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금개혁, 더 내고·더 늦게·더 받는 '3더' 방식 급부상
정부 개혁안에 구체안 없을 가능성…총선 앞두고 국회특위도 '지지부진'
재정 고려 '더 내자' vs 빈곤 우려 '더 받자'…공론화 없이 대립만
[헤럴드경제=김용훈 기자] 국민연금 개혁을 논의하는 전문가위원회인 국민연금 재정계산위원회가 퇴직 후 국민연금을 '더 받는' 시나리오를 최종보고서에 넣기로 했다.
정부 개혁안의 국회 제출 시한을 코앞에 두고 전문가위원회의 개혁안이 마무리되는 것인데, 구체적인 제안 대신 다양한 시나리오를 백화점식으로 나열하는 수준이어서 개혁의 향방은 여전히 '안갯속'이다. 전문가위원회의 개혁안에 이어 정부 개혁안에도 구체적인 제안이 담기지 않을 가능성이 나오는 가운데, 국회 차원의 논의도 지지부진한 상황이다. 전문가와 정부, 국회가 구체적인 개혁안을 두고 '폭탄 돌리기'를 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온다.
15일 정부와 국민연금 재정계산위 등에 따르면 재정계산위는 지난 13일 회의에서 초안에 없었던 소득대체율 45%와 50% 인상 시나리오를 각각 최종보고서에 넣기로 했다. 소득대체율은 연금 가입기간의 평균 소득 대비 받게 될 연금액의 비율로, 보장성의 수준을 의미한다. 지난 2007년 연금개혁에 따라 2008년 50%에서 매년 0.5% 내려가 2028년 40%까지 낮아지는데, 현재는 42.5%다. 소득대체율이 42.5%라는 것은 40년 이상 국민연금에 가입한 사람이 평균 월 100만원을 벌었다면 노년이 돼서 월 42만5000원을 받는 것을 의미한다.
국민연금 개혁을 둘러싸고는 보험료율 인상 등을 통한 재정안정을 중시하는 '재정안정론'과 소득대체율을 올려 보장성을 강화하자는 '보장성 강화론'이 맞선다. 이번 재정계산위는 재정안정론을 주장하는 전문가들이 많이 포함됐는데, 보장성 강화론을 주장하는 전문가 2인이 사퇴한 가운데 지난달 초 재정안정론에 힘을 실은 보고서 초안을 공개했다.
초안에는 ▷9%인 보험료율을 12%, 15%, 18%로 올리는 3가지 안 ▷수급개시연령(올해 63세)을 66세, 67세, 68세로 늦추는 3가지 안 ▷기금 수익률을 0.5%, 1% 올리는 2가지 안을 조합한 18개 시나리오가 담겼다.
재정계산위는 여기에 보험료율과 수급개시연령, 기금수익률을 현행대로 놓고 소득대체율을 2025년에 45%와 50%로 올릴 경우의 2가지 시나리오를 추가하기로 했다. 아울러 보험료율, 수급개시연령, 기금 수익률 변경과 소득대체율 상향을 조합한 안도 참고 자료로 제시할 것으로 알려졌다. 다만 소득대체율 부분은 소득대체율을 높일 경우 기금 소진이 이렇게 빨라진다는 식의 부정적인 톤으로 제시될 것으로 보인다. 재정계산위의 김용하 위원장은 "소득대체율 상향 시 재정이 어떻게 될지를 보고서에서 명확히 보여주는 데 목표가 있다"고 설명했다.
소득대체율 상향 시나리오가 포함되면서 재정계산위의 보고서에는 최소 20개의 시나리오가 담기게 된다. 보험료율, 수급연령, 수익률에 소득대체율까지 4가지 변수를 놓고 사실상 모든 개혁안을 백화점식으로 나열하는 것이다. 재정계산위는 보고서에 여러 시나리오를 보여주며 '재정추계기간인 2093년까지 국민연금 적립기금이 소멸되지 않도록 한다'는 목표도 함께 제시할 계획이다.
그런데 이 목표를 충족하는 시나리오는 ▷보험료율 18%+지급개시연령 68세 ▷보험료율 18%+기금투자수익률 0.5% 혹은 1% 상향 등 2가지다. 재정계산위는 '행간을 읽어주시길 바란다'라면서 이들 안에 힘을 줬지만, 구체적인 제안을 하지는 않았다. 이 위원회가 시나리오만 나열한 것은 국민연금 개혁을 두고 다양한 의견이 첨예하게 맞서는 상황에서 더 많이 내고 더 늦게 받자'는 제안이 가져올 여론의 반발에 부담을 느꼈기 때문으로 보인다.
하지만 국민연금 개혁의 중요성을 고려할 때 보고서가 시나리오 나열 수준에 그친 것을 두고 전문가들이 무책임한 것 아니냐는 비판도 있다. 위원회가 너무 많은 시나리오를 제시한 까닭에 곧 나올 정부 차원의 국민연금 개혁안에도 재정계산위의 보고서와 마찬가지로 구체적인 제안이 담기지 않을 것이라는 예측이 나온다. 재정계산위의 보고서는 정부가 이달 말까지 국회에 제출할 국민연금 종합운영계획의 밑그림 역할을 하는데, 여러 시나리오를 몇 가지 제안으로 좁히기에는 시간이 부족한 상황이다. 상황에 따라서는 제출이 다음 달 이후로 늦춰질 수도 있다.
정부는 법에 따라 5년에 한 번씩 종합운영계획을 국회에 내야 하는데, 지난 문재인 정부는 보험료 인상 등 4개 방안을 개혁안에 담았다가 여론 때문에 입법을 추진하지 못했다. 정부가 국회에 종합운영계획을 제출하면 개혁의 '공'은 국회로 넘어가게 되지만, 총선이 불과 6개월 앞으로 다가온 상황에서 동력을 얻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국회는 작년 10월 연금개혁특위를 출범시켰지만, 그동안 논란만 불러일으키고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 특위 활동 기한은 이달 말 종료되는데, 여야는 이를 총선 후인 내년 5월 말까지로 연장할 계획인 것으로 알려졌다.
국민연금 개혁 방향을 놓고 계속 의견이 갈리는 것은 재정 안정과 보장성 강화 중 어느 쪽을 우선시해야 하는지에 대한 견해차가 크기 때문이다. 재정안정을 강조하는 쪽은 '미래세대에 책임을 전가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경제활동인구가 줄어들고 노인 인구는 늘어나는 급격한 고령화를 앞두고 지금이라도 '더 많이 내는(보험료율 인상)' 개혁을 하지 않으면 기금이 고갈돼 미래세대가 더 많은 보험료를 부담해야 할 처지에 놓인다는 것이다.
지난 3월 발표된 제5차 국민연금 재정추계에 따르면 현행 제도대로면 국민연금 재정은 2041년부터 수지 적자가 발생해 2055년엔 기금이 바닥날 것으로 예상된다. 기금이 바닥을 드러내면 그해 보험료 수입만으로 수급자들에게 주는 지출을 감당해야 한다. '보험료 수입만으로 지출을 충당할 경우 필요한 보험료율'을 뜻하는 부과방식 비용률은 올해 6% 수준이지만 2078년에는 35%로 증가할 것으로 예상된다. 한마디로 국민연금 보험료 납부자가 소득의 무려 35%를 보험료로 내야 한다는 뜻이다.
보장성 강화에 무게를 두는 쪽은 국민연금이 '용돈연금'이라고 불릴 정도로 보장 수준이 낮은 상황에서 기금 소진 우려에만 집중하는 것은 과도한 '공포 마케팅'이라고 비판한다. 국민연금 가입자의 평균 가입기간이 짧아 실질 소득대체율이 24% 수준이어서 본연의 역할인 노후소득 보장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미래 세대만 우려할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다.
한국의 노인빈곤율은 2020년 38.97%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최악이다.
보장성 강화론자들은 한국이 현재는 제한된 기간의 적립기금으로 연금지출을 충당하는 '부분적립방식'이지만, 기금이 소진되면 그해 필요한 연금 재원을 당대의 젊은 세대에게 세금이나 보험료를 거둬 충당하는 '부과식'으로 변경하면 된다고 주장한다. 실제 미국, 독일, 스웨덴 등 대부분의 서구 국가는 적립기금이 없어지면서 부과방식으로 전환한 상황이다.
전문가들이 개혁 방향에 대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지만, 국민연금 개혁 논의는 일반 대중들에게는 활발하게 공론화가 되지 못하고 있다. 정부는 개혁안 논의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하겠다고 했지만, 정부 전문가위원회의 회의록은 지난 5월 이후 비공개 상태다. 국회 연금개혁특위는 지난 2월 공론화위원회를 꾸릴 방침을 밝혔지만, 실현되지 않고 있다.
fact0514@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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