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도 헷갈린 ‘검은 양’ 위치…20세기 왕세자비의 장난기 [한지숙의 스폿잇]
[헤럴드경제=한지숙 기자] 여기 똑같아 보이는 스웨터를 입은 고(故) 다이애나 영국 왕세자비의 사진 두 장이 있다. 한 장(상단 왼쪽)은 1981년 19세의 ‘다이애나 스펜서’가 한 폴로 경기장에 참석한 모습이다. 찰스 영국 왕세자와 약혼 발표 4개월 뒤에 전세계에 “내가 영국의 왕세자빈이다”라고 눈도장을 찍은 결정적 장면이다. 또 다른 한 장(상단 오른쪽)은 그로부터 2년 뒤인 1983년 찰스 왕세자와 함께 폴로 경기장을 찾았을 때 모습이다.
두 사진 속 빨간 스웨터에서 다른 차이를 발견했다면 당신을 ‘틀린그림찾기’ 고수로 인정한다.
1981년에 촬영한 첫번째 사진을 보면 앳된 모습의 다이애나는 청바지와 스웨터에 피터팬 칼라 셔츠를 받쳐 입었다. 두번째 사진은 같은 스웨터에 역시 피터팬 칼라지만, 흰색 바지와 검정색 타이, 빨강색 정장 구두, 선글라스까지 매치해 전체적으로 격을 더 신경 쓰고 성숙한 차림새다.
이 스웨터는 다이애나비를 상징하는 의상으로 손꼽히는, 유명한 ‘검은양’ 스웨터다. 빨간색 바탕에 흰 양 수십 마리가 줄 지어 있고 그 사이에 검은 양 한 마리가 끼어 있는 디자인이다.
왜 유명해졌냐 하면, 검은양(black sheep)은 영어로 무리에서 환영 받지 못하는 이단아를 뜻하는데 귀족 가문 출신이지만 왕실에서 환영받지 못했던 다이애나의 처지를 암시하는 ‘스토리’를 품었기 때문이다.
첫번째 사진 속 스웨터가 지난달 14일(현지시간) 미국 뉴욕 소더비 경매에서 무려 114만 3000달러(15억 1721만원)에 팔렸다. 사전 예상 낙찰가 5만∼8만달러(약 6600만∼1억원)의 15배를 훌쩍 넘겼으며, 그간 경매에서 팔린 다이애나비 의상 중 최고가로 낙찰됐다.
불과 40여년 전 중고 옷이 왜 이렇게 높은 가격에 팔린 것일까.
1997년 파파라치에 쫓겨 교통사고로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한 다이애나비의 삶이 신화화됐기 때문으로 보인다. 넷플릭스의 오리지널 드라마 ‘더 크라운’도 한 몫 거들었다. 시즌5까지 제작된 이 시리즈의 인기가 워낙 높다. 시즌 4에 검은양 스웨터가 등장했는데, 1994년 단종된 제품이 약 30년 만에 재출시돼 다시 유행하는 효과를 냈다.
이 스웨터는 1979년 ‘웜 앤드 원더풀(Warm & Wonderful)’이 출시했다. 창업자인 샐리 뮤어와 조안나 오스본은 한 매체에 “다이애나 스펜서가 우리 스웨터를 입은 것을 일요일 신문 1면을 보고 알았다”며 “너무 놀랐고, 그녀의 영향력이 우리 브랜드의 대중 인지도 향상으로 이어져 그녀에게 매우 감사할 따름”이라고 했다.
다이애나비는 공식석상에 검은양 스웨터를 여러 차례 입었다. 버킹검궁은 첫번째 사진 속 스웨터의 소맷자락이 튿어 지자 웜 앤드 원더풀 측에 수선을 맡겼다. 그런데 오스본은 스웨터를 수선하지 않고 새 제품을 짜서 궁에 보냈다. 그 두번째 스웨터가 바로 1983년 폴로 경기장 사진에 등장한다. 자세히 보면 첫번째 사진의 스웨터 속 검은양은 왼쪽을 향해 서 있는데 두번째 사진의 검은양은 오른쪽을 향해 있다. 다이애나비가 헌 스웨터가 아닌 새 스웨터를 받은 걸 눈치 챘는 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소더비에 따르면 수선되지 않은 상태의 본래 스웨터는 올해 3월 뮤어와 오스본의 다락방에서 우연치 않게 발견됐다. 침대보 옆에 있는 작은 상자에 버킹검궁이 수선을 의뢰한 서한과 함께 넣어져 있었다고 한다. 오스본은 수선을 맡긴 다이애나비 측에 새 스웨터를 보냈고, 원래 스웨터도 수선해 다이애나비에게 전달했다고 생각했으나 알고 보니 그간 오즈번의 다락방에 보관돼 있었다고 AFP는 보도했다. 오스본은 40여년 된 중고 스웨터를 집 한 채 가격에 파는 행운을 누렸다.
고등학교 중퇴 학력에 유치원 보모 경력이 전부로 지성은 겸비하지 못한 다이애나비는 패셔니스타였다. 패션으로 대중과 소통할 줄 알았다. 주관도 뚜렷하고 자존심이 셌다. 그는 찰스 왕세자의 인기를 뛰어넘어 전세계인들의 사랑을 받았다.
영국 BBC의 최근 보도에서 영국의 패션 역사가 일레리 린은 검은양 스웨터를 입은 다이애나에 대해 “그 당시(1981년) 다이애나는 자신만의 스타일 감각을 발전시키고 있던 아주 젊은 여성이었다”며 “그녀는 패션에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 또래들처럼 옷을 입고, 옷차림에 매우 장난기가 있었다. 하지만 패션을 통해 대중과 소통하는 단계는 아직 아니었다”고 평가했다.
글래스고대 패션역사학자 샐리 터킷은 “1980년대는 생생한 색감과 대담한 표현의 시대였고, 특히 니트웨어 디자인에서 그러한 특징이 두드러졌다”며 “검은 양 스웨터는 그 특징에 부합한다”고 했다.
이 스웨터를 1980년대에 대유행한 ‘슬론룩’(Sloane look)의 부상과 연결 짓기도 한다. 런던의 부촌 첼시에 있는 쇼핑가 ‘슬론 광장’에서 그 이름을 따온 슬론룩은 영국 상류층 스타일을 현대풍으로 만들어낸 패션 스타일이다.
린은 “다이애나는 ‘슬론 레인저’(Sloane Ranger·영국 상류층으로 야심 없는 한량)였고, 이 스웨터는 그녀의 옷 중 장난기가 가득한 부분”이라고 말했다.
1982년에 발간된 ‘슬론 레인저 핸드북’의 저자 루엘라 바틀리는 다이애나를 슬론 레인저의 전형이라고 표현하며 “그들은 재미와 장난, 화려한 드레스 무도회, 바보같은 별명들에 능숙했다. 그들이 싫어한 건 영리해지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분명 반(反) 지성적이고, 진지한 사람들을 참지 못했다”고 했다.
린은 “1981년에 다이애나는 아웃사이더도 반항아도 아니었지만, 그 뒤 몇 지나선 자신의 패션 선택으로 사람들을 놀래키는 걸 즐기기 시작했다”며 가령 이브닝 장갑을 한 쪽은 검은색, 한 쪽은 빨간색으로 짝짝이로 낀다거나, 턱시도 바지 정장을 입는다거나 장례식에서나 입는 검은 옷을 착용한 사례를 들었다.
다이애나는 가디건이나 스웨터 등 니트웨어를 즐겨 입었다. 큰 키에 마른 체형에 잘 어울리는 대담하고 과감한 디자인이 주를 이뤘다.
분홍색 리마 스웨터도 유명하다. 다이애나가 발모랄성에서 결혼식을 올리기 직전에 입은 스웨터로 다이애나는 여기에 코듀로이 팬츠와 레인부츠로 자연스러 멋을 냈다. 임신했을 때는 큼지막한 코알라가 그려진 품이 넉넉한 스웨터로 배를 가렸다.
다이애나비는 13살 연상에 결혼 때부터 커밀라 파커볼스와의 관계를 끊지 못했던 찰스 3세와 위태로운 결혼 생활을 보내다 1992년 12월에 별거하고, 1996년 8월에 이혼했다. 이듬해인 1997년 8월에 프랑스 파리에서 파파라치에 의해 쫓기던 중 교통사고로 숨졌다.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20세기 스타일 아이콘의 의상에 대한 대중의 열광과 집착은 더욱 커졌다. 다이애나비가 입은 의상, 보석, 심지어 웨딩케이크까지 경매에서 비싼 가격에 팔렸다.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에 따르면 검은양 스웨터 다음으로 경매에서 높은 가격에 팔린 다이애나비 소장품은 영국 왕실 공식 주얼리하우스 가라드(Garrard)의 ‘백조의 호수’(1997년 발레공연 ‘백조의 호수’ 관람 때 착용해 붙여진 이름이다) 목걸이, 귀걸이 셋트로 100만달러에 가구 거물에게 팔렸으나 지금은 박물관에 전시 돼 있다.
1991년 왕실 초상화를 위해 착용했던 빅터 에델스타인 디자인의 보라색 벨벳 드레스가 올해 1월에 60만 4800달러(7억 4400만원)에, 1985년 미국 백악관에서 배우 존 트라볼타와 춤 출때 입은 빅터 에델스타인 디자인의 검은색 벨벳 드레스가 32만 1000달러, 리처드 브랜슨 버진 애틀랜틱 대표가 다이애나비에게 선물한 스웨터가 5만 2000달러에 각각 팔렸다.
jshan@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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