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정 능력 상실한 日 사회… ‘자니스 사태’ 은폐·방치했다 [세계는 지금]
자니스 창업자, 연습생 수십년간 성폭행
지난 3월 BBC 다큐로 범행 실태 드러나
기업들은 소속 연예인과 광고 계약 중단
자니스도 사명 바꾸고 사태 수습 안간힘
기타가와 범죄 2004년 법원 판결로 인정
“피해 막을 기회 있었는데… 정화능력 잃어”
2019년 죽기 전까지 아무런 처벌 안 받아
日 사회 이미 아는 사실 뒤늦게 흥분·분노
눈감았던 기업·언론 일그러진 유착 비난
“자니 기타가와의 흔적을 이 세상에서 일절 사라지게 할 것입니다.”
지난 3일 일본 도쿄에서 열린 기자회견에 보낸 후지시마 주리 게이코 자니스 사무소 전 대표의 편지 내용 중 일부다. 실제로 이런 작업이 진행 중이다.
일본 연예계의 ‘제국’으로 군림했던 자니스의 이름이 ‘스마일-업’(SMILE-UP)으로 바뀌고 TV, 광고 등에서 소속 연예인들에 대한 사실상의 퇴출작업이 진행 중이다.
그는 자니스에 소속된 10대 남자 연예인 지망생 수백 명을 대상으로 수십 년간 성폭행을 일삼은 것으로 드러났다. 범죄는 방치되고, 은폐됐다.
충격적인 사실은 공공연한 비밀이었던 이런 사실을 일본 사회가 방관하다시피 했고, 기타가와는 세상을 떠나기 전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다는 점이다. 일종의 권력자(갑·甲)의 범죄에 눈감은, 그래서 사회 자정 능력을 상실한 현대 일본의 한 단면을 보여준다는 지적도 나온다.
◆10대 소년 대상 광범위한 성범죄
‘자니스 주니어’(범행의 주 대상이 된 자니스 소속 데뷔 전 지망생·한국의 연습생)였던 한 남성이 아사히신문에 털어놓은 고백은 충격적이다.
중학교 2학년 때 자니스 주니어가 된 직후부터 그는 기타가와의 범행에 노출됐다. 기타가와는 이 남성의 몸을 씻겨주는가 하면 자는 동안엔 이불 속으로 기어들었다. 3년 정도가 지난 어느 날 그는 이 학생을 자신의 방으로 불러 구강성교를 강요했다. 거부하자 이튿날부터 없는 사람 취급을 당했고 회사를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최근 일본 언론에 적잖이 등장하는 피해사례엔 이런 일들이 드물지 않다.
◆사명 변경…기타가와 흔적 지우기
기타가와는 아라시, 한국에서도 유명한 기무라 다쿠야가 소속됐던 SMAP 등을 길러내며 자니스를 연예계 제국으로 만들었고 그만큼의 위세로 군림했다. 이런 사람이 수십 년간 추잡하기 짝이 없는 일을 벌여온 것이 확인되면서 후폭풍은 거세다.
가장 두드러진 움직임을 보이는 곳이 광고를 집행하는 기업, 연예인의 활동 무대인 방송이다. NHK에 따르면 자니스 소속 연예인을 출연시켜 광고를 해오던 기업들의 ‘탈(脫)자니스’가 잇따르고 있다. 기린홀딩스는 현재 기용하고 있는 자니스 연예인과의 광고 및 프로모션 계약을 연장하지 않기로 했다. 아사히그룹홀딩스도 4개 제품과 관련된 자니스 소속 연예인 23명을 더 쓰지 않기로 했다. 일본항공, 도쿄해상일동화재보험도 비슷한 조치를 발표했다. 방송계에서는 NHK 등 방송국들이 자니스 연예인들의 출연을 취소하거나 잠정 금지하고 있다. NHK는 “피해 구제, 재발방지책이 착실히 실행되는 것이 확인될 때까지 출연을 연기하겠다”고 지난달 발표했다.
기타가와가 벌인 추잡한 범죄에 일본 사회가 현재 보이고 있는 분노는 뜬금없어 보이는 면이 있다.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일이었음에도 방관으로 일관하다 해외 언론의 문제 제기에 반응하고 있는 꼴이기 때문이다.
본격적인 공론화 계기는 지난 3월 방영된 영국 BBC의 다큐멘터리 ‘프레데터’였다. 이 다큐멘터리는 피해자와의 인터뷰 등을 통해 기타가와의 범행 실태를 밝히고, 그것이 존재하지 않은 것처럼 취급되어 온 사회적 배경을 추적했다. 한 달여 뒤 자니스 주니어 출신인 가수 오카모토 가우안이 2012∼2016년 15∼20회의 피해를 당했다고 폭로했다. 유엔인권이사회 ‘기업과 인권’ 실무그룹이 피해자, 자니스 경영진 등을 대상으로 조사한 뒤 “소속 연예인 수백 명이 성적 착취, 학대에 휘말렸다”는 조사 결과를 지난 8월 발표하면서 파문은 일파만파로 확대됐다.
자니스와 기업, 언론의 일그러진 유착에 대한 비난도 강하다. 자니스 연예인의 높은 인기를 손쉽게 활용하려 했던 기업, 언론이 공공연한 비밀이었던 기타가와의 추악한 이면에 눈감아 버렸다는 것이다.
자니스 연예인을 기용하지 않은 광고를 해온 네슬레일본의 다카오카 고조 전 사장은 “의혹은 2020년 이전부터 방송, 광고 등의 관계자로부터 들었다”며 “소문 단계서라도 그런 상대와 거래하지 않는 게 당연하다”고 비판했다. 유엔인권이사회 실무그룹도 “일본 언론이 수십 년 동안 이 스캔들을 무마하기 위해 개입한 것으로 알려졌다”며 “정부나 피해자들과 관련된 기업들도 대책을 마련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고 짚었다.
도쿄=강구열 특파원 river910@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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