닉슨의 젓가락질과 샥스핀의 퇴출···‘중국요리의 세계사’[책에서 건진 문단]
※‘책에서 건진 문단’(책건문)은 경향신문 책 면 ‘책과 삶’ 머리기사의 확장판 이름입니다. 지면 서평은 ‘지면 제약’ 때문에 한두 문장만 인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책건문’은 문단 단위로 내용을 소개합니다. 지면 서평을 더 쉽게 자세하게 풀었습니다. 지은이 뜻을 더 정확하게 전하려는 취지의 보도물입니다. 경향신문 칸업 콘텐츠입니다. 책 문단을 통째로 읽고 싶으시면 로그인 해주세요!
https://www.khan.co.kr/culture/scholarship-heritage/article/202310070600001
이번 주 ‘책건문’은 일본 게이오기주쿠대학 문학부 교수 이와마 가즈히로의 <중국요리의 세계사>(최연희·정이찬 옮김, 따비)입니다. 제목을 조금 더 풀면 ‘중국요리로 본 세계 근현대사’나 ‘세계 근현대사 속 중국요리’ 정도가 될 겁니다.
제37대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이 책에 자주 등장하더군요.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각인된 인물이죠. 미국과 ‘중국요리’의 관계나 역사를 말할 때도 빼놓을 수 없다는 걸 책을 보고 알았습니다.
닉슨과 중국 총리 저우언라이의 연회는 미·중 역사에서 유명한 장면이죠. 널리 알려진 게 1972년 2월 27일 미·중 공동성명 발표 뒤 개최한 축하연에서 저우언라이가 샴페인이나 사오싱주가 아니라 마오타이주를 닉슨에게 권하면서 건배를 하는 장면입니다. ‘마오타이 외교’란 말이 유행했습니다.
구글을 검색하니 2월 26일 만찬 사진도 나옵니다. 닉슨 표정이 묘합니다. 젓가락질이 힘들어 짓는 표정인지, 집어 든 음식 한 점이 무슨 맛일지 궁금해하는 표정인지 알 수 없습니다.
연회만 두고도 여러 이야기를 뽑아낼 수 있습니다.
우선 만찬 메뉴입니다. 중국은 21일 연회 때 죽순 조림 ‘바이즈둥쑨’, 참새우 볶음 ‘유바오다샤’ 송화단 ‘피단’, 으깬 새우 달걀말이 ‘단좐’, 찐 전병과 채소인 ‘정빙스차이’ 등을 내놓습니다. 초호화판 요리는 아닙니다. 제비집 같은 고급 요리는 빠졌죠. 이유가 있습니다. 마오쩌둥이 지시한 ‘쓰차이이탕(四菜一湯·사채일탕, 주요리 네 가지와 탕 하나면 족하다는 뜻)’에 따른 메뉴인 거죠. 음식 재료는 엄선했습니다. 죽순은 쓰촨성 창닝현의 것이었는데, 현은 어디에 쓰일지 모른 채 ‘정치 임무’로 죽순을 모아 보냈다고 합니다.
고급요리 반열에 오른 게 아예 없지는 않았습니다. 21일 연회엔 샥스핀 조림 ‘홍사오위츠’도 올랐죠. 미국 측은 26일 답례 연 때 샥스핀 요리는 빼달라고 요청합니다. 상어 보호 때문이었을까요? 맛 때문이었을까요? 일종의 ‘혐오 음식’으로 여긴 것이었을까요? 이유가 책에 나와 있지 않습니다. 구글 검색으로도 잘 찾을 수 없었고요.
책은 40년 뒤 샥스핀이 환경·생태 운동 영향으로 중국이나 대만의 국가 연회 요리 메뉴에서 사라진 역사를 적었습니다.
이 무렵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타이완) 모두 국가 연회 메뉴에서 샥스핀 요리를 제외하였다. 근세 이래로 접대 연회에 빠지지 않던 고급 식재료였던 샥스핀은 중일전쟁 시기에 왕징웨이 정권이 제비집, 곰 발바닥, 전복과 함께 연회에서 사용을 금지한 적이 있었는데 21세기 초에 이르러 그 지위를 완전히 잃게 된 것이다. 이러한 세계적인 샥스핀 반대 운동에서 더 나아가, 중국에서는 2013년 식품 낭비 반대 운동인 ‘광판싱둥(光盤行動, 그릇에 담긴 요리를 남김없이 먹는다는 의미)이 개시되고, 2021년에는 ‘반식품낭비법’도 공포, 시행하여 샥스핀 등 고급 식재료를 공무 접대용 연회 요리에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이 인용 문단에서 ‘이 무렵’은 2010년대 초반입니다. 2011년 세계자연보호기금이 상어 남획이나 잔인한 어업 방식 반대 운동에 들어갑니다. 2012년엔 야오밍이나 성룡 같은 유명인들이 이 운동에 동참하죠. 2012년 세계 각지의 페닌슐라 호텔 레스토랑에서는 샥스핀을 사용한 요리를 제공하지 않게 됩니다. 한국 환경운동연합이 여러 호텔 앞에서 진행해온 샥스핀 판매 중단 운동이 떠올랐습니다. 지난 7월 ‘자르고 죽이는 샥스핀 판매 호텔 늘어나’라는 제목의 보도자료를 냈군요. 한국 사회 많은 부문이 역행, 악화하는 듯합니다.
http://kfem.or.kr/?p=232750
다시 미·중 연회로 돌아가 보죠. 사진 속 식탁은 회전 테이블입니다. 한국에선 그저 중국 것으로 알고들 있지요. 1931년 일본인 호소카와 리키조가 개발했다는 설이 돌았다고 합니다. 저자는 ‘속설의 사실화’나 ‘음식의 페이크로어(culinary fakelore, 음식에 관한 거짓된 전승)’ 사례 중 하나라고 말합니다. 영국에선 18세기 초 ‘덤웨이터(dumb-waiter)’라는 이름의 회전 테이블이 나왔습니다. 미국에선 1891년 ‘셀프 웨이팅 테이블(self-waiting table)’이란 이름의 특허가 신청됐지요.
중국은? 의사·위생학자 우롄더가 1915년 11월 각각 요리에 별도 숟가락을 놓은 회전대인 ‘위생적 중국 식탁’을 제안하는 내용의 글을 ‘중화의학잡지’ 창간호에 실었습니다. 저자는 가장 중요한 사료라며 일부분을 실었습니다. ‘위생상 이유’에 주목합니다.
1915년 1월 상하이에서 열린 의료전도회(The Medical Missionary Association)의 마지막 협의회에서, 나는 미국의 동료로부터 가정에서 위생적으로 중국요리를 먹을 수 있는 방법의 고안을 의뢰받았다. 그는 중국요리가 좀 더 매력적인 형태로 제공된다면 보다 좋아질 것이라 확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수개월의 경험을 바탕으로 나는 이러한 사항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내 ‘위생 식탁’을 자유롭게 권하고 싶다. 이것은 큰 수프 그릇 하나와 요리 네 가지를 올려두기에 충분한 크기의 원형 혹은 사각형으로 된 쟁반이 붙은, 목재나 금속으로 가능한 한 간단하게 만들어진 회전대(回轉臺)이다. 이 회전대는 식탁 주변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쉽게 손을 뻗을 수 있도록 가능한 한 낮게 해서 식탁 위에 놓아야 한다. 식탁을 둘러싸고 앉은 각각의 사람에게는 자신만의 젓가락, 숟가락, 밥공기, 작은 수프 그릇이 준비되며 회전대에 놓인 각각의 요리에는 별도로 숟가락이 딸려 있다. 이 방법을 쓰면 식탁을 둘러싼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의 숟가락, 젓가락을 공통의 그릇, 접시에 가져가 다른 이를 감염시킬 우려 없이 음식을 덜 수 있다. 이러한 단순한 고안으로 중국요리는 좀 더 위생적인 방법으로 올바르게 즐길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또 하나의 이점은, 마음에 드는 주요리가 지신의 반대편에 있더라도 자리에서 일어설 필요 없이 회전시켜 가져올 수 있어 실크 소매를 기름기 많은 요리에 적실 일이 없다는 것이다.
이듬해인 1916년 회전 원탁을 제작, 판매했다는 기록도 나옵니다.
닉슨의 젓가락질 장면 의미도 큽니다. 닉슨이 중국 음식을 먹는 모습이 미국 전역에 방송되면서 중국요리에 관한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중국요리를 포크나 나이프로 먹던 미국인들이 젓가락질을 시도합니다. 간장을 ‘곤충 주스’라 부르는 이들도 사라졌습니다. 월스트리트 사람들이 점심을 먹으러 차이나타운을 찾았습니다. 베이징덕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미국 중국요리점의 인기 메뉴가 된 베이징덕은 공들인 연출에 따라 테이블에 오르고는 했다. 예를 들어, 우선 징이 울리고 이어서 노란 예복을 입은 시중꾼이 파나 된장을 들고 나타났으며, 마지막에 은제 서빙 카트에 실린 오리 통구이가 나와 요리사가 손님 앞에서 이를 직접 썰어주었다. 이 밖에 뉴욕 등지에서는 닉슨의 연회를 흉내 낸 코스 요리를 파는 가게도 나타났다. (…)
1971년 7월 극비리에 중국을 방문하여 저우언라이와 회담한 헨리 키신저는 저우언라이가 대접한 취안쥐더의 베이징덕을 아주 마음에 들어 했다. 키신저의 귀국 후 닉슨 대통령은 키신저가 중국에서 비밀리에 회담을 가졌으며 이듬해에는 자신이 직접 중국을 방문할 예정이라는 사실을 전격 발표하여 일본을 비롯한 세계 각국에 충격을 주었다(닉슨 쇼크). 키신저는 훗날 중국을 다시 방문했을 때에도 취안쥐더를 찾았다. 그리고 닉슨이 중국을 찾았을 때 저우언라이가 베이징덕을 대접한 것이 계기가 되어 미국에서 베이징덕이 대유행하였다.
중국요리 관련 서적도 나옵니다. <대지>의 작가이자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펄 S. 벅도 1972년 <펄 벅의 오리엔탈 쿡북>이라는 책을 냅니다. 중국 등 아시아 11개국 요리 450여 종의 재료와 간단한 요리법을 소개한 책이죠.
저자는 “다른 문화 예술 분야와 마찬가지로 요리 역시 정치권력과 무관하게 발전할 수는 없다”고 말합니다. 미국의 안전보장 전문가인 조지프 S 나이의 ‘소프트파워’(타국을 억지로 복종시키지 않고도 제 편으로 끌어들이는 힘 등을 뜻함) 개념을 빌려 이렇게 말합니다. “(중국요리는) 1941년 중국국민당이 대미 선전을 위해 증정한 판다보다 시기는 조금 늦을지언정 판다와 함께 중국을 대표하는 ‘소프트파워’의 원천이 되었으며, 중화인민공화국이 국제적 지지를 얻기 용이한 환경을 만드는 데 이용되어왔다”고 말합니다.
미국과 중국 사례를 자세히 소개한 건 저자가 밝힌 책 정의와 지향과 잘 맞아떨어지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중국요리를 둘러싼 세계 각국의 내셔널리즘의 양상을 비교·해명하여 일국의 정치나 사회의 틀에 갇힌 시각을 넘어 중국요리의 창출과 보급이 가진 세계사적 의미를 찾아내려는 시도이다. 그렇기에 일부 독자의 기대를 저버릴지도 모르지만, 이 책은 요리 자체의 레시피나 그 맛보다는 요리가 받아들여진 사회적 배경, 요리가 이용된 정치 정세를 공들여 고찰한다. 비유하자면, 이 책에서 중국요리는 세계사를 꿰뚫어 살펴보기 위한 렌즈이고 세계사를 그려내기 위한 단면이며 세계사를 봉제하기 위한 솔기이다.
중국요리를 둘러싼 세계 각국의 내셔널리즘 양상도 살피죠. ‘중국’과 ‘중국요리’의 정통성을 두고 중화인민공화국(중국)과 다투던 중화민국(타이완)은 닉슨 방중 이후 미국 내 중국요리 붐에 긴장하죠. 중화민국 정부는 요리사 팀을 미국에 보내 자신들이야말로 중국요리의 전통을 지킨다고 선전합니다. 여러 국가가 요리를 외교 수단으로 삼습니다. ‘미식 외교’입니다. 중화민국이 대표적입니다. 1964년 7월 한국에도 중국요리 전문가를 보내 조리 기술 등을 소개했습니다.
요리는 정치적인 뜻을 나타내기도 합니다. 1990년대 홍콩에서는 ‘푼초이’라 불리는 연회 요리가 유행합니다. 값싼 음식 재료를 몇 겹에 걸쳐 하나의 큰 대야에 담아 조리한 뒤 테이블 가운데에 놓고 모두 손을 뻗어 먹는 요리입니다. “1990년대 홍콩에서 영국에 의한 지배의 종식이 가까워지면서 많은 홍콩 주민이 문화적 귀속 의식을 찾고 있다는 정치적 메시지”를 띠게 됩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특별행정구라는 홍콩이 가진 독특한 지위의 상징”이 되죠. 2014년 푼초이는 중국에 대한 충성이라는 의미를 갖게 된다. 그렇다고 반정부 데모 참가자가 푼초이를 먹지 않은 건 아니라고 합니다. 그것을 운동의 상징으로 삼지 않았죠. 2014년 반정부 시위대가 상징으로 삼은 건 바로 ‘우산’입니다. 저항시위는 ‘우산 운동’으로 불렸죠.
국가나 문화, 사람에 대한 인식은 늘 변하죠. 20세기 초중반 미국에서 중국요리에 대한 부정적 시각은 뿌리 깊었습니다. 대중잡지는 화인(華人, 책에서는 해외 이민자를 가리킨다)을 쥐나 뱀을 좋아하고 수프도 젓가락으로 먹는 존재로 묘사했습니다. 쥐약인 ‘러프 온 래츠(rough on rats)’의 1897년 광고는 화인 남성이 쥐를 먹으려 하는 그림과 함께 “그들은 가버려야 한다!(They Must Go!)”라는 문구를 적었습니다. 캘리포니아 백인 노동자의 극단적 정치 구호이기도 했습니다. 하와이에서도 백인 노동자들이 한국인, 중국인, 일본인 노동자를 배척하는 일이 벌어졌지요. 농장주 같은 갑들이 여러 국적이나 인종 노동자들 같은 을들 간의 다툼을 조장하기도 했고요.
https://www.khan.co.kr/culture/culture-general/article/202305121510001
한편 중국요리점은 흑인이나 아시아인들에게 열린 장소였습니다. 20세기 전반 중국요리점은 아프리카계 미국인을 환영했습니다. 중국요리점은 백인 경영 레스토랑에서 주문을 거부당한 일본인들도 즐겨 찾던 곳이기도 합니다.
책은 여러 국가의 인종주의 문제를 다룹니다. 19세기 말 베트남의 프랑스인 식민자는 베트남, 중국 음식은 먹지 않고, 커리(카레)는 먹었다고 합니다.
프랑스인 식민자는 인종적으로 더럽혀질 것을 우려하여 베트남이나 중국의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다. 프랑스인들의 작은 커뮤니티는 식문화 전통의 경계를 엄격히 유지하고 있어서 아시아 음식을 먹는 프랑스인과 프랑스 음식을 먹는 아시아인은 비판의 대상이었다. 식민지의 프랑스인들은 본국 사람들보다 고기를 많이 먹었으며, 프랑스에서는 그다지 먹지 않는 채소 통조림을 먹었다. 다만 커리는 베트남 현지 요리가 아니라 영국에 의해 해석, 수정된 것이어서 식민지 프랑스인의 식탁에도 종종 올랐다.
프랑스인들이 중국요리를 영원히 먹지 않은 건 아닙니다. 프랑스에서 1950~1960년대 중국요리점이 생겨납니다. 중국요리점 수는 1970년대 말 800여 곳에서 1992년 3000여 곳으로 늘어나죠.
베트남은 중국과 프랑스 요리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죠. 다른 나라 요리에 개방적이었다고 합니다. 프랑스 바게트에서 유래한 ‘반미’는 베트남 음식이 됐죠. “유럽 음식을 먹듯” 중국요리도 먹었습니다. 남베트남에서는 1955년 10월 미국을 후원자로 하는 응오딘지엠 정권이 수립되자 햄버거나 핫도그 등이 유행합니다. 모든 음식을 환영한 건 아니다. 미군 철수 2년 뒤인 1975년 러시아 흑빵 등이 전해졌으나, 서민 입맛에 맞지 않아 널리 퍼지지 못했다고 합니다.
책 지향점은 “세계 각국 사람들이 중국요리에 담아온 저마다의 생각을 읽어내고 이를 하나의 역사 이야기로 풀어내어 전하는 것”입니다. 책은 중국요리가 어떻게 세계로 퍼져나갔는지, 각국 식문화를 어떻게 바꿔놓았는지 좇아갑니다. 전파 이유를 두고 저자는 일본 문화 인류학자 이시게 나오미치의 말을 인용합니다.
유럽의 음식이나 식사법은 이른바 근대에서의 세계의 서구화라는 정치, 경제, 군사적 배경에 기대어 진출했다. 이에 비해 중국의 경우는 국가권력 같은 것과는 무관하게 현지의 민중으로부터 맛있고 실질적인 식사라는 평가를 받아서 중국요리점이 전 세계에서 영업하게 되었다. 이는 중국의 음식 전통이 얼마나 뛰어난 것인지 말해준다.
저자는 중화제국 영역 확대나 주변 민족의 한화(漢化) 때가 아니라 19~20세기 중국이 쇠퇴하고 위기를 맞은 시기 중국 식문화가 세계 각국으로 퍼져나간 점에도 주목합니다. 요리 전파의 주인공을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확실히 중국요리의 보급은 중화 제국의 영역 확대나 주변 민족의 ‘한화(漢化)’ 과정과는 궤를 달리한다. 오히려 중화 제국이 쇠퇴하고 위기를 맞은 시기에 어째서인지 중국 식문화가 세계 각국으로 퍼져나갔다는 역설을 관찰할 수 있다. 19?20세기에 세계 각국에서 이루어진 중국요리의 보급은, 18~19세기에 프랑스 요리가 외교의 장에서 공통적으로 이용되며 세계로 퍼져나간 것과는 전혀 다른 과정을 거쳤다. 그것은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가 세력을 뻗친 아시아에서 서양 요리가 수용되어간 것과는 대조적이라 할 수 있었다.(…)
중국요리가 세계로 퍼져나간 이야기를 하자면 그 주인공은 중국의 정부나 대기업이 아니라 개개의 ‘중국인’ ‘화인’일 것이다. 무릇 중국요리는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전에는 중국의 ‘소프트파워’였다고 말하기 어렵다. 중국요리가 다른 여러 나라로 퍼져나간 것은 주로 이민자들이 고향의 요리를 세계 각지에 전한 결과이며, 적어도 20세기 전반까지는 중화 제국의 번영이나 중국의 국민국가 건설과 직접적 관계가 있었다고 할 수 없다. 중국요리가 세계로 퍼져나간 이야기를 하자면 그 주인공은 중국의 정부나 대기업이 아니라 개개의 ‘중국인’ ‘화인’일 것이다.
저자는 중국 바깥으로 퍼져나간 중국요리의 현지화는 세 단계로 정리해 설명합니다.
첫째는 주로 화인들이 현지국에서 현지의 원재료를 사용하면서도 가능한 한 고향의 맛에 가깝게 하여 전통을 지키려고 하는, 본고장의 맛을 지향하는 중국 지방 요리(광둥, 산둥 요리 등)이다. 둘째는 현지국에서 현지화된 중국요리로, 이는 중국 본토에는 없는 중국요리이다. 일본의 싯포쿠(중국요리에 일본 요리의 수법을 가미한 나가사키 특유의 향토 요리로, 큰 그릇에 요리를 담아 식탁 가운데에 두고 각자 덜어 먹는 중국의 식사 양식을 취한다), 후차 요리(중국에서 전해진 선사의 정진 요리로 동물성 재료를 일절 쓰지 않았지만 기름을 많이 쓴 농후한 맛이 신기하다고 하여 환영받았다), 싱가포르나 말레이시아 등지의 뇨냐 요리 [피낭(페낭) 믈라카(말라카), 싱가포르 및 인도네시아에 정착해 현지 말레이인과 결혼한 초기 중국 이민자 후손의 요리. 중국 식제료를 말레이·인도네시아의 향신료와 조리법으로 조리하는 것이 특징이다], 촙수이를 비롯한 미국식 중국요리 등을 대표적 예로 들 수 있다. 셋째는 중국요리에 기초하여 만들어진 현지국의 요리이다. 예컨대 일본의 라멘이나 교자’ 한국의 짜장면’ 베트남의 퍼, 태국의 팟타이, 싱가포르의 하이난 치킨라이스, 인도네시아의 나시고렝, 페루의 로모 살타도 등이 각국의 국민 음식이 되었다.
책은 중국요리의 한국 전파도 들여다봅니다. 저자는 일본, 싱가포르와 함께 한국을 “중국요리를 주체적으로 진화시켜 자국 요리의 일부로 만든 나라”로 꼽습니다.
https://www.khan.co.kr/travel/national/article/202102172138005
저자가 “흥미롭다”며 주목한 게 있습니다. 바로 일제강점기 조선 민족운동가나 반식민지 활동가 등이 중국요리점을 자주 찾은 것이죠. “중국요리점은 일본 요정보다 지배자층과의 거리가 있어 거점으로 삼기 좋은 장소”였습니다. 이정희(인천대 중국학술원 교수)의 다음과 같은 연구 결과도 인용합니다. 1919년 1월 경성 시내의 전문학교 학생 대표 8명이 모여 3·1운동 참가를 결의한 곳은 당시 3대 중국요리점으로 꼽히던 ‘대관원’입니다. 그해 4월 13도 대표 23명이 모여 임시정부 수립을 위한 선포문 등을 낭독한 곳은 ‘봉춘관’입니다. 1921년 5월 이재근 등 5명의 독립운동가가 군자금을 마련하려 모였다고 체포된 곳이 ‘제일루’입니다. 1925년 4월 비밀리에 조선공산당 창당 대회가 열린 곳이 ‘아서원’이죠. 중국요리점은 아편 밀매 온상이기도 했다. 중국요리점 간판을 내걸고는 아편 밀수를 하다 적발된 사례들이 나옵니다.
저자 이와마 가즈히로는 게이오기주쿠 대학 문학부 교수입니다. 중국과 대만, 홍콩 등지 학교에서 공부했습니다. 책 작업을 위해 한국과 중국, 미국과 영국, 필리핀과 베트남 등 여러 국가도시의 중국요리점, 박물관 등을 찾았습니다. 참고문헌과 주가 73쪽에 이릅니다.
중국이나 중국요리를 찬양하는 책은 아닙니다. 일제의 학살 등도 가감 없이 적었습니다. 박정희 정권의 화인 배척과 탄압도 소개합니다. 책은 이정희의 ‘호떡의 사회사-배제와 수용의 메커니즘을 중심으로’를 보론으로 실었습니다.
저자는 마지막 장에 자기주장을 넣었습니다.
요리는 좋든 싫든 권력이나 부의 양상, 민족이나 국민에 대한 시각, 나아가서는 시대정신을 반영해왔다. 재능과 열정이 있는 요리사나 개발자, 미식가나 음식 저널리스트, 나아가 레스토랑이나 식품 관련 기업의 경영자와 종업원 등이 자국·자민족의 요리만큼이나 타국·타민족의 요리에 애정을 품었을 때 자타의 경계에 맛있는 식문화가 새롭게 싹트고는 했다. 국민 요리는 타민족의 문화에 대한 동화와 배제의 논리가 아니라 관용과 조화의 정신에 의해 성장할 때 비로소 그 가능성을 크게 펼칠 수 있을 것이다.
김종목 기자 jom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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