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죽지 않은 살리에리를 위하여 [영화와 소설 사이]

김유태 기자(ink@mk.co.kr) 2023. 10. 15. 1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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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로스 포먼 <아마데우스> vs. 피터 셰퍼 <아마데우스>
스토리텔링이라는 점에서 소설과 영화는 닮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소설과 영화가 빼닮았더라도 그 간극에선 의도적이든 비의도적이든 무수한 차이가 발생합니다. [영화와 소설 사이]는 저 사이(間)에 숨겨진 차이를 발견해 예술의 두 형식을 사유하는 연재기획입니다. 매달 15일 온라인 연재됩니다.

인간의 가슴 한구석에 뱀처럼 도사린 태생적 감정이 있다면 아마도 질투일 겁니다. 가톨릭과 정교회에선 증오와 적의의 감정인 질투를 ‘칠죄종(peccata capitalia)’으로 불러 금했고, 불교에서도 질투를 번뇌로 봤으며, 이슬람교 쿠란에서도 질투는 통제됐습니다.

하지만 질투심 없는 인간이 가능할까요? 영화 <아마데우스>는 바로 이 질투를 주제 삼은 걸작입니다. 1985년 아카데미상 트로피 8개를 쓸어 담으며 8관왕을 차지했던 완벽에 가까운 작품인데, 1979년 초겨울 런던의 올리비에 국립극장에서 초연된 피터 셰퍼의 동명 희곡 <아마데우스>가 원작입니다.

‘천재 음악가’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를 질투했던, 왕실 제1 궁정악장 안토니오 살리에리가 살의(殺意)를 품으며 시작되는 이야기입니다. ‘질투라는 감정에 관한 정신병적 해부학 도록’에 가까운 영화와 희곡 <아마데우스>의 심연으로 떠나 봅니다.

영화 ‘아마데우스’의 한 장면. 천재를 시기한 평범한 궁정음악가의 질투에서 시작된 광기를 다룬 작품으로, 전설적인 희곡 작가 피터 섀퍼의 원작을 영화화했습니다.
‘신의 피리’와 하찮은 골동품
1823년 11월 초겨울,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70대 왕실 궁정악장 살리에리가 정신착란을 일으킵니다. 살리에리는 자신이 32년 전 모차르트를 죽였다고 고백합니다. 살리에리는 “용서해주오, 모차르트! 당신의 암살자를 용서해주시오”라면서 면도날로 자신의 목을 긋습니다.

회복 후 정신병동에 감금된 살리에리는 영화 <아마데우스>에선 고해성사 신부에게, 희곡(연극) <아마데우스>에선 무대 앞 관객에게, 자신의 젊은 시절 죄를 고백합니다. 어떤 사연이었던 걸까요.

<아마데우스>는 1781년 31세였던 살리에리를 비춥니다. 그는 비엔나에서 가장 성공한 음악가였습니다. 그는 황제 요제프의 총애를 받았고, 만인이 그의 음악을 숭앙했습니다. 살리에리는 늘 신에게 기도했습니다. ‘신이 주신 음악을 통해 신의 창공을 빛내겠다’는 다짐이었습니다. 살리에리의 악보는 음악적 진리를 찾는 구도(求道)의 여정에 가까웠습니다.

영화 ‘아마데우스’ 속 젊은 시절의 살리에리. 그는 늘 신에게 재능을 갈구하며 기도하고 또 기도했습니다.
어느 날, 잘츠부르크 출신인 젊은 천재 음악가 모차르트가 비엔나로 이사를 옵니다. 모차르트의 음악 신동으로 이미 어린 시절부터 그 명성이 대단했습니다. 4세 때 협주곡을 완성했고 5세 때 황제에게 불려 가 눈을 가리고 연주했으며 14세 때 장막 오페라를 작곡했던 진짜 ‘천재 중의 천재’였습니다.

그런데 살리에리가 처음 만난 청년 모차르트의 성정은 사실 좀 기대 이하였습니다. 약혼녀 앞에서 ‘북북’ 방귀를 뀌고, 여자 치마 벗기기를 즐겼으며, 천박한 웃음을 가진 아주 거북한 인물이었습니다. 살리에리는 그의 천재성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그의 ‘간절하지 않음’을 발견하고 실망합니다.

무슨 저딴 녀석이 황제 총애를 받는 천재인가 싶었던 살리에리는, 그러나 피아노 앞에서 모차르트의 연주가 시작되는 순간, 숨이 막혀 말을 잇지 못할 정도로 놀랍니다. 살리에리는 모차르트의 악보에서 신의 목소리를 들어버린 것이었지요. 살리에리는 방으로 돌아가 기도하며 절규합니다. “그자의 음악 앞에 나의 심혈을 기울인 작품 따윈 생명 없는 낙서질에 불과했습니다!”(130쪽)

살리에리 앞에 나타난 천재 모차르트. 모차르트의 성정은 고상함과 거리가 멀었지만 그의 음악은 신의 음성과 같았습니다. 반면 살리에리는 자신의 음악이 ‘하찮은 골동품’과 같다고 자괴합니다.
심지어 모차르트는 살리에리가 만든 곡을 즉석에서 약간 수정해 인류 전체가 종말 때까지 듣고도 남을 명곡으로 바꿔버리면서 살리에리를 사실상 ‘조롱’합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모차르트가 그야말로 만인이 칭송하는 ‘신의 피리’가 되어가는 동안, 살리에리 자신은 하찮은 골동품을 무대에 올렸다는 자괴감으로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살리에리는 결국 엄청난 질투심에 가득 차서는, 모차르트를 제거하기로 마음먹습니다.아주 조용히, 그리고 아무도 모르게 말이지요. 살리에리는 궁정악장인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모차르트의 ‘가난’을 일부러 설계하고는, 모차르트에게 거금을 줄 테니 ‘진혼곡’을 두 달 안에 완성하라고 독촉합니다.

사실 모차르트는 낭비벽이 심한 데다 저축하는 습관이 없어 처자식을 먹여 살릴 돈이 부족했습니다. 명성에 비해 매우 가난한 삶을 살았지요. 방탕한 생활을 정리하고 빈곤한 생활을 딛고 아내와 아들을 먹여 살릴 기회로 봤던 모차르트는 건강이 악화하는 상황에서도 필생의 역작을 써내려 하고, 그 결과 다발성 합병증으로 침대에서 사망합니다. 그 중심에 살리에리의 음모가 있었습니다.

모차르트 암살은 살리에리 자신만이 관객이었던, 은폐된 ‘역작’이 되었습니다.

살리에리는 모차르트의 창작욕을 이용해 그를 사망에 이르게 합니다. 모차르트의 가난을 설계하고 그에게 주기적으로 독주를 마시게 합니다. 필생의 역작을 써내려던 모차르트는 결국 사망하고 맙니다. 살리에리의 꿈이 이뤄진 것이었지요.
“신이여, 당신은 적이요!”
이제 영화 <아마데우스>와 희곡 <아마데우스>의 차이를 살펴볼까요.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살리에리의 분노는 모차르트를 향합니다. 신의 은총을 모두 가져가 버린 천재 모차르트를 향한 살리에리의 질투는 살인충동으로 이어지며 비극을 맞게 됩니다.

그러나 원작 희곡 <아마데우스>에선 살리에리가 느끼는 분노의 방향이 조금 다르게 나타납니다. 희곡 <아마데우스>에서 살리에리가 겨냥하는 대상은, 단지 인간 모차르트가 아니라 저 ‘너머’에서 모차르트를 자신에 곁에 있도록 했던 창조주로서의 신이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살리에리는 신에게 평생 ‘재능’을 갈구했습니다. 그러나 신은 살리에리가 원했던 재능 대신 명성과 부를 허락했습니다. 또 신은 살리에리에게 재능 대신 ‘재능을 가진 자를 알아볼 수 있는’ 식별력만을 허락했습니다. 시대의 걸작을 만들고자 했던 살리에리의 바람과는 거리가 멀었지요.

왼쪽부터 영화 ‘아마데우스’ 포스터, 피터 셰퍼의 원작 희곡 ‘아마데우스’ 표지, 한국어 번역된 ‘아마데우스’ 한국어판.
그 대신, 재능은 ‘마누라에게 엉덩이나 얻어맞으며 배설물(똥) 소리나 지껄이는 철딱서니 없는’ 모차르트에게 갔습니다. 살리에리가 극심한 고통에 괴로워하다 모차르트를 죽이겠다고 다짐한 이유입니다. 살리에리는 분노합니다.

“제가 이 세상을 이해하려고 예술에 몸과 마음을 받치는 건 오직 하나, 당신(신)의 소리를 듣고자 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전 당신의 소리를 듣습니다. 오직 모차르트를 부르는 당신의 소리 말입니다. 그런 자를 당신은 신의 대리자로 선택하셨습니다. 불공평한 신이여, 당신은 적이요!”(131~132쪽)

그런 점에서 피터 셰퍼가 원작 희곡에서 말하고자 했던 건 ‘신과 인간의 관계’일 겁니다. 영화가 ‘인간 대 인간’의 문제를 다루지만, 희곡은 ‘신과 인간’의 문제를 다룹니다. 인간 자신이 원치 않는 자신을 만나 한계를 느낄 때, 그러나 그 한계를 가뿐히 초월한 타인을 만나 절망할 때, 스스로에 대한 절망감과 신에 대한 배반감을 동시에 느끼는 존재가 아닐까요.

영화 ‘아마데우스’ 속 살리에리는 모차르트에게 분노합니다. 반면 희곡 ‘아마데우스’ 속 살리에리는 신에 대한 분노를 동시에 표출합니다.
모차르트는 기도하지 않았다
영화 <아마데우스>에선 쉽게 스쳐 지나가기 쉬운 한 가지 부분이 있습니다. 황제 요제프의 허락으로 신작 오페라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궁정 관료들은 이탈리아어로 극을 만들기를 주장하고, 모차르트는 독일어를 극을 만들기를 주장합니다. 개인적으로 영화를 보며 그 의미를 해독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원작 희곡 <아마데우스>를 읽어보니 이 논쟁이 왜 필요했는지가 자세하네요.
모차르트는 독일어로 ‘피가로의 결혼’ 등 여러 오페라를 제작합니다. 그에게 독일어는 인간의 언어였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이 쓰는, 지극히 인간적인 언어였습니다.
일단 모차르트는 이탈리어어로 만든 기존 오페라가 인간의 복합적 감정을 단출하게 만들어버리는 따분한 예술이라고 봤습니다. 모차르트는 이탈리아어가 아닌 독일어로 <피가로의 결혼> 작곡을 통해 ‘진짜 인간’의 모습을 무대 위에 구현했습니다.

그는 인간의 삶이란 복잡하며, 따라서 무대 위 인물도 그러해야 한다고 본 것이지요. “난 진짜 인간이 나오는 작품을 쓰고 싶습니다. 사실적인 장소를 사용해서 말입니다. 저는 진짜 인생을 묘사하고 싶습니다.”(155~156쪽) 그런데 이 과정에서, 모차르트는 250쪽이 넘는 원작 희곡과 상영시간 180분짜리 영화에서 단 한 번도 신을 이야기하거나 신에게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모차르트에게 이탈리아어는 신의 말씀을 구현하는 허황된 언어에 가깝고, 투박한 독일어는 사람 냄새 나는 참다운 언어였던 것이지요. 그래서 독일어를 주장한 것으로 이해됩니다. 청중을 신으로 받드는 천재 영웅 모차르트가 나타나 무대 위 전통 언어였던 이탈리아어와 살리에리로 대표되는 궁정을 전복시키는 모습을 보면서 영화 관객(또는 희곡 독자)는 벅찬 희열을 느낄 수밖에 없게 됩니다.

모차르트의 인간성 희구와 전통의 전복이란 주제는 그래서 이미 성공이 예견됐던 일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비유하자면 살리에리가 오페라 무대에 만들어내는 인물이 ‘신 앞에서 기도하는 인간’인 반면, 모차르트가 오페라 무대에 만들어내는 인물은 ‘진짜 인간’인 셈이지요.

영화 ‘아마데우스’는 노년의 살리에리가 정신병원에서 한 신부에게 자신의 과거를 털어놓는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그는 오래 전 자신이 ‘살해’한 모차르트에 대한 죄책감과 질투심을 내면에 간직한 채 평생을 살아왔습니다.
우린 모두 조금씩 살리에리였으므로
고작 35세 나이에 죽었음에도 영원히 기억되는 모차르트에게 비견한다면, 비록 미세한 차이는 있을지언정 동시대 우리의 삶은 평범한 살리에리에 가깝겠지요. 사실 이 글을 쓰는 저 역시 개인적으로 늘 누군가를 질투하고 신이 주지 않으신 재능의 결여에 항상 절망하며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을 오히려 야속하게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

<아마데우스>가 모든 인간에게 공평하지 않은 신에 대한 인간의 울분으로 읽히는 건 그 때문일까요. 생각해보면, 우리는 모두 조금씩은 살리에리가 아니었나요. 살리에리는 최후에 이르러 이렇게 말합니다. “어차피 모차르트가 되지 못할 바엔 다른 아무것도 되고 싶지 않았소.”(255쪽)

그런 점에서 작품 <아마데우스>는 모차르트가 되기 위하여 수많은 밤을 번민했을 우리 안의 살리에리를 위한 언어의 진혼곡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마데우스>의 천재 모차르트보다, 그에게 가려졌던 살리에리의 삶을 왜인지 모르게 긍정하게 되는 건, 그 때문일 겁니다.

신이 내려준 악상을 받아 적기만 하면 명곡이 됐던 천재 모차르트, 그리고 시시각각 재능의 한계에 절망했던 살리에리. 이 글을 읽으실 여러분은 어느 쪽에 가깝다고 생각하시나요?

오스카 8관왕 직후 영화 ‘아마데우스’ 포스터.
※다음 달 15일에는 나카에 이사무 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2001)를 다룹니다. 에쿠니 가오리·츠지 히토나리 소설 <냉정과 열정 사이>(1999)를 원작 삼은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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