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죽지 않은 살리에리를 위하여 [영화와 소설 사이]
인간의 가슴 한구석에 뱀처럼 도사린 태생적 감정이 있다면 아마도 질투일 겁니다. 가톨릭과 정교회에선 증오와 적의의 감정인 질투를 ‘칠죄종(peccata capitalia)’으로 불러 금했고, 불교에서도 질투를 번뇌로 봤으며, 이슬람교 쿠란에서도 질투는 통제됐습니다.
하지만 질투심 없는 인간이 가능할까요? 영화 <아마데우스>는 바로 이 질투를 주제 삼은 걸작입니다. 1985년 아카데미상 트로피 8개를 쓸어 담으며 8관왕을 차지했던 완벽에 가까운 작품인데, 1979년 초겨울 런던의 올리비에 국립극장에서 초연된 피터 셰퍼의 동명 희곡 <아마데우스>가 원작입니다.
‘천재 음악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를 질투했던, 왕실 제1 궁정악장 안토니오 살리에리가 살의(殺意)를 품으며 시작되는 이야기입니다. ‘질투라는 감정에 관한 정신병적 해부학 도록’에 가까운 영화와 희곡 <아마데우스>의 심연으로 떠나 봅니다.
회복 후 정신병동에 감금된 살리에리는 영화 <아마데우스>에선 고해성사 신부에게, 희곡(연극) <아마데우스>에선 무대 앞 관객에게, 자신의 젊은 시절 죄를 고백합니다. 어떤 사연이었던 걸까요.
<아마데우스>는 1781년 31세였던 살리에리를 비춥니다. 그는 비엔나에서 가장 성공한 음악가였습니다. 그는 황제 요제프의 총애를 받았고, 만인이 그의 음악을 숭앙했습니다. 살리에리는 늘 신에게 기도했습니다. ‘신이 주신 음악을 통해 신의 창공을 빛내겠다’는 다짐이었습니다. 살리에리의 악보는 음악적 진리를 찾는 구도(求道)의 여정에 가까웠습니다.
그런데 살리에리가 처음 만난 청년 모차르트의 성정은 사실 좀 기대 이하였습니다. 약혼녀 앞에서 ‘북북’ 방귀를 뀌고, 여자 치마 벗기기를 즐겼으며, 천박한 웃음을 가진 아주 거북한 인물이었습니다. 살리에리는 그의 천재성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그의 ‘간절하지 않음’을 발견하고 실망합니다.
무슨 저딴 녀석이 황제 총애를 받는 천재인가 싶었던 살리에리는, 그러나 피아노 앞에서 모차르트의 연주가 시작되는 순간, 숨이 막혀 말을 잇지 못할 정도로 놀랍니다. 살리에리는 모차르트의 악보에서 신의 목소리를 들어버린 것이었지요. 살리에리는 방으로 돌아가 기도하며 절규합니다. “그자의 음악 앞에 나의 심혈을 기울인 작품 따윈 생명 없는 낙서질에 불과했습니다!”(130쪽)
살리에리는 결국 엄청난 질투심에 가득 차서는, 모차르트를 제거하기로 마음먹습니다.아주 조용히,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말이지요. 살리에리는 궁정악장인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모차르트의 ‘가난’을 일부러 설계하고는, 모차르트에게 거금을 줄 테니 ‘진혼곡’을 두 달 안에 완성하라고 독촉합니다.
사실 모차르트는 낭비벽이 심한 데다 저축하는 습관이 없어 처자식을 먹여 살릴 돈이 부족했습니다. 명성에 비해 매우 가난한 삶을 살았지요. 방탕한 생활을 정리하고 빈곤한 생활을 딛고 아내와 아들을 먹여 살릴 기회로 봤던 모차르트는 건강이 악화하는 상황에서도 필생의 역작을 써내려 하고, 그 결과 다발성 합병증으로 침대에서 사망합니다. 그 중심에 살리에리의 음모가 있었습니다.
모차르트 암살은 살리에리 자신만이 관객이었던, 은폐된 ‘역작’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원작 희곡 <아마데우스>에선 살리에리가 느끼는 분노의 방향이 조금 다르게 나타납니다. 희곡 <아마데우스>에서 살리에리가 겨냥하는 대상은, 단지 인간 모차르트가 아니라 저 ‘너머’에서 모차르트를 자신에 곁에 있도록 했던 창조주로서의 신이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살리에리는 신에게 평생 ‘재능’을 갈구했습니다. 그러나 신은 살리에리가 원했던 재능 대신 명성과 부를 허락했습니다. 또 신은 살리에리에게 재능 대신 ‘재능을 가진 자를 알아볼 수 있는’ 식별력만을 허락했습니다. 시대의 걸작을 만들고자 했던 살리에리의 바람과는 거리가 멀었지요.
“제가 이 세상을 이해하려고 예술에 몸과 마음을 받치는 건 오직 하나, 당신(신)의 소리를 듣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전 당신의 소리를 듣습니다. 오직 모차르트를 부르는 당신의 소리 말입니다. 그런 자를 당신은 신의 대리자로 선택하셨습니다. 불공평한 신이여, 당신은 적이요!”(131~132쪽)
그런 점에서 피터 셰퍼가 원작 희곡에서 말하고자 했던 건 ‘신과 인간의 관계’일 겁니다. 영화가 ‘인간 대 인간’의 문제를 다루지만, 희곡은 ‘신과 인간’의 문제를 다룹니다. 인간 자신이 원치 않는 자신을 만나 한계를 느낄 때, 그러나 그 한계를 가뿐히 초월한 타인을 만나 절망할 때, 스스로에 대한 절망감과 신에 대한 배반감을 동시에 느끼는 존재가 아닐까요.
그는 인간의 삶이란 복잡하며, 따라서 무대 위 인물도 그러해야 한다고 본 것이지요. “난 진짜 인간이 나오는 작품을 쓰고 싶습니다. 사실적인 장소를 사용해서 말입니다. 저는 진짜 인생을 묘사하고 싶습니다.”(155~156쪽) 그런데 이 과정에서, 모차르트는 250쪽이 넘는 원작 희곡과 상영시간 180분짜리 영화에서 단 한 번도 신을 이야기하거나 신에게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모차르트에게 이탈리아어는 신의 말씀을 구현하는 허황된 언어에 가깝고, 투박한 독일어는 사람 냄새 나는 참다운 언어였던 것이지요. 그래서 독일어를 주장한 것으로 이해됩니다. 청중을 신으로 받드는 천재 영웅 모차르트가 나타나 무대 위 전통 언어였던 이탈리아어와 살리에리로 대표되는 궁정을 전복시키는 모습을 보면서 영화 관객(또는 희곡 독자)는 벅찬 희열을 느낄 수밖에 없게 됩니다.
모차르트의 인간성 희구와 전통의 전복이란 주제는 그래서 이미 성공이 예견됐던 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비유하자면 살리에리가 오페라 무대에 만들어내는 인물이 ‘신 앞에서 기도하는 인간’인 반면, 모차르트가 오페라 무대에 만들어내는 인물은 ‘진짜 인간’인 셈이지요.
<아마데우스>가 모든 인간에게 공평하지 않은 신에 대한 인간의 울분으로 읽히는 건 그 때문일까요. 생각해보면, 우리는 모두 조금씩은 살리에리가 아니었나요. 살리에리는 최후에 이르러 이렇게 말합니다. “어차피 모차르트가 되지 못할 바엔 다른 아무것도 되고 싶지 않았소.”(255쪽)
그런 점에서 작품 <아마데우스>는 모차르트가 되기 위하여 수많은 밤을 번민했을 우리 안의 살리에리를 위한 언어의 진혼곡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마데우스>의 천재 모차르트보다, 그에게 가려졌던 살리에리의 삶을 왜인지 모르게 긍정하게 되는 건, 그 때문일 겁니다.
신이 내려준 악상을 받아 적기만 하면 명곡이 됐던 천재 모차르트, 그리고 시시각각 재능의 한계에 절망했던 살리에리. 이 글을 읽으실 여러분은 어느 쪽에 가깝다고 생각하시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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