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색화 거장' 박서보 화백 별세…병마에도 붓 놓지 않은 열정(종합2보)

김경윤 2023. 10. 14. 1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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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법' 연작으로 韓 현대미술에 큰 획…"나를 비우고 수련하는 과정"
폐암에도 "한 줄이라도 더 긋고 싶다"…이름 딴 미술관 완공 끝내 못봐
고(故) 박서보 화백 [기지재단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연합뉴스) 황희경 김경윤 기자 = '묘법' 연작으로 유명한 '단색화 대가' 박서보(본명 박재홍) 화백이 14일 별세했다. 향년 92세.

1931년 경북 예천에서 태어나 홍익대 서양화과를 졸업한 박 화백은 무수히 많은 선을 긋는 '묘법'(Ecriture·描法) 연작으로 '단색화 대표 화가'로 불리며 한국 현대 추상미술 발전에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1967년 처음 시작한 묘법 작업은 어린 둘째 아들의 서툰 낙서에서 착안했다.

캔버스에 물감을 칠한 뒤 연필로 선 긋기를 반복하면서 자신을 비우고 수신(修身)하는 과정에 중점을 뒀다.

1980년대 후반부터는 한지를 풀어 물감에 갠 것을 화폭에 올리고 도구를 이용해 긋거나 밀어내는 방식으로 작업하는 후기 묘법시대를 열었고, 2000년대 들어 자연의 색을 작품에 끌어들인 유채색 작업을 하며 변화를 거듭했다.

그는 2018년 연합뉴스와 한 인터뷰에서 "변하지 않으면 추락한다"며 "내가 변화에 실패하지 않는 이유는 현재 작업을 극한까지 밀면서 (…) 다음 작업을 동시에 시도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박 화백은 이러한 작품 세계를 바탕으로 한국 현대미술에 한 획을 그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서양의 모더니즘을 받아들이되 이를 동양의 정신과 섞어 우리만의 새로운 현대미술을 만들어냈다.

그는 2010년 회고전 간담회에서 "묘법은 도(道) 닦듯이 하는 작업"이라며 "그림이란 작가의 생각을 토해내는 마당이 아니라 나를 비워내는 마당이며 묘법은 내가 나를 비우기 위해 수없이 수련하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2019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회고전 '박서보-지칠 줄 모르는 수행자' 전시 [연합뉴스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그는 1962∼1997년 모교인 홍익대에서 후학을 양성했으며 홍익대 미대 학장(1986∼1990)과 한국미술협회 이사장(1977∼1980) 등을 지냈다.

국민훈장 석류장(1984년)과 옥관문화훈장(1994), 은관문화훈장(2011), 금관문화훈장(2021) 등을 받았고 제64회 대한민국 예술원상을 받았다.

올해 8월 부산 조현화랑에서 개인전을 여는 등 최근까지 활발히 활동했다.

쉴 새 없이 작업을 이어온 그는 '권태를 모르는 위대한 노동자', '지칠 줄 모르는 수행자'라는 수식어도 얻었다.

아흔을 넘긴 나이에도 작업을 계속했던 박 화백은 올해 2월 페이스북에 폐암 3기 진단 사실을 밝히면서도 "캔버스에 한 줄이라도 더 긋고 싶다"며 작업 의지를 드러냈다.

그는 "요즘 많이 걸으며 운동하는 것은 더 오래 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좀 더 그리기 위한 것"이라며 "사는 것은 충분했는데, 아직 그리고 싶은 것들이 남았다"고 말했다.

이후 박 화백은 신문지 위에 연필과 유화로 드로잉하는 새로운 작업을 시작했다고 소개하기도 했다.

후배들을 향해서는 "절대 곁눈질하지 말고, 남들이 무엇을 하는지 궁금해하지 말고, 앞만 보고 나아가라"고 당부했다.

2019년에는 후진 양성을 위한 재원을 기탁해 기지재단을 설립했다.

고(故) 박서보 화백 [기지재단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해외에서도 인정받은 박 화백은 국내외에서 수많은 개인전을 열었다. 미국 뉴욕현대미술관과 구겐하임미술관, 시카고 아트인스티튜트, 일본 도쿄도 현대미술관, 프랑스 파리 퐁피두센터, 홍콩 M+미술관 등 세계 유명 미술관이 고인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1979년 작 '묘법 NO. 10-79-83'은 2017년 5월 열린 크리스티 홍콩 경매에서 1천26만 홍콩달러, 당시 한화 기준으로 약 14억7천400만원(수수료 포함)에 거래돼 주목받았다.

2021년에는 프랑스 럭셔리 브랜드 루이비통이 한국 작가로는 처음으로 박 화백의 작품을 이용한 핸드백을 내놓았다.

단색화 열풍이 불면서 국내에서도 박 화백의 그림이 큰 인기를 끌었다.

한국미술시가감정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미술 경매에서 박 화백의 작품 낙찰 총액이 123억4천만원을 기록해 쿠사마 야요이, 이우환에 이어 3위를 차지했다.

현재 고인의 이름을 딴 미술관이 제주도에 건립 중이다.

그는 지난 3월 미술관 기공식 기자간담회에서 "커다란 미술관에 지지 않는 미술관을 만들어놓고 세상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골똘히 하고 있다"고 말했지만 끝내 완공을 보지 못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윤명숙씨와 2남 1녀가 있다. 빈소는 서울대학교병원 장례식장 1호실에 마련된다. 조문은 이날 오후 5시부터 받는다.

발인은 17일 오전 7시. 장지는 경기 성남시 분당 메모리얼파크다.

박서보 화백 '묘법 No.091226' [조현화랑 제공. 연합뉴스 자료사진. 재판매 및 DB 금지]

heeva@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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