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프] 가방 안을 보면 그 사람이 보인다 - 지금 당신의 가방 안에는 무엇이?
오랜 시간 동안 생각해 보았던 아이디어가 있다. 오늘은 그 아이디어를 실현한 이야기이다.
어떤 사람이랑 친해지고 싶으면 요즘은 "너 MBTI 가 뭐야?"라고 묻는 것 같다. 하지만 난 늘 다른 사람들 가방 안, 장바구니 속이 궁금하다. 그게 내 맘을 언제나 사로잡았던 질문이다. 당장 오늘 당신이 집을 나서며 가방 속에 넣었던 혹은 챙길 수밖에 없었던 그 물건들을 내게 말해 준다면. 나에게는 4글자 영어 알파벳으로 표현되는 당신의 성격보다 소지품을 통해 당신을 조금 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서다. 그래서 어느덧 연재를 한 지 1년이 되어가는 이 시점에 자축의 의미로 그동안 생각했던 아이디어를 실제 실행에 옮겨보는 <기획 특집>을 3회에 거쳐 연재하려고 한다.
기획 특집을 연재하기 위해 친구들에게 몇 주 전 내 가방 안을 소개하는 사진과 함께 다음과 같은 질문을 살포했다. 프로페셔널한 내 친구는 가방 안에 뭐 들고 다니는지, 어떤 것들을 왜 샀는지 <what's in your bag> 프로젝트를 할 테니 가방 안에 들고 다니는 물건들을 본인의 소비 철학과 함께 소개해 달라고 요청했다.
물론, 간단한 익명의 자기소개와 함께 가급적 사실적인 사진도 부탁했다. 마지막으로 바쁜 친구들을 현혹하기 위해 잘 되면 독립 출판을 기획할 것이며, 우선 내가 연재하는 <사까? 마까?> 칼럼에 소개한 경우 즉각적인 리워드로 이번 회차 원고료를 1/N 분배하겠다는 공약도 걸었다. 용량은 제한이 없었고, 심층적인 이해가 필요한 경우 추가적으로 인터뷰를 진행했다.
한국과 외국에서 대학원생, 법조인, 의료인, 언론인, 통역사, 교직, IT업계, 다국적기업, 정부 기관, 중소기업, 스타트업 등 참으로 다양한 분야에서 일하는 친구들 몇몇이 답을 주었다.
인생이, 연애가, 사업이 우리 맘처럼 되질 않는다며 울고, 주식이 올랐다고, 원하던 이직에 성공했다고, 드디어 회사를 나왔다며 웃으며 정답을 도무지 알 수 없는 이 세상을 그래도 좌충우돌 살아가는 이 세대의 젊은이들! 그들의 오늘 가방 안을 살펴보았다.
그들이 가지고 다니는 것들은 유행의 최전선에 있는 아이템이기도 했고, 모두가 좋아하는 국민템도 있었으며, 때로는 요즘 세상에 누가 이런 걸 들고 다니나 하는 유물템도 있었다. 하지만 모든 소지품은 그들의 취향의 산물이자, 직업의 노하우이기도 했고, 개인의 신념이 담긴 하나의 이야기가 가방 안에 오롯이 담겨 있었다.
그들이 가방 속에 대충 던져 넣고 다닌다고 표현한 것들은, 또는 아무것도 안 가지고 다닌다며 소지하기를 거부한 물건들은 개인의 MBTI만큼이나 분명한 개인의 취향이나 성격을 반영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 이야기는 단지 내 친구들의 가방에서 시작했지만, 거창하게는 오늘날의 소비 사회를 이야기할 수 있는 담론의 시작이 될 수도 있고, 소박하게는 그저 나와 이 글을 읽는 독자 모두에게 재미있는 이야기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
친구들이 답한 이야기 중 몇몇은 오늘, 나머지는 차회에 나누어 소개하고자 한다.
1. 자수성가 IT업계 직장인 Y
그의 아이템: <이북리더기>
"누나가 쓴 글을 읽어보려고 했는데 프리미엄이더라 ㅠ" 로 시작하는 메시지를 보내온 그는 이렇게 말했다. 본인은 여기에 기여하기 어려운 사람이라고. 평소에도 가방을 비우려고, 가능하면 손에 아무것도 안 들려고 노력하는 사람이라 그렇단다. 재밌을 만한 게 하나도 없지만 그래도 하나 억지로 쓰자면 꼭 가지고 다니는 아이템은 <이북리더기>란다. 본인은 선물을 받았지만 인터넷에서 쉽게 구입이 가능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추천 이유는 평소 종이책의 손맛이 근본이라고 생각해 왔고 (그와 나는 놀랍게도 "북클럽"에서 만났다.) 지금도 그 생각이 별로 변치 않았지만, 써보니 이북리더기만의 포기할 수 없는 장점이 있다고 했다. 어디 놀러 간다고 생각했을 때, 종이책은 일단 무겁기 때문에 여행지에 가져갈 책을 혼신의 힘을 다해 딱 한 권 골라 막상 여행길 기차 안, 차 안, 지하철, 비행기에서 읽었더니 재미가 없다면!? 이북리더기는 이러한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하고, 밤에 동행자가 자더라도 스탠드 없이 책을 읽을 수 있게 한다고 했다.
(a) 특정 플랫폼에 종속되지 않는 범용기일 것
(b) 넘기기를 위한 물리 버튼이 있을 것
(c) 겨울철 겉옷 주머니에 들어갈 정도의 크기일 것
나도 이삿짐을 싸며 몇 번이나 이북리더기로의 전환을 시도했다가 실패한 사람으로서 "손맛의 중요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아는 사람"이라 공감이 많이 되었다. 또 도서 구입 플랫폼마다 고유의 이북리더기를 출시하고 있어 가끔 호환이 되지 않는 것들이 있는데, 내가 책을 여러 서점에서 가격이나 사은품을 좇아 사다 보니 맞지 않다고만 생각하다가 '범용기'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찾아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무튼, 가방 안에 아무것도 안 들고 다닌다는 사람은 그만이 아니었는데 디자이너 H씨는 그의 가방은 양극단을 달린다며, 생각해서 챙기는 것이 귀찮아서 모든 것이 다 들어 있거나, 아니면 지금 이렇게 이체를 위한 OTP와 쓰레기 밖에 없이 텅 비어 있다며 소지품의 양극화를 주장했다.
2. 재테크에 재능 없음을 깨닫고 몸값을 올린 N
그의 아이템: 귀걸이
한편, 자칭 미니멀리스트라고 주장하는 N씨는 가방 안에 없어서는 안 되는 아이템으로 <귀걸이>를 꼽았다. 주로 구입하는 곳은 인터넷 쇼핑몰이며 일주일에 한두 번은 정신없이 나가느라 귀걸이를 빼먹기가 일쑤이므로 파우치에 작은 귀걸이를 꼭 챙겨 다닌다고 한다.
그녀의 파우치만 봐서는 도대체 뭐가 미니멀리스트인지 모르겠어서 (앞의 두 사람과 비교해) 그녀의 미니멀리스트 소비 철학을 물으니, "안 사면 100% 할인"이라는 개그맨 김생민스러운 대답을 했다.
어쩌면 앞의 세 사람의 공통점은 <사는 것에서 즐거움을 찾는 것이 아니라 비우는 것에서 즐거움을 찾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직도 여러 가지 신기한 물건을 사서 직접 써보는 것이 너무나도 즐거운 사람이라, 비우는 것의 즐거움을 그들만큼 알지는 못한다.
하지만 그들을 통해 배운 점은 극단적으로 소비를 줄이는 것이 필요한 게 아니라는 점이다. 오히려 내 욕망이나 가치를 만족시키는 최적화된 아이템을 찾았다면 그 이외에는 어떤 혹하는 할인율이나 그럴듯한 광고에 현혹당하지 않는 것이다.
3.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바쁜 문화부 기자, 혜연
그의 아이템: 소형 우산, 초소형 스피커, 젤리
그녀는 신문 기자의 특성상 장시간 서서 취재하거나 현장에서 걸음을 재촉하며 이동하는 경우가 많다 보니 백팩을 메고 다니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고 했다. 이런 직업적 특성 때문에 무엇이든지 아이템에 "포터블(휴대성)" 이란 단어가 들어가면 눈길부터 한 번 주는 편이라고 본인의 취향을 밝혔다.
그녀는 요즘 같은 환절기에 필수 아이템은 <소형 우산>인데, 한 15개 즈음 잃어버리고 부러뜨리다 안착한 우산이 바로 "파라체이스"라고 했다. 대만 브랜드로 알고 있는데, 매우 휴대성이 좋으며 의외로 단단하고, 특히 핸들 부분 그립감이 좋고, 디자인 또한 예뻐 늘 백팩 옆구리에 꽂아놓고 다닌단다.
그녀가 지방에 취재 차 방문할 때에는 <Britz 초소형 포터블 스피커>를 지참한다고 한다. 손가락 한 마디 정도 되는 아주 작은 스피커인데 작은 체구와는 다르게 출력이 꽤 좋단다. 볼륨을 5 정도만 해놓고 고단한 일정 끝에 숙소에서 좋아하는 경음악을 튼 채 눈 붙이면 저절로 힐링이 되는 아이템이라고 했다. 마지막으로 절대 빠질 수 없는 아이템으로 <히치스 젤리>를 꼽았다. 당 떨어질 때를 대비해 항상 한 봉지씩 가방에 넣고 다닌단다.
4. 스타트업 대표이면서 개발자인 친구 E
그의 아이템: 백팩
그녀는 내가 알고 있는 사람 중 현재 제일 만나기가 어려운 사람이다. 그녀는 남들은 들어가지 못해 안달인 글로벌 직장을 그만두었다. 이후 본인이 개발한 서비스를 오픈하려고 고군분투 중인 스타트업 대표이다. 그녀의 가방 안이 너무 궁금해 인터뷰를 했다.
그녀는 본인이 별로 소지품이 없다면서 고민하다가, 한 아이템을 뽑자면 <백팩>이라고 했다. 그동안 수많은 백팩을 들어봤지만 <인케이스 15인치 라이트>가 제일이란다. 지금 많이 낡았는데 다시 똑같은 것을 사고 싶을 정도라고 한다. 난 사실 여행 갈 때 외에는 백팩을 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 왜 백팩을 선호하는지 물어보았다.
그녀는 옆으로 메는 건 자세에 별로 좋지 않고, 개발자들의 세계에서는 백팩이 뭔가 더 프로페셔널한 느낌이라고 했다. 수트케이스를 들고 다닐 것이 아니라면 백팩이 좋은데 본인은 여성스러워 보이는 걸 정말 배제하고 싶어 백팩을 고수한다고 했다. 사람들이 많이 메고 다니는 투미 백팩에 대해서 물으니 그건 무겁고, 15인치 노트북이 들어가지 않는다고 했다.
소비에 대해 어떠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지 물으니 남이 보는 건 중요하지 않고 항상 나의 행복이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확실히 30대가 되니 좋아하는 브랜드들이 생겼단다.
원래부터 남을 별로 의식하지 않을 수 있는 그런 사람이었냐고 물었더니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란다. 20대에는 남도 신경을 많이 썼다고 한다. 하지만 명품 브랜드들에 대한 집착은 이전 직장에서 일하며 연봉이 많아지면서 정작 많은 것을 살 수 있어지니까 집착이 줄었다고 했다. 특히 물건을 모셔야 하는 상황이 정말 싫다는 그녀는 적당히 내 스타일이면서 나에게 너무 부담되지 않는 가격의 브랜드가 좋다며 대표적으로 J crew, 산드로, 클럽 모나코, 유니클로, 무지 등의 브랜드를 꼽았다.
최근엔 어떤 소비를 할 때 행복하냐고 물었다. 최근에는 스타트업을 시작하면서 내향성 성향이 강해져서, 집에서 가볍게 혼술하며 넷플릭스를 보는 시간이 너무 소중하다고 한다.
또 최근에는 좋은 향기에도 관심이 생겼단다. <바이레도 바디로션>을 선물 받았는데 너무 마음에 드는 향이었단다. 하지만 도저히 같은 것을 다시 못 사겠어서 유사 저렴이 브랜드를 샀는데 같은 향이었다며 즐거워했다. 스타트업을 시작했더니 아무 생각 없이 타던 택시비도 아까워졌다고 한 그녀에게 하나도 아깝지 않은 소비를 물었다. 그녀는 "소중한 사람들과 좋은 대화를 하며 먹고 싶은 것을 먹고 마시는 데 쓰는 돈은 아깝지 않다"고 했다.
먹고 마시는데 쓰는 돈이 아깝지 않다고 하는 얘기를 들으니, 또 다른 친구 회사원 C가 생각났다.
(남은 이야기는 스프에서)
심영구 기자 so5what@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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