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 디자이너의 개가 그림작가의 개를 물었다 [반려인의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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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는 그림작가다.
서울 살면서 제주도에 자주 드나들다가 몇 해 전 서귀포 시골 마을로 이주해왔다.
몇 해 전엔 그가 쓴 에세이를 엮어 책을 냈는데 내가 거기 추천사도 썼다.
몇 해 전 개와 산책하다 우연히 그의 가게를 마주친 후로 아름다운 경관에 반해 자주 그 근처로 산책을 다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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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는 그림작가다. 서울 살면서 제주도에 자주 드나들다가 몇 해 전 서귀포 시골 마을로 이주해왔다. 그를 사적으로 알기 전부터 나는 소박하고 다정하면서도 절제된 그의 그림을 좋아했다. 그가 제작한 달력을 사서 책상 위에 놓았고 해가 바뀐 뒤에는 달력의 그림을 잘라 책상 옆 창문에 붙여두었다. 좋아하는 그림이 여러 장이라 이걸 붙일까 저걸 붙일까 고민하다가 제일 다정한 그림으로 골라 붙였다. 몇 해 전엔 그가 쓴 에세이를 엮어 책을 냈는데 내가 거기 추천사도 썼다.
반려인은 자신을 닮은 반려견을 만나게 되는 것일까, 아니면 반려인과 반려견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닮아가는 것일까? K에겐 꼭 자신처럼 예민하고 점잖은 반려견이 있는데 유기견 보호소 출신이라 정확한 나이를 알지 못하지만, 이제 슬슬 노년에 접어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내가 개를 떠나보냈을 때 K가 나를 염려한 것처럼, 언젠가 K가 반려견과 이별할 날을 나 역시 걱정한다. 내가 그럭저럭 버티고 있는 것처럼, 그때가 되면 K도 어떻게든 살아가겠지만 말이다.
B는 헤어 디자이너인데, 우리 집이 가까운 바닷가에서 아주 근사한 미용실을 몇 년간 운영하다가 얼마 전 서울로 돌아갔다. 몇 해 전 개와 산책하다 우연히 그의 가게를 마주친 후로 아름다운 경관에 반해 자주 그 근처로 산책을 다녔다. B가 추구하는 헤어스타일은 조금 낯설고 매우 세련된 것이어서, 나로서는 과연 이 시골에서 그래도 괜찮은 일인지 종종 어리둥절한 기분에 사로잡히곤 했다. 그가 여기 있는 동안 이런저런 인연으로 나 역시 그에게 머리를 맡겼는데, 시골 아저씨로서는 도무지 너무 과분한 일이라 매번 부끄러운 마음을 떨치기 어려웠다.
해 질 무렵이면 동네 공원이나 산책로에서 커다란 반려견들에게 반쯤 끌려다니듯 산책 중인 B와 마주치곤 했다. 셋 모두 구조된 유기견 출신이었다. 자신의 개들을 산책시키는 일만으로도 힘에 부쳤을 B는 때때로 내가 구조해서 임시 보호하는 개의 산책을 자청하기도 했다. B가 선뜻 내준 큼직한 사료 한 포대를 우리 집 임보견 달리가 하도 맛있게 먹어서 나중에 더 사려고 알아보았다가, 가격을 보고 놀라 다시는 먹이지 못한 일도 있었다(달리 미안).
사고가 있었다. 양쪽 모두의 친구인 J가 B의 미용실 정원에서 결혼식을 올리던 날이었다. B의 개가 K의 개를 물었다. 애초 계획대로였다면 두 개는 서로 만날 일이 없었을 터였다. B의 개는 2층 미용실 방 안에 있었고, K의 개는 정원에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결혼식이었고,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었고, 일은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K의 개는 몸과 마음을 다쳤다. 한창 훈련사로부터 교육을 받는 중이던 자신의 개가 다른 개를 물자 B는 크게 실망했다. 일어난 일은 일이고 서로 잘 수습해서 마무리되었으면 좋았겠지만 그 또한 잘되지 않았다. 양쪽 모두 크게 감정이 상했고, 상대방에 대한 증오와 분노를 끌어안은 채 그저 시간이 흘렀다. 나는 사고 현장을 직접 보지는 못했고, 일이 벌어진 후 양쪽의 이야기를 각각 들었을 뿐이었다.
내가 둘을 화해시킬 수 있었을까? 서로에 대한 가시 돋친 말을 들을 때 그들이 내게 베풀었던 호의와 다정한 미소가 떠올랐다. 좋은 사람과 좋은 사람 사이에서도 나쁜 일이 생기는 게 세상이겠지만, 그 이음새에 무엇이 있었는지, 그걸 달리 바꿀 수는 없었는지 자꾸만 맴도는 미련을 떨치기 어렵다.
정우열 (만화가·일러스트레이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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