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람·유대·기독교 ‘공동 성지’ 알아크사에서 참극 씨앗이

조일준 2023. 10. 15.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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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라엘-하마스 전쟁][한겨레S] 이슈 _ 알아크사와 통곡의 벽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뿌리 깊은 갈등이 또다시 전면전으로 치닫고 있다. 이번엔 팔레스타인 가자지구를 통치하는 무장정파 하마스의 기습 공격이 불을 댕겼다. 유대교 안식일이자 토요일이었던 지난 7일 아침(현지시각), 하마스는 이스라엘의 주요 도시들에 수천발의 로켓탄을 한꺼번에 퍼붓고 무장대원들을 침투시켜 민간인들을 살해하고 납치했다. 이스라엘이 “하마스의 궤멸”을 공언하고 대대적인 반격에 나서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확대되고 있다. 제노사이드에 버금가는 무차별 인명 살상 우려마저 나온다.

하마스는 이번 군사작전을 ‘알아크사의 홍수’라고 명명했다. 알아크사(Al-Aqsa)는 동예루살렘에 있는 이슬람 사원을 가리킨다. 예루살렘은 기독교·유대교·이슬람교 등 뿌리가 같은 3대 계시종교 공동의 성지이다. 이스라엘과 아랍·이슬람권 양쪽은 역사적 사실과 기록을 근거로 서로 자신의 영유권을 주장한다. 그중에도 유서 깊은 옛 시가지인 동예루살렘이 핵심 지역이다. 1947년 유엔 결의로 유대인이 팔레스타인 땅 일부를 분할받고 이듬해 신생 독립국 이스라엘을 건국할 당시, 예루살렘은 국제 관리지역으로 설정됐다. 그러나 제1차 중동전쟁 이후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이 점령한 서예루살렘과 요르단이 점령한 동예루살렘으로 나뉘었다. 이어 1967년 제3차 중동전쟁(6일 전쟁)에서 이스라엘이 동예루살렘을 점령한 뒤 지금까지 실효적 지배를 하고 있다. 앞서 제1차 세계대전 승전국인 영국과 프랑스가 오스만튀르크 제국의 영토를 차지하기 전까지 1천년 이상 아랍·이슬람이 지배하던 땅의 통치 세력이 바뀐 것이다.

유대인의 좌절과 이슬람의 발원

이스라엘 예루살렘의 옛 시가지를 둘러싼 성전산 성곽의 서쪽 옹벽을 가리키는 ‘통곡의 벽’ 전경. 위키미디어 코먼스

고대 성벽으로 둘러싸인 동예루살렘에는 이슬람교의 알아크사 사원과 바위돔(황금돔) 사원, 유대인 수난사의 상징적 장소인 ‘통곡의 벽’이 모여 있는 언덕이 있다. 이스라엘이 ‘성전산’(Temple Mount), 이슬람이 ‘하람 알샤리프’(거룩한 장소)라고 부르는 곳이다. 그 주변에는 2천년 전 예수가 십자가 처형을 당한 뒤 주검이 묻혔다는 자리에 세워진 기독교 성묘교회도 있다.

구약성경 창세기에는 유대인의 유일신 야훼(하느님)가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는 대목이 나온다. “사랑하는 네 외아들 이삭을 데리고 모리야 땅으로 가거라. 거기에서 내가 일러주는 산에 올라가 그를 번제물로 나에게 바쳐라.” 아브라함이 아들을 죽이려는 순간 천사의 목소리가 말렸다고 전해진다. 이런 전승은 이슬람 경전 코란에도 나온다. 다만, 제물로 바치려던 아들의 이름이 직접 언급되진 않는다. 이슬람 학자들은 아브라함이 장남이자 이삭의 이복형 이스마일을 제물로 바치려 했다고 해석한다. 또 이슬람교를 창시한 예언자 무함마드가 이스마일의 후손이라고 본다.

성경에 기록된 모리야의 산이 바로 ‘성전산’이다. 이스라엘이 이 언덕을 성전산으로 지칭한 데는 역사적 배경이 있다. 이곳은 이스라엘 왕국 시절이던 기원전 10세기 솔로몬왕이 지었으나 바빌로니아 제국에 정복당하면서 파괴됐다는 첫번째 성전이 있던 자리다. 기원전 5세기에 유대민족 지도자 스룹바벨이 바빌론에 끌려갔던 포로민들과 함께 풀려나 귀환한 뒤 재건(제2성전)했다. 이어 기원전 2세기에 헤롯왕이 보수·증축했으나 서기 70년 로마 제국이 유대인 반란을 진압한 뒤 파괴했다는 유적지다. 민족 정체성의 구심 같은 곳이다. 반면 이슬람은 이 언덕을 ‘하람 알샤리프’, 즉 거룩한 성지로 여긴다. 7세기 이슬람교를 창시한 예언자 무함마드가 바로 이곳 바위에서 승천했다는 믿음에서다. 8세기에는 그곳에 바위돔 사원과 알아크사 사원을 잇달아 세웠다. 바위돔 사원은 둥근 돔의 겉면을 5천개(약 80㎏)의 금박 조각으로 장식해 황금돔 사원으로도 불린다.

통곡의 벽은 성전산 성곽의 서쪽 옹벽을 가리킨다. 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받아들인 뒤 약 300년 동안, 유대인은 성전 몰락에 대한 애도일을 빼고는 예루살렘 출입이 금지됐다. 유대인들이 애도일에 옹벽 앞에 모여 기도하며 울던 관습에서 ‘통곡의 벽’이란 명칭이 생겨났다. 이스라엘 유대인은 1967년 3차 중동전쟁으로 동예루살렘을 점령한 이후에야 성전산을 드나들 수 있게 됐다. 그러나 이스라엘과 요르단의 휴전 합의에 따라, 무슬림은 성전산 경내에서 기도와 예배를 할 수 있지만 유대교도는 통곡의 벽 밖에서만 허용됐다.

예수가 처형 뒤 사흘 만에 부활하기 전까지 주검이 묻혔다는 곳에 세워진 ‘성묘(거룩한 무덤)교회’는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313년 기독교를 공인한 뒤 창건됐다. 지금은 로마 가톨릭, 그리스 정교회, 아르메니아 정교회, 시리아 정교회, 에티오피아 정교회, 콥트교 등 기독교 주요 종파들이 구역을 나눠 관리한다. 오늘날 세계 기독교도들이 가장 많이 찾는 순례지 ‘비아 돌로로사’(십자가 고난의 길)의 종착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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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타냐후의 재집권 전략이 결국…

2022년 5월 이스라엘 동예루살렘의 알아크사 사원에서 팔레스타인 주민들이 한 달 전 이스라엘 경찰과의 충돌로 숨진 청년의 장례식을 하며 항위 시위를 하고 있다. 예루살렘/EPA 연합뉴스

이스라엘의 극우 시오니스트들은 이슬람 쪽과의 성전산 합의를 빈번히 의도적으로 무시하면서 이슬람권을 자극했다. 2000년 9월에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평화협상을 반대한 아리엘 샤론 전 국방장관이 이슬람 성지인 알아크사 사원을 무장 군인들과 함께 기습 방문해 팔레스타인과 아랍계의 격렬한 반발을 불렀다. 사태가 악화하면서 급기야 제2차 인티파다(민중봉기)로 이어졌다.

특히 최근 들어서는 유대인이 출애굽(이집트 탈출)을 기념하는 유월절과 무슬림의 라마단이 겹치는 4월마다 알아크사에서 이스라엘 유대교도와 팔레스타인 무슬림 사이에 무력 충돌이 더 거칠어지고 있었다. 이스라엘의 베냐민 네타냐후 총리가 집권을 위해 강경파 유대교 정당을 끌어들인 연립정권이 극우 민족주의 행보를 이어가는 분위기 때문이었다. 이에 편승한 유대인 불법 정착민들이 성전산(하람 알샤리프) 경내에서까지 기도하고 유대교 경전 토라를 읽거나, 이슬람교 기도 시간을 알리는 스피커 전선을 끊는 등 도발적 행동이 팔레스타인 쪽을 자극했다. 이스라엘 군경은 치안을 이유로 팔레스타인 무슬림의 알아크사 출입을 막기도 했다. 아랍계 주민의 격렬한 항의와 이를 진압하려는 이스라엘 쪽의 대립은 끝내 무력 충돌로 이어지기 일쑤였다.

올해 4월에도 이스라엘은 “폭동 대응”을 구실로 알아크사 사원에 경찰력을 투입해 예배 중이던 팔레스타인 주민들에게 섬광탄을 던진 뒤 체포하거나 마구 때리고 쫓아냈다는 외신 보도가 잇따랐다. 팔레스타인에 대한 이스라엘의 차별과 폭압, 그에 대한 아랍계의 깊은 원한과 반발은 끝내 다시 전면적 무력 충돌을 불렀다.

조일준 선임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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