거움만을 강조하는 예술은 매춘"이라는 비난도 끊이지 않았지요. 그는 이렇게 반문합니다.
"모든 예술은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을 위한 오아시스여야 합니다. 비평가들이 그걸 매춘이라고 부른다면, 제 작품은 매춘이 맞습니다." 어렵고 난해한 것만이 예술이라고 믿는 이들을 위한 일갈이었지요. 그의 작품을 남녀노소, 미술에 문외한이라도 사랑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유쾌함 속에 슬픔을 그린 화가
"좋은 예술가는 해답을 찾지만, 위대한 예술가는 문제를 찾습니다." 보테로가 지닌 예술관이었습니다. 그의 말마따나 그는 사회적 문제의 현장을 찾아가 직접 자신만의 의사를 그림으로써 표현합니다. 아부그라이브의 학살을 수개월에 걸쳐 그린 것 역시 그의 예술관이 반영된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더해 그는 이 작품을 판매하지 않고 기부했지요. 더 많은 사람들이 고통의 기억을 공유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를 단순히 '뚱보들의 화가'라고 폄훼할 수 없는 이유이지요.
화풍은 유쾌하지만, 주제는 묵직할 때가 꽤나 많았습니다. '말을 탄 페드로'가 대표적입니다. 어린아이가 목마를 타는 모습, 원숭이와 노는 모습, 아장아장한 모습이 귀여움의 절정입니다. 하지만 그림의 배경을 아는 사람이라면 마냥 웃을 수만은 없습니다. 천진한 아이는 교통사고로 사망한 보테로의 어린 아들 페드로였습니다. 보테로가 네 살배기 아들 페드로와 함께 가다 교통사고를 당합니다. 아들은 그 자리에서 사망했고, 보테로는 손을 크게 다쳤지요. 화가 생명의 위기였습니다. 신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그가 회복된 이후 계속 그린 그림의 주제는 아들 페드로였습니다. 보테로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사랑하는 아들을 추모합니다. 아이를 먼저 떠나보낸 부모들은 그의 그림을 바라보며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습니다. 그림을 감상한 뒤에는 조금의 위안을 얻었겠지요. 보테로가 지닌 예술의 힘이었습니다.
폭력에 저항한 화가 보테로
세계적 화가로 발돋움한 뒤에도 그는 평화를 위한 활동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뚱뚱한 비둘기 조각상을 콜롬비아 메데인에 기부합니다. 마약 카르텔과 폭력이 만연한 이 도시에, 유머와 평화라는 숨구멍을 마련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당연히 폭력주의자들에게 평화의 상징은 마뜩잖게 느껴집니다. 1995년 6월 10일. 메데인 광장 한가운데에서 폭탄이 터집니다. 마약 카르텔이 평화의 비둘기상에 폭탄을 설치한 것이었습니다. 사망자가 25명에 달하는 극악의 테러였지요. 화가로서는 겁을 먹을 만도 한 상황. 보테로는 당당히 그 광장에 다시 나타납니다. 검게 그을린 비둘기상 앞에서 그는 이야기하지요.
"평화의 비둘기를 하나 더 만들어 기증하겠습니다. 그리고 이 파괴된 비둘기도 그대로 두시지요. 사람들이 전쟁과 평화의 상징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요."
예술은 지역적(Local)이었지만, 주제는 보편적(Universal)이었습니다. 보테로는 콜롬비아 메데인(Local)에 평화라는 인류 보편(Universal)의 감정을 심었습니다.
보테로가 세상을 떠난 지 이제 한 달이 지나갑니다. 오늘날의 세계는 평화에서 조금 더 멀어진 모습입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무장 정파인 하마스의 전쟁으로 무고한 시민들이 죽어갔습니다. 벌써 사망자만 1600명에 달합니다. 평화의 비둘기는 다시 한번 폭약을 맞고 찢어진 채 울부짖고 있습니다.
[강영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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