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하면서도 보던 막장 드라마 전성시대 저무나
(시사저널=정덕현 문화 평론가)
'욕하면서 본다'는 막장 드라마의 전성시대는 이대로 저무는 걸까. 최근 SBS에서 방영되고 있는 김순옥 작가의 《7인의 탈출》은 시작부터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전개로 논란이 잇따랐지만 시청률은 그리 높지 않다. 어째서 과거와는 다른 막장의 양상을 보이는 걸까.
《펜트하우스》와는 다른 반응
너무나 개연성 없는 전개로 이른바 '막장'이라는 표현을 받지만, 시청률은 고공행진을 하는 이른바 막장 드라마의 전성시대가 있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황당한 세계지만, 시청자들은 말초적인 재미를 나름 선사하는 이들 드라마에 예외를 두는 이례적인 반응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아내의 유혹》으로 일일드라마로서 최고 시청률 37.5%(닐슨코리아)를 내며 최고의 화제성까지 불러일으켰던 김순옥 작가는 현 시대의 막장 드라마 계보를 잇는 인물로 이른바 '순옥적 허용'이라는 표현까지 만들어냈다. 전작이었던 《펜트하우스》 역시 자극적인 전개로 갖가지 논란을 불러일으켰지만, 그럼에도 최고 시청률 30.5%를 기록하며 '역시 김순옥 작가'라는 평가를 받았다. 강남의 헤라팰리스라는 최고급 주상복합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통해 부동산과 교육 1번지 강남의 치부를 복수극의 형태로 폭로하는 내용의 《펜트하우스》는 그래서 '욕하면서도 보는' 막장 드라마의 건재함을 알리는 작품이 되기도 했다.
그런 김순옥 작가가 이번에는 《7인의 탈출》이라는 작품으로 돌아왔다. 자극적인 전개는 첫 회부터 상상을 초월했다. 고등학생이 학교에서 아이를 출산하고, 성공에 대한 욕망으로 딸을 죽음으로 내모는 비정한 엄마가 등장하며, 가짜뉴스로 몸도 영혼도 모두 파괴된 채 죽음으로 내몰리는 여고생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배신과 살인은 기본이고, 한 아이는 물론이고 그 가정까지 모두 파괴되는 처절한 상황들이 전개된다. 김순옥 작가 특유의 고구마-사이다 전개 방식도 여전하다. 선한 자들이 줄초상을 당하는 고구마 전개를 강하게 앞에 깔아놓은 후, 그들을 그렇게 만든 빌런들을 향한 사이다 복수가 이어진다. 다만 피카레스크 복수극(악인들이 주인공인 이야기)을 지향하고 있어서인지, 사이다 복수는 이뤄질 듯 이뤄지지 않고 끝내 빌런들은 질깃질깃하게 살아남는 전개가 이어진다.
게다가 5회부터는 김순옥 작가의 작품들이 대부분 그러하듯이 시간이 흐른 후, 죽음의 끝에서 살아 돌아온 자들의 피의 복수가 시작된다. 최강 빌런인 금라희(황정음)와 차주란(신은경)에 의해 살해된 줄 알았던 방칠성(이덕화) 회장이 끝내 살아남아 자신의 막대한 재산으로 손녀 방다미(정라엘)의 죽음에 대한 복수를 계획한다. 역시 김순옥 작가의 세계에서 빠질 수 없는 성형 후 다른 인물로 돌아오는 이야기도 펼쳐진다. 방다미의 양부인 이휘소(민영기)는 방칠성 회장의 도움으로 교도소에서 탈출하고 성형을 통해 매튜 리(엄기준)가 돼 돌아와 치밀하게 짜놓은 복수극을 펼쳐 나간다.
이 정도의 흐름이라고 하면, 자극과 선정성은 물론이고 김순옥 작가의 세계가 막장이면서도 늘 기대를 갖게 만들었던 복수극 서사까지 《펜트하우스》의 구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 여겨지는데, 의외로 《7인의 탈출》에 대한 반응은 그리 좋지만은 않다. 6%로 시작한 시청률은 6회가 방영되는 동안 최고 시청률 7.7%에 겨우 머물러 있고, 화제성도 대부분 황당한 전개와 개연성 부족에 대한 비판과 실망감에 집중돼 있다. 또 원조교제와 학교 출산 같은 자극적인 소재들은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 민원이 속출하는 상황까지 만들고 있다. 어째서 《펜트하우스》와 《7인의 탈출》에 이처럼 다른 반응이 나오고 있는 걸까.
시청자들은 제아무리 '순옥적 허용'이라고, 어느 정도 '포기하고' 드라마를 시청한다고 해도 이건 허용치를 넘어섰다고 말한다. 개연성 부족은 드라마 시작부터 등장했다. 과거 《아내의 유혹》에서 얼굴에 점 하나 찍고 돌아와 다른 사람이라고 우기면 그게 통하기도 했던 것처럼, 그저 평범해 보이고 일상적인 활동을 하는 것처럼 보이던 여고생이 갑자기 진통을 느끼더니 학교 미술실에 들어가 출산을 떡하니 하는 황당한 전개가 먼저 시작됐고, 그 출산을 도와주고 그 사실을 숨겨준 친구에게 이 여고생이 말 몇 마디로 출산 사실을 뒤집어씌우자, 그 가정까지 풍비박산 나는 작위적인 상황이 연출됐다.
하지만 이러한 개연성 부족은 5, 6회에 섬에서 전개된 일련의 황당한 사건들에 비하면 어린아이 장난 수준이다. 수십 명이 살아남기 위해 핏빛 생존게임을 벌이는 이 에피소드에서는 환각 속에서 유니콘이 등장해 하늘로 날아오르는 광경이 펼쳐지더니, 산사태에 사람들이 깔려 죽고, 갑작스레 불어난 물에 사람들이 쓸려가는 장면은 물론이고, 어디선가 나타난 멧돼지떼의 추격전에 늪에 빠진 자들을 밟아 죽이며 지나가는 자극적인 상황과 심지어 괴상하게 생긴 괴물과의 사투까지 그려졌다. 약물 중독에 의한 환각 속에서 벌어진 사건들이라고는 하지만 너무나 개연성을 우주로 날려 보내는 황당 전개가 아닐 수 없다.
'순옥적 허용', 허용치를 넘어서다
게다가 섬에 갇혀 벌어지는 이러한 생존게임은 어디선가 다른 작품들에서 차용한 듯한 소재들이라는 점에서 신선함도 없었다. 《오징어 게임》의 악당 버전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섬에 갇힌 채 벌어지는 사건들은 《슬픔의 삼각형》을 떠올리게 하기도 한다. 그것이 패러디거나 오마주라고 해도, 너무나 조악한 특수효과 방식으로 연출되고 개연성 없이 전개된 대본 속에서 결코 즐길 수 있는 재미를 주지는 못했다. 그저 그 좋은 소재들마저 막장으로 하면 이렇게 조악해진다는 걸 확인시켜주는 정도라고나 할까. 이러니 시청자들이 제아무리 '순옥적 허용'을 해준다고 해도 드라마를 즐길 수 없는 상황이 됐다. 실로 《오징어 게임》처럼 완성도 높은 드라마가 나와 이른바 K드라마라고 지칭되며 글로벌 반향을 일으키는 시대가 아닌가. 이러니 시청자 중에는 "제발 국내에서만 보게 해달라. 해외에서 볼까 겁난다"는 반응이 나오기도 했다.
놀라운 건 《7인의 탈출》 17부작에 제작비가 무려 462억원이나 투입됐다는 사실이다. 《오징어 게임》이 약 246억원을 들여 만든 작품이라는 사실을 떠올려 보면, 이렇게 많은 제작비를 투여한 《7인의 탈출》이 이토록 조악한 완성도에 머물렀다는 건 우리네 제작의 방만함을 떠올리게 만든다.
《7인의 탈출》의 부진으로 '욕하면서 보던' 막장의 시대가 지나갔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여전히 작가의 자의식이 과잉된 채 개연성은 떨어지지만 그래도 시청자들이 원하는 시원한 사이다를 여지없이 먹여주는 막장 드라마는 먹힐 가능성이 높다. 다만 《7인의 탈출》은 피카레스크를 추구하면서도 시청자들이 원하는 만큼의 충분한 사이다를 제공해 주지 않은 균형의 실패가 먼저 눈에 띈다. 또한 황당한 전개와 개연성 부족도 이제는 어느 정도여야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면도 있다. 그만큼 K드라마의 위상도 높아지고, 좋은 완성도의 드라마를 많이 접한 시청자들로서는 이제 과거처럼 적당히 해도 통하는 '허용'에도 한계가 생겼다는 뜻이다. 이런 변화를 읽어내지 못한 김순옥 작가의 자만과 자의식 과잉이 《7인의 탈출》의 초반 부진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여겨진다.
무엇보다 드라마 업계가 모두 침체기에 들어가 있는 지금, 《7인의 탈출》 같은 막장에 거액의 제작비가 투여되고, 그것이 자칫 실패 사례로 기록됐을 때 만들어질 허탈감은 큰 후유증으로 돌아올 수 있다. 어려운 시기니만큼, 작품의 기획 단계부터 좀 더 철저한 '선택과 집중'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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