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초연만 세 곡, 역사의 현장에 서다’ 유시연의 테마콘서트XVII [양형모의 일일공프로젝트]

양형모 기자 2023. 10. 15.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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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가 연주인 사람이 있고, 연주가 연구인 사람이 있다. 분명한 것은 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교육자가 모두 연구자는 아니듯 모든 연주자가 연구자인 것도 아니라는 것. 연구와 연주의 비중은 개인에 따라 다르겠지만, 적어도 프로페셔널 연주자라면 어느 한쪽만 쥐고 있지는 않다.

10월 6일 유시연 숙명여대 교수의 열 일곱 번째 테마콘서트가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IBK챔버홀에서 있었다. 이날의 콘서트는 ‘유시연의 테마콘서트XVII - 한국의 얼’이란 타이틀을 내걸었고, ‘20주년 기념음악회’라고 소개되었다.

유시연 교수의 테마콘서트는 클래식 음악팬이라면 눈과 귀에 익숙한 시리즈다. 이 시리즈는 한일월드컵이 열리던 2002년 피아졸라의 탱고곡들을 선보이며 시작됐다. 정통 클래식 바이올리니스트가 자신의 이름을 내건 독주회의 프로그램을 탱고곡들로 채운 것은 당시만 해도 상당한 파격이었다. 그것도 대학 강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님’의 연주회. 심지어 연주자는 “이와 같은 연주회는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며 ‘시리즈’로 못 박아버렸다. 테마시리즈의 시작에 대해 유 교수는 “클래식 음악이 얼마나 재미있고, 왜 좋은지(Why Classic?)를 대중에 소개하고 싶어 테마시리즈를 기획했다”고 밝힌 바 있다.

이후 유시연 교수는 음악팬, 관객뿐만 아니라 자신과의 약속도 지켰다. ‘Sonata Abend’, ‘Fantasia’, ‘Concerto Angelico’, ‘After Mozart’, ‘Folk Tunes’, ‘회상’, ‘Trio de Seoul’, ‘Scent of Jazz’, ‘슈만의 거실에서’…. 각 연주회마다 제각기 다른 테마를 입힌 시리즈 콘서트를 무대에 올려 왔다. 클래식 작곡가를 조명할 때도 있었고 나라, 도시의 음악을 파고들 때도 있었다. 탱고, 포크, 재즈 등 클래식 외의 장르를 테마로 삼기도 했다.

이전에도 쓴 바 있듯, 유시연 교수의 테마콘서트는 단순히 ‘독주회’, ‘리사이틀’, ‘연주회’만으로 규정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각 자리는 뛰어난 연주자로서의 연주회이자 치열하고 집요한 연구 끝에 거둔 학구적 성과에 대한, 연구자로서 공식적인 공개의 자리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유 교수의 연구적 성과를 이야기할 때 ‘국악’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일찌감치 자신의 바이올린에 국악을 이식하는 데에 관심을 갖고 학구적인 접근을 시도한 사람이다. 클래식과 국악의 접목에 관한 연구는 다수 이루어진 바 있지만, 유 교수는 그 중에서도 연주의 기법에 집중했다. 그는 이미 15년 전 오랜 연구와 각고의 연습 끝에 농현, 시김새 등 국악 특유의 연주기법과 소리를 자신의 바이올린에 이식하고 융합해 음악계를 놀라게 했다. 그가 바이올린으로 ‘아리랑’을 최초 연주했을 때의 반응은 고요함, 적막 이후의 굉음을 동반한 폭발로 그것은 핵폭탄이 터질 때와 유사한 것이었다.

이날의 20주년 테마콘서트 ‘한국의 얼’은 유시연 교수가 맺은 국악과 관련되어진 학문적 성과를 공개하는 세미나의 장이자 무려 세 곡의 작품이 세계 초연된 역사적 현장이었다. 유 교수는 ‘보허자(양준호 편곡)’, 김한기의 ‘바이올린 소나타 2번 옹헤야’, ‘풍년가(안은경 편곡)’, ‘도라지(홍승기 편곡)’, ‘아리랑(양준호 편곡)’, ‘달의 눈물-한오백년을 주제로(김경아 편곡)’, 이신우의 ‘바이올린 판타지 3번 - Mother Earth’를 연주했다. 이 중에서 김한기 작곡의 바이올린 소나타 2번, 홍승기 편곡의 도라지, 연주회의 피날레를 장식한 이신우 작곡의 바이올린 판타지 3번 Mother Earth가 세계 초연이었다. 의미 있는 독주회에서 헌정된 곡을 초연하는 경우는 종종 볼 수 있지만 한 연주회에서 세 곡이 초연된 것은 다른 뜻에서의 ‘초연’일지 모른다.

연주회는 유시연 교수의 목소리로 사전 녹음된 곡에 대한 해설이 스피커를 통해 나오고 연주가 이어지는 식으로 진행됐다. 문정재(피아노), 류근화(대금), 김태정(장구)이 류시연의 연주를 호위했다.

궁중 연례악인 ‘보허자’를 첫 곡으로 선택했다. 원곡은 웅장한 국악 관악합주곡인데 이를 양준호가 바이올린과 대금의 앙상블로 편곡했다. 양준호는 놀랍게도 클래식이 아닌 재즈 피아니스트로, 그는 유시연 교수의 시그니처 곡이 된 ‘아리랑’의 편곡자이기도 하다.

‘풍년가’는 전래민요를 피리 연주가 안은경이 ‘피리와 태평소’를 위해 편곡한 곡이다. 유시연 교수는 안은경의 음반 ‘Purity. 2nd’를 레퍼런스로 연구했다고 밝혔다. 유 교수가 안은경의 피리연주를 레퍼런스로 채택한 것은 매우 흥미롭다. 왜냐 하면 그가 ‘아리랑’의 연주 레퍼런스로 연구했던 것 역시 피리 연주가 김경아의 음반 ‘연정’이었기 때문이다.

국악의 연주기법을 클래식 현악기 연주에 응용, 활용하는 작업을 시도하는 경우 동종 혹은 유사종의 악기를 참조하는 것이 일반적일 것이다. 바이올린이라면 국악기 중 같은 찰현악기에 속하는 아쟁이나 해금이 유력해 보인다. 하지만 유시연 교수는 관악기인 피리를 선택했고, 피리의 고유하고 독특한 연주기법을 자신의 바이올린으로 가져왔다. 집중해서 들어오니 과연 이날 연주에서 그의 바이올린은 자주 대금, 피리처럼 웃고 울었다.

● 관객과 함께 울어준 아리랑과 한오백년

2부를 연 ‘도라지’는 꽤 도회적인 도라지. 도라지 타령의 주제를 갖고 있지만 움켜쥐지 않아 손가락 사이로 모래처럼 스르르 쏟아져 나온다. 덕분에 이날의 ‘도라지’는 색채감이 도드라졌고, 세련된 느낌의 도라지로 재탄생하게 됐다. 홍승기 숙명여대 작곡과 교수의 솜씨다.

김경아 작곡의 ‘달의 눈물-한오백년’은 ‘아리랑’과 함께 이날 연주회의 하이라이트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테마인 ‘한국의 얼’을 고산 등반에 비유한다면 ‘한’은 정상을 200m 앞둔 자의 정서를 대변한다. 허벅지의 근육이 터질 듯 팽창하고, 숨이 턱턱 막힌다. 목이 타는 것 같다. 외롭고 두렵고, 무엇보다 원망스럽다. 유시연 교수의 말을 들어보자.

“흔히 우리 민족을 ‘한이 많은 민족’이라고 이야기하는데, 한국의 민요는 다른 민족의 민요에 비해 슬픈 곡조가 많습니다. 서양의 민요들이 사람들을 응원해 주고 즐겁게 해 주는 반면, 한국의 민요는 우리와 함께 울어줍니다. 물론 억압과 핍박의 역사를 가졌기에 우리 스스로가 그렇게 인정하고 있지만, 그 내면에는 ‘우리의 한을 들어달라. 공감해 달라, 함께 울어달라’는 메시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유 교수와 이 곡의 작곡자인 김경아 서울대 국악과 교수가 의도했다면, 그 의도는 성공적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달의 눈물-한오백년’에서 유시연 교수의 바이올린은 한을 토하듯 쏟아내며 객석의 슬픔에 동화되었다. 누구도 말하지 않았지만, 말이 없어 이해되지 못할 것이 없었다. 이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의 슬픔과 사연은 제각각이었겠지만, 이 제각각의 것들을 연주자가 내민 커다란 함 속에 넣어두고는 한결 밝은 얼굴들이 되었다.

바이올린이 먼저 울자 객석의 어깨가 크게 들썩였다. 무대 위에는 눈물이 질펀했다. 한바탕 울고 나니 그제서야 후련해졌다. 가슴 한 가운데에 구멍이 난 것 같다.

그리고 구멍으로 바람이 들어왔다. 바람은 우주의 공허함에 이어 대지를 찢어 발기는 듯한 거대한 말발굽 소리가 되어 공연장을 쾅쾅 울렸다. 마침내 이날 연주회의 최종장. ‘Mother Earth’가 시작된 것이다. 이신우 서울대 작곡과 교수는 이 곡을 바이올린, 피아노, 대금, 장구(정주)를 위한 대곡으로 완성했다. 애초부터 이번 테마콘서트의 테마 ‘한국의 얼’과 유시연 교수가 완성해 낸 국악적 질감과 빛깔을 염두에 두고 작곡했다고 한다.

곡 안에서 바이올린은 수 차례 옷을 갈아입는다. 고대 신화 속 여사제에서 소박한 아낙으로, 현대의 음악가로. 마침내 모든 여정을 마친 뒤 마주하게 되는 것은 고요와 신비 속, 상처 받은 모든 것을 감싸 안은 무한한 사랑. 어머니 대지이다.

이날 유시연 교수가 마련한 20주년 테마콘서트는 한국 클래식 음악사에 분명히 새겨놓아야 할, 역사적이고 의미있는 자리였다고 확신한다. 그 역사적 시간이 만들어낸 빛의 웅덩이 한 가운데에 앉아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뛴다. 실컷 속으로 울고 돌아왔다. ‘Mother Earth’의 끝에 울린, 크고 강렬하고 힘이 찼던, 영원히 그치지 않을 것만 같았던 ‘한 발의’ 종소리처럼. 연주의 여운이 참 길고, 지독하다.

양형모 기자 hmyang030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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