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기'(狂氣)의 히로히토, 일격 강화론 고집하다 원폭 맞았다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kimsphoto@hanmail.net)]
지난 2010년에 작고한 하워드 진(전 보스턴대, 역사학)은 노엄 촘스키(MIT대학, 언어학)와 더불어 '미국의 양심적 지성'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반전 평화의 이론가로 활동하면서 그와 관련한 여러 권의 역작을 냈던 하워드 진은 제2차 세계대전 때에 미군 조종사로서 독일 공습에 나섰던 특이한 전력을 지녔다. 그는 미국이 아프가니스탄 침공(2001년 10월)에 이어 이라크 침공(203년 3월)을 저울질 하던 시점인 2003년 1월10일 미 공영방송 PBS와의 인터뷰에서 히로시마 원폭 피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것을 기억하세요. 폭격을 할 때는 몇 천 미터 상공에서 폭격을 합니다. 그런 높이에서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지요. 비명소리도 들리지 않아요. 피도 보이지 않고요. 팔다리가 찢어지는 것도 보이지 않습니다. 단지 목표물을 겨냥하고 있을 뿐이죠. 인간을 본 적이 없는 곳에 폭탄을 던지는 것이 현대 전쟁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임을 당할 수 있는 것이죠.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을 투하한 사람들은 그 아래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제대로 알지 못했을 겁니다. 그들은 그저 목표물을 향해 폭탄을 아래로 던졌을 뿐입니다"(출처: http://www.pbs.org/moyers/journal/archives/zinnnow_ts.html?iframe)
하워드 진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에야 드레스덴을 비롯한 독일의 도시들을 겨눈 연합군의 무차별 공습으로 수많은 민간인들이 희생당한 사실을 알고 심각하게 문제점을 생각하게 됐다고 한다. 폭격 임무를 마치고 기지로 돌아온 군인이 태연히 식당에서 햄버거를 먹으며 벽에 걸린 TV의 오락 프로를 킬킬거리며 즐길 수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하워드 진의 말처럼, 그가 고(高)고도 공습으로 고통스레 죽는 사람들을 두 눈으로 보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드레스덴 공습의 문제점에 대해선 본 연재에서 따로 다룰 예정이다).
'전략 폭격'의 이름으로 마구 뿌려진 네이팜탄
지난 주 글(연재 40)에서 도쿄 대공습의 참상을 살펴봤다. 미군 B-29 폭격기들은 지상 1.5km 정도로 저(低)고도로 비행하면서 네이팜탄을 쏟아 부었다. 불에 타 죽은 민간인 숫자만도 그 무렵 도쿄에 머물던 조선인 1만을 포함한 10만에 이르렀다. 일본군의 진주만 공습을 보복한다는 생각으로 폭격에 나섰던 미군 장병들은 (나중에 훈증 소독을 해야 했을 정도로 사람의 살이 타는 냄새가 밴 채) 마리아나 제도의 기지로 돌아오면서 정신적 충격과 혼란을 느꼈을 것이다.
적국의 주요 도시들을 공격한 르메이의 이른바 '전략 폭격'(strategic bombing)은 민간인 대량 살상이라는 전쟁범죄를 저질렀다는 지적을 받는다. 6.25 한국전쟁 때 르메이는 전략폭격집단(SAC) 총사령관으로서 네이팜탄을 쏟아 부었고, 미 공군참모총장으로 있던 1960년대엔 북베트남 공습안을 내놓았다. 일본, 한반도, 베트남, 캄보디아 등 아시아 지역의 숱한 민간인 생명을 앗아간 네이팜탄을 르메이만큼 애용했던 이는 없었을 듯하다.
1965년 공군대장에서 퇴역한 뒤 르메이의 말년은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는다. 1960년대 앨라배마 주지사 조지 월러스는 흑인 학생들의 대학교 입학을 막는 등 흑백 차별 인종주의자로 악명 높았다. 월러스가 1968년 미 대선에서 제3당인 독립당 대통령 후보로 나섰을 때, 그와 손잡은 부통령 후보가 바로 르메이였다. 이 둘은 선거유세에서 공습을 포함한 미국의 베트남전 개입 확대를 열렬히 주장했다. 그 선거 패배 뒤 미국인들에겐 잊혀진 존재가 됐지만, 아직도 적지 않은 아시아 사람들에게 르메이는 '전범자의 이미지'로 기억되고 있다.
일본의 긴 전범 기록 떠올리면...
지난 주 도쿄 공습에 관한 글과 관련, 한 독자분이 메일을 보내주셨다. 요점은 진주만공습을 비롯해 일본인들이 아시아·태평양전쟁에서 저질렀던 전쟁범죄의 기록들을 떠올려보면, △도쿄 공습은 당연한 응징으로 봐야 하며, △일본 민간인들의 피해를 강조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아 보인다는 지적이었다. 일제의 침략전쟁으로 죽거나 몸과 마음의 상처를 입었던 숱한 희생자들을 떠올리면, 고개가 끄덕여진다.
아시아·태평양전쟁 기간 중에 일본은 △중국 도시들을 마구 폭격해 민간인들의 생명과 재산에 해를 끼쳤고 △진주만을 기습 공격했고 △세균전 부대인 일본군 731부대는 우리 독립군 포로 등을 생체실험으로 희생시켰고 △'위안부' 성노예를 비롯해 200만 명이 넘는 한국인들을 강제 동원함으로써 그 가운데 21만~22만 명쯤이 죽었다(본 연재 12 참조). 이 길고 긴 전쟁범죄 기록을 떠올리면, '일본인들은 도쿄 공습이나 원자폭탄을 맞아도 싸다'는 말까지 나오기 마련이다.
도쿄 공습이나 원폭 투하를 놓고 일본인들이 미국을 탓하지만, 그들은 전쟁범죄로 더 많은 민간인들을 죽였다. 중일전쟁(1937-1945)에서 오죽하면 중국인들이 '삼광(三光) 작전'이란 섬뜩한 이름을 붙였을까. 죽이고(殺光), 약탈하고(搶光), 불태우는(燒光) 일본군의 야만적 전쟁범죄 행위는 지금도 중국 노년세대의 기억 속에 새겨져 있다.
무차별 공습, 일본도 많이 저질렀다
일본은 미국의 도쿄 공습에 버금가는 무차별 공습을 중국의 주요 도시에 퍼부었다. 충칭(重慶) 공습이 대표적 보기다. 장제스 국민당 정권의 임시수도였던 충칭을 겨냥, 1938년부터 1943년까지 5년 반 동안에 걸쳐 줄기차게 공습했다. 확인된 사망자만 꼽아도 23,600명, 부상자 37,700명에 이른다. 미확인 사망자 숫자는 이들보다 훨씬 많다(内藤光博,「일본의 전후보상문제와 일본 헌법의 평화주의 원리-중경 대폭격 배상청구소송에서 일본정부의 배상책임에 관해」법학논총 제37권 제2호. 2013 참조).
충칭 공습의 피해자와 유족들은 일본 정부를 상대로 2006년부터 2008년 사이에 4차에 걸쳐 집단 소송의 형태로 잇달아 사죄와 손해배상을 요구했다. 일본 하급법원은 부분적으로 일본군의 행위가 지나쳤다는 것을 인정했으나, 최고재판소(대법원)는 끝내 원고들의 요구를 뿌리쳤다. 패소 소식을 들은 중국인 희생자 유족들이 피눈물을 흘렸음은 말할 나위 없다.
충칭만이 아니다. 난징(南京)을 비롯한 중국의 주요도시들이 입은 피해 총량은 도쿄 공습의 피해보다 훨씬 컸다. 실상이 그러했는데도 일본인들의 과거사 인식 수준은 매우 낮고 거칠기까지 하다. 지난 8월15일 도쿄 야스쿠니 신사 취재를 갔다가 만났던 극우파 대원들은 도쿄공습과 원자폭탄을 입에 올리며 "우리도 전쟁 피해를 입었다"며 목청을 높였다(본 연재 34, 38 참조). 그들이 타인(이웃나라 사람들)의 고통에 대한 배려와 염치가 조금이라도 있다면, 어찌 그런 말을 내뱉을 수 있을까 싶다.
도쿄 공습과 원폭 투하는 같은 문제점
여기서 독자들의 오해를 막기 위해 짧게 덧붙인다. 도쿄 공습의 문제점을 다룬 지난 주 글은 도조 히데키를 비롯한 일본 군국주의자들을 감싸려는 것이 아니다. 요점은 공습을 한다면 군사시설물에 대한 '정밀 폭격'이어야지, 민간인 주거지를 폭격해 어린이들을 포함한 비무장 민간인들의 목숨을 앗아가는 '무차별 폭격'은 전쟁범죄라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전범국가인 일본을 잘못된 방식으로 응징한 '전승국 미국의 잘못된 전쟁행위'에 대한 비판이었다. 만에 하나 미국이 전쟁에서 패했다면, 도쿄 공습을 지휘했던 르메이 장군은 당연히 전범재판의 피고석에 서야 했을 것이다. 도쿄 극동국제군사재판이 '승자의 정치적 재판'이라는 지적을 받았던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같은 맥락에서 짚고 넘어갈 대목이 있다. 도쿄 공습의 문제점처럼, 원자폭탄 투하도 민간인에 대한 무차별 살상이라는 측면에서 비판 받아 마땅하다. 이런 문제의식은 무고한 희생자를 낳기 마련인 무차별 공습이나 원폭 사용 없이 (따라서 도쿄나 히로시마·나가사키의 비무장 민간인들을 죽이지 않고도) 일본의 항복을 이끌어낼 수는 없었는가 하는 물음으로 이어진다. 어디까지나 가설이지만, 만에 하나 일본이 전쟁에서 이겼다면, 도쿄 공습의 책임자 르메이 장군과 함께 원폭 투하의 책임을 물어 해리 트루먼 미 대통령도 전범재판의 피고석에 서야했을 것이다. 일본의 도조 히데키처럼.
이재민들의 '말 없는 분노'
지난 주 글(연재 40)에서 히로히토 일왕이 거리를 걷는 사진을 하나 실었다. 미군 공습으로 불타 무너진 도쿄 후카가와 지역을 걷는 모습이다. 도쿄 공습이 있고나서 8일 뒤(1945년 3월18일), 일본군 대원수 히로히토는 군복에다 긴 장화를 신고 공습 피해지역을 돌아봤다. 그 때 히로히토를 뒤따랐던 시종무관 요시하시 케이조가 남긴 기록을 보면, 시민들의 '말 없는 분노'를 짐작할 수 있다.
[불탄 자리를 다시 파내던 이재민들은 멍한 얼굴, 원망스러워하는 듯한 얼굴로 인사도 하지않고 폐하의 차를 배웅하고 있었다. 부모를 잃고 재산이 타버린 이재민들은 폐하를 원망하는 것인가, 아니면 허탈한 상태에서 그냥 멍하니 있는 것인가](吉橋戒三, <侍従武官として見た終戦の年の記録> 軍事史學 제2호, 1965).
공습 피해지역을 돌아보면서 히로히토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잿더미로 바뀐 거리의 모습에서 한 때 그가 외쳐댔던 '대동아 공영권'과 '대일본제국'의 붕괴를 뼛속 깊이 실감했을 것이다.
일본의 극우들은 아직도 히로히토를 현인신(現人神, 살아있는 신)이라 여긴다. 하지만 패전 뒤 전쟁범죄자로 기소되는 것을 피하려던 히로히토는 그 자신을 가리켜 '신이 아닌 사람'이라고 했다. 그도 감정을 지닌 인간이다. 미군 공습으로 자칫 죽을 수도 있겠고, 패전 뒤 '천황' 자리에서 물러나고 전범으로 처벌당할지도 몰라 잠 못 이루는 밤을 보냈을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측근들이 남긴 기록을 보면 실제로 히로히토는 자주 몸살을 앓았다.
왕궁이 폭격 받지 않은 까닭
히로히토의 주거지인 이른바 '황거'(皇居)는 8.15 항복 때까지 멀쩡했다. 미국에서는 일왕의 거처를 포격할 것인가를 두고 여러 얘기들이 있었다. 히로히토를 폭살시켜 정치무대에서 제거해버려야 마땅하다는 목소리도 컸다. 진주만 공습과 필리핀의 미군 포로 학대를 응징하라는 미국의 여론에 따른 주장이었다. 첩보당국의 판단은 달랐다. 전쟁 뒤 미 중앙정보국(CIA)으로 바뀐 전시 첩보기관인 전략사무국(OSS)은 이런 결론을 내렸다.
[일왕의 지하벙커는 공습을 충분히 견뎌낼 수 있어 그가 죽을 가능성은 없다. 전쟁 수행에 필요한 서류를 왕궁에서 이미 전부 빼냈기 때문에 폭격은 의미가 없다. 히로히토는 훗날 중요하게 쓰일 데가 있다. 왕궁 폭격은 미국의 정치적 군사적 목적에 전혀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일본인들의 전의(戰意)만 북돋을 수 있다](에드워드 베르, <히로히토 신화의 저편> 을유문화사, 2002, 400-401쪽).
여기서 '훗날 중요하게 쓰일 데가 있다'는 것은 미국이 안정적으로 일본 점령통치를 해나가는 데에 히로히토가 이용가치가 있다는 뜻이다. 8.15 항복 때까지 그는 궁내 지하 방공호에 집무실에서 측근들과 머리를 맞대고 회의에 회의를 거듭했다.
아시아의 평화는 물론 일본인 다수의 안전을 위해 가장 바람직한 출구 전략은 무엇이었을까. 하루라도 빨리 전쟁을 끝내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다. 항복까진 아니더라도, 전쟁 당사국인 미국을 상대로 조기 종전을 위한 강화 협상을 벌이는 것이 바람직했다. 히로히토가 참으로 신민(臣民)을 전쟁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했다면, '천황' 자리를 비롯한 자신의 기득권을 내려놓을 각오로 종전 협상을 벌여야 바람직했다. 하지만 히로히토는 그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았다.
고노에, "국체 지키려면 미국에 화평 청해야"
도쿄 대공습이 있기 한 달 전인 1945년 2월14일 고노에 후미마로(近衛文麿) 전 총리는 히로히토에게 '미국과의 평화교섭에 나서고 전쟁을 끝내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상주문을 올렸다. 고노에는 귀족 출신으로 총리대신을 지냈다. 진주만공습이 두 달 전인 1941년 10월, 그가 총리에서 물러나자 그 후임자가 당시 육군대신이던 도조 히데키였다. 상주문 요지는 이러했다.
[소련은 기회가 있으면 (일본과의 전쟁에) 참전할 것이다. 소련은 중국공산당과 연계하고 일본을 중국에서 쫓아내려 한다. 전쟁을 계속하면 패전을 피할 수 없으나 더 우려해야 할 사태는 국체 파괴다.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나면 국체 수호는 불가능해질 테니, 그 전에 어서 화평을 청해야 한다](허버트 빅스, <히로히토 평전> 삼인, 2010, 543쪽).
위 상주문에 나오는 '국체 파괴'란 다름 아닌 '천황제 폐지'를 뜻한다. 여기서 고노에가 일본 안에서의 공산혁명을 언급한 것은 틀렸다. 일제는 '좌익의 씨를 말렸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엄청난 사상 탄압을 해왔기에, 많은 이들이 감옥에 갇혔거나 지하로 잠복해 숨을 죽이는 상황이었다. 제1차 세계대전 뒤인 1919년 1월 카를 리프크네히트와 로자 룩셈부르크가 이끌었던 독일 스파르타쿠스단의 무장봉기 같은 일이 패전 뒤 일본에서 일어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미국에게 화평을 청하라는 고노에의 건의는 잘한 일이었다.
'일격 강화론'의 헛된 희망
고노에의 상주문을 받은 히로히토는 그 건의를 곧바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전쟁 국면을 뒤집을 일격을 미군에게 가한다'는 헛된 희망과 그럼으로써 '보다 좋은 조건으로의 강화'를 맺고 싶다는 이른바 '일격 강화론'에 미련을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히로히토의 생각을 들어보자(괄호 안의 글은 이해를 돕기 위해 보탠 것임).
[히로히토는 (고노에의 상주문보다는) 오히려 (강경론을 주장하는) 중신들 편에 기울어, "전쟁 종결은 다시 한 번 (진주만공습 같은) 전과를 올린 뒤가 아니면 좀처럼 (전쟁 종결을 위한 화평교섭을) 이야기하기 어렵다"고 했다...일본이 마지막 결전에서 승리를 거두면 (일본에 유리한 쪽으로) 강화협상의 전망이 밝아진다는 것이 히로히토의 견해였다](허버트 빅스, 544쪽).
이런 얘기가 오간 1945년 2월 무렵 일본의 상황은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다. 미군의 해상 봉쇄로 말미암아 일본은 식량이 바닥을 드러내고 전함이나 탱크를 움직일 석유도 부족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 히로히토는 마지막 결전에서의 승리를 위해선 물질적 열세를 정신력으로 극복하려는 일본의 오랜 전통을 불러일으키려 했다. 그러면서 '일격강화 뒤의 유리한 강화협상론'을 고집했다.
"그렇게 (유리한 강화협상을) 말씀하실 시기가 과연 오겠습니까. 지금 해야만 합니다. 그렇게 안 하면, 1년 뒤에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습니다"(藤田尙徳, <侍従長の回想> 中公文庫, 1987, 66-67쪽).
히로히토의 뒤에 서있던 시종장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고노에는 '선(先)일격강화, 후(後)강화교섭'을 고집하는 히로히토에게 위처럼 말한 것으로 알려진다. 고노에는 '1년 뒤'를 말했지만, 두 방의 원폭과 소련군 참전은 딱 6개월 뒤에 벌어졌다(1945년 A급 전범혐의로 붙잡히기 앞서 고노에는 청산가리를 마시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국면 뒤집으려는 히로히토의 '광기'(狂氣)
히로히토가 일본의 패망이 다가왔음을 깨닫고 유리한 조건이 아니더라도 전쟁을 끝내는 강화협상을 서두른 것은 1945년 6월21일 오키나와가 함락된 뒤였다. 그 직전까지만 해도 히로히토는 어떻게든 전세를 뒤집어 보려고 했다. 고노에는 그런 모습을 보면서 측근에게 히로히토가 '광기'(狂氣)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다고 걱정했다. 고노에의 비서였던 호소카와 요시사다가 남긴 일기에서 그때 고노에로부터 들었던 말을 옮겨본다.
"일본 육군은 점점 남은 한 사람마저 옥쇄하자고 주장할 것이다. 국체(천황제)를 고려해 볼 때 천황의 윤허 없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히로히토가) 광기로 전세를 이끄는 지금의 상황을 생각하면 아무래도 염세적으로 되지 않을 수 없다"(細川護貞, <細川日記> 中央公論社, 1978, 373-374쪽).
히로히토의 '광기'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었던 듯하다. 1943년 8월 일본군이 남태평양의 여러 섬들을 잇달아 빼앗기고 솔로몬 제도까지 미군이 공격해올 태세가 되자, 히로히토는 스기야마 하지메 육군 참모총장에게 이렇게 소리쳤다. 스기야마가 남긴 메모를 보자.
"미군에게 한방 먹이는 것이 불가능한가? 도대체 어디에서 확실한 공격을 할 것인가? 이번에는 어떻게든지 지금까지와는 달리 미국 측이 '우리가 이겼다, 우리가 이겼다'고 말하지 못하게끔 하라"(杉山元, <彬山メモ 上>, 原書房, 1967, 348-349쪽. 허버트 빅스, <히로히토 평전> 삼인, 2010, 519쪽에서 재인용).
1945년 봄 오키나와 결전을 앞둔 시점에서 일본 전시지도부는 일본 본토를 지키기 위해 '결호(決號)작전'이란 이름의 방어계획을 세웠다. 그 계획의 특징은 한 마디로 '자살 작전'이라 이름 붙여도 틀림이 없다. 미 군함을 겨냥해 자폭하는 가미가제 특공기, 미군 잠수함과 맞부딪쳐 폭발하는 인간어뢰기 등을 대량으로 만들었다. 스무 살 안팎의 젊은이들을 소모품으로 쓰고 버린다는 막장 발상이나 다름없었다(야스쿠니 신사 구내의 유슈칸 전쟁박물관에는 특공기와 인간어뢰기가 전시돼 있다. 그걸 보는 학생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소련의 협상 중재 바라보다 등 찔려
그 무렵까지만 해도 히로히토는 강화 협상을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1945년 6월 오키나와 패배는 히로히토에게 충격을 주었다. 일본군 수비대 12만 명(자료에 따라선 11만명)이 전사했고, 그곳 지역 주민 7만 명이 덩달아 희생됐다(미군 전사자는 1만 2,000명). 히로히토는 오키나와 함락을 겪으며 그가 품었던 '일격 강화론'이 헛된 꿈임을 깨달았다. 그러면서 뒤늦게 강화 협상 쪽으로 눈을 돌렸다.
미군이 오키나와를 완전히 점령한 다음날(1945년 6월22일) 열린 최고전쟁지도회의에서 히로히토는 '전쟁을 끝내기 위한 외교적 협상을 벌이길 바란다'는 뜻을 밝혔다. 히로히토의 측근인 내(內)대신 기도 고이치가 그날 남긴 일기에 적힌 히로히토의 발언 내용을 보자.
"전쟁 종결에 관해 기존 관념에 얽매이지 말고 신속하게 구체적인 연구를 수행하여 그것이 실현되도록 노력하라. 신중을 기하느라 강화를 맺을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木戶幸一, <木戶幸一 日記 下> 東京大學出版會, 1966, 1212-1213쪽. 허버트 빅스, 548쪽에서 재인용).
물론 히로히토 자신을 물론 그날 그 회의에 모였던 일본의 전시지도부 구성원들은 하나같이 '항복'을 고려하지 않았다. 히로히토가 1945년 8월에 했던 '항복' 결정은 두 방의 원자폭탄과 소련의 선전포고라는 이중의 충격을 받고 이뤄진 마지못한 결정이었다.
그러면서 히로히토는 또 다른 패착을 두었다. 미국과의 직접 강화협상이 아니라, 소련을 중개자로 한 강화협상 추진이었다. 일본은 1941년 4월 일·소중립조약을 맺고 있었다. 일종의 상호불가침 조약의 성격을 지녔지만, 상황 변화에 따라 언제든 파기될 것이라는 점을 서로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히로히토는 미국과의 강화협상을 소련이 중재해줄 것이란 헛된 희망에 매달렸다가 등을 찔린 사실이 패전 뒤 밝혀졌다.
1945년 8월8일 사토 나오타케 모스크바 주재 일본대사가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소련 외무인민위원을 만나러 갈 때는 중재안에 대한 희소식을 들을까 잔뜩 기대했다. 그러나 사토 대사를 기다리는 것은 대일 선전포고문이었다. 스탈린은 일본이 강화협상을 중재해달라고 조를 때 비밀리에 시베리아로 대병력을 보내고 있었다. 이를 두고 '스탈린이 히로히토를 갖고 놀았다'는 거친 표현까지 나왔다.
이른바 '성단'(聖斷)을 일찍 내렸더라면...
일본이 패전의 봇물을 막기는 어려웠던 상황이었지만, 히로히토는 1945년 8월 6일과 9일의 원자폭탄 두 방을 맞지 않을 기회를 여러 번 놓쳤다. 도쿄 공습을 받기 전인 1945년 2월 고노에 상주문을 받아들였거나, 또는 1945년 6월 오키나와 전투에서의 패배 뒤 '강화를 위한 외교협상'이 아닌, '항복을 위한 외교협상'에 적극 나섰다면 어땠을까. 적어도 원폭 투하로 비롯된 대량 살상은 막았을 것이란 아쉬움이 따른다.
"연합국이 원폭투하로 태평양전쟁 전체의 피해보다 더 엄청난 피해를 안겨주게 될 본토 결전을 저지한 것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었다. 역사의 선택지는 그것밖에 없었다. 일본이 원폭을 피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패배의 선택을 상주한 고노에 후미마로의 상주문이 있었다. 이를 천황이 거부한지 168일 만에 원자탄이 투하되었다."(유하영,「제2차 세계대전 이후 극동지역 전시범죄 재판 개관」동북아연구 제34권 1호, 2019에서 재인용)
위에 옮긴 말은 도쿄 극동군사재판에서 미국인 수석검사였던 조지프 키넌의 법정발언이다. 키넌은 고노에 상주문을 보기로 들면서 미국의 원폭 투하를 합리화했다.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히로히토가 고노에 상주문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오로지 한 가지 이유로 원폭 투하 결정을 내린 것은 물론 아니다. 더구나 고노에 상주문을 핑계로 원폭 투하를 합리화시킬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일본인들은 1945년 8월15일 일왕 히로히토가 '종전 조서'를 통해서 '대동아전쟁을 끝내는 성단(聖斷, 성스런 결단)을 내렸다'고 치켜세운다. 그렇다면 히로히토가 좀 더 '성단'을 일찍 내렸더라면, 또는 강화조약을 맺으려고 애를 써서 전쟁을 8.15보다 더 일찍 끝냈더라면 어땠을까. 그랬을 경우 원폭 투하도 없었을 것이고 일본 민간인들의 희생도 막았을 것이다. 히로히토의 전쟁 책임은 너무나 크다. 그런 자가 도쿄 전범재판의 피고석에 서지 않은 것은 잘못돼도 크게 잘못됐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이제 글을 매듭지어야겠다. 전쟁의 운동장이 이미 기운 상황에서 항복이든 강화든 어떤 형태로든 전쟁을 빨리 끝내지 못해 원폭 등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치렀다는 아쉬움이 크다. 아울러 우리의 경우 더 큰 아쉬움이 따른다. 좀 더 일찍 전쟁이 끝났다면, 한반도 분단도 없었을 것이 아니겠는가 하는 아쉬움이다. 물론 히로히토의 항복 선언은 원폭 때문만은 아니다. 연구자에 따라선, 소련의 대일 선전포고가 히로히토의 위기감을 극도로 부추기고 이른바 성단(聖斷)을 이끌어낸 더 큰 결정적 요인으로 꼽힌다.
일본은 잇단 전투에서의 패배와 전쟁물자 부족으로 말미암아 1945년 무렵엔 원폭 투하 없이도 무너질 수밖에 없는 벼랑 끝에 내몰려 있었다. 그럼에도 해리 트루먼 미 대통령은 여러 정치적·군사적 이유로 (이를테면, 소련이 일본과 전쟁을 벌이기 전에 항복을 받아내려고) 서둘러 핵폭탄 투하를 결정했다. 이에 대해선 다음 주에 민간인들의 큰 희생을 낳은 원폭 투하가 지닌 문제점과 함께 살펴볼 예정이다. (계속)
[김재명 국제분쟁 전문기자(kimsphot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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