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데리고 살아준다” 이건 아내 생각…철부지 남편이 꺼내든 이혼에 달라진 ‘우주’ [씨네프레소]
박창영 기자(hanyeahwest@mk.co.kr) 2023. 10. 15. 13:36
[씨네프레소-97]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주의: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흔히 맛집을 처음 다녀와서 “안 먹었으면 후회할 뻔했다”는 말을 남기지만 다소 모순적인 부분이 있다. 애초에 먹어보지 않았다면 무슨 맛인지를 몰랐을 것이다. 맛있는지 없는지를 알 방법이 없기에 후회할 리도 없다. 인간은 경험해본 것에 대해서만 만족하거나 후회할 수 있는 것이다.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에에올·2022)는 가지 못한 길을 떠올리며 자꾸 후회하는 인간을 위로하는 작품이다. 어쩌면 지금보다 더 나았을지 모르는 여러 가능성을 상상하지만, 실제 겪어보지 않았기에 더 좋았을지 아닐지 알 수 없다. 결국 우리는 현재를 사는 수밖에 없다는 새롭지 않은 이야기를 영화는 휘몰아치는 연출을 통해 새롭게 받아들이도록 한다.
후회로 점철된 삶을 살아온 이민자 “내가 낳은 딸도 뜻대로 안 크네”
주인공은 지금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는 이민자 여성 에블린(양자경)이다. 에블린은 남편(키 호이 콴)을 따라 미국으로 와서 살게 됐지만 인생엔 늘 원망과 아쉬움이 있었다. 아들을 갖고 싶었던 아버지는 에블린이 태어났을 때부터 탐탁지 않게 여겼고, 딸의 모든 선택에 불만을 토로했다. 에블린이 지금의 남편과 결혼을 선언한 뒤엔 오랜 기간 딸로부터 연락을 차단하기도 했다.
아버지 반대를 무릅쓰고 시작한 남편과의 부부생활에도 언제나 후회가 따라다녔다. 코인 빨래방을 운영하며 작지 않은 집에서 살림을 꾸려나갔지만, 에블린이 생각했던 이상적 삶과는 거리가 있었다. 세탁소 사장이 된다는 건 오너로서 럭셔리 라이프를 누리는 것보다는 손님들의 각종 민원처리반장이 되는 것에 가까웠다.
남편은 다정했지만 철부지 같아 믿고 따라갈 만큼 듬직하지 않았다. 자기 정도나 되니깐 남편을 ‘데리고 살아주는 것’이라고 여겼는데, 어느 날 남편이 이혼 서류를 들이밀며 에블린은 극도의 혼란에 빠진다.
예쁘게 자라주리라 기대했던 딸은 삐딱한 태도로 엄마에게 대들었고, 커서는 여자 친구를 데려왔다. 에블린은 딸의 성적 지향에 이래라저래라 하지 않은 것만으로 좋은 엄마가 됐다고 생각했지만, 딸은 에블린이 자신의 여자 친구를 외할아버지에게 자신 있게 소개해주길 바랐다. 그러나 에블린은 딸의 ‘친한 친구’라는 말로 대신하며 상처를 줬다. 평생 자기를 인정해주지 않았던 아버지가 손녀의 성향을 두고 왈가왈부하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멀티버스 안에서 만난 여러 버전의 ‘나’…“관통하는 공통점은 후회였다”
무기력하게 하루하루에 끌려가던 에블린은 어느 날 비현실적인 순간을 마주한다. 사실 이 세상엔 멀티버스가 존재하고 있었고, 본인이 혼돈에 빠진 다중우주를 구할 적임자였단 것이다. 에블린이 우주의 구원자가 될 수 있는 이유는 간단한다. 자신에게 가능했던 모든 선택지 중 스스로를 가장 약하게 만드는 선택만 해왔기에, 반대로 어떤 것이든 될 수 있는 잠재력을 갖게 된 것이다. 에블린은 다른 우주에서 보다 멋지게 살고 있는 자신에게서 능력을 빌려오며 범우주적 악당 조부 투파키에 맞서 싸운다.
에블린은 여러 우주를 넘나드는 과정에서 배우와 요리사 등 현재와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고 있는 다양한 버전의 자신을 만난다. 그러나 모든 버전의 인생에서 공통적으로 따라다녔던 것은 아쉬움이었다. 어떤 길을 선택해도 완벽한 만족이란 없었던 것이다. 모든 가능성을 한 번에 경험하던 도중, 에블린은 항상 자신을 답답하게 만들었던 남편에게도 강점이 있었음을 깨닫는다. 그것은 쉽게 후회하는 자신의 옆에서 언제나 다정한 모습으로 삶의 균질성을 유지하게 해준 ‘친절함’이었던 것이다.
친절해지겠다는 용기
영화는 도전에 대한 이야기다. 인간은 자기 삶에 만족하지 못할 때, 타인에게도 날카로워지기 쉬운데, 그 순간에도 주위에 친절해지는 용기를 낼 수 있겠느냐는 질문이다. 우리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 중 어떤 것이 자신을 더 행복하게 할지는 불확실하지만, 주위에 친절해지는 것만큼은 보다 나은 결과를 가져오지 않겠느냐고 묻는다. 다중우주의 수많은 가능성을 뚫고 내 옆에 와준 인연을 소중하게 대해보겠단 결심이 필요하단 것이다.
‘모든 것을, 모든 곳에서, 동시에’ 체험한 에블린은 인생은 ‘한 가지를, 한 곳에서, 하나씩’ 경험해나가는 것임을 깨닫는다.
‘그때 그 선택을 하지 않았더라면’이라고 후회하지만, 어쩌면 우리가 저지른 크고 작은 실수 덕분에 현재의 소중한 인연들과 만나게 됐는지 모른다. 멀티버스라는 소재의 새로움에만 전적으로 기댔던 많은 블록버스터가 산으로 가버린 동안, ‘에에올’은 뚜렷한 방향성을 가진 서사에 멀티버스를 입히며 관객을 성찰의 시간으로 인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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