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년에도 이 바람에 귀 기울인다면…” 단색화 거장의 마지막 한 줄
세계의 작가이자 한국 현대미술 거장
단색화 발전과 진화 이끈 선구자
연필로 선긋는 ‘묘법’으로 수행의 시간
한국 추상미술 발전 이끌어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캔버스에 한 줄이라도 더 긋고 싶다.”
“나이 들어 마른기침이 많아졌다 생각” 했는데, 폐암 3기 판정을 받았다. 아흔이 넘은 ‘단색화 거장’은 지난 2월 온라인으로 이 소식을 담담히 전했다. “아직 그리고 싶은게 것들이 남았다”는 노(老) 화백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다시 네모난 화면 앞에 섰다.
“하루 사이 바람의 결이 바뀌었다. 가을인가. 바닷 바위에 파도가 부딪히는 소리도 사뭇 차가워지고. 내년에도 이 바람에 귀 기울일 수 있으면 좋으련만.”
불과 3주 전, 계절의 변화를 맞으며 가을을 체감했던 박서보(본명 박재홍) 화백이 14일 오전 타계했다. 향년 92세.
1931년 경북 예천에서 태어난 고인은 ‘시대의 암흑기’에 유년시절을 보내며 굴곡진 우리 현대사 속에서 추상미술을 꽃 피웠다.
1950년 홍익대 동양화과 2기로 입학했으나, 낭만적인 캠퍼스를 그리긴 어러웠다. 입학 석 달여 만에 6.25 전쟁이 발발하며 그는 인민군에 끌려가 선무공작대에 분류돼 징집됐다.
1952년 서양화과로 전과한 후, ‘롤모델’이었던 김환기(1913~1976)가 홍대로 와 박서보의 스승이 됐다. 1955년 가을엔 김환기의 권유로 출품한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서 입선을 하기도 했다. 이 무렵 서보라는 예명도 이 시기 생겼다. 1955년 그의 동료인 맹인재(93)가 가져온 아호 두 개(수헌, 서보) 중 하나가 서보였다.
그러다 1956년, 스물다섯의 어린 나이에 그는 전람회 미술을 거부하는 ‘반(反) 국전’ 선언과 함께 기존의 가치와 질서를 부정하는 ‘현대미술 운동’을 벌였다. 당시를 떠올리던 고인은 ”별의별 낮도깨비 짓을 하고 다녔다“고 했다. 고인의 반국전 선언은 그를 1960년대 한국 미술계의 중심에 서게 한 사건이었다. 이후 1962년 홍익대 미술대 교수로 부임해 후학 양성에 힘썼고, 1986~1990년까진 미술대학장을 지냈다. 그가 ‘홍대 미대 사단’의 대부로 불린 이유다.
묘법 시리즈가 태동한 것은 1960년대였다. 무수히 많은 시행착오를 그렸다. 다섯 살이었던 둘째 아들이 글씨 연습을 하는 것을 보고 흉내낸 것이 ‘첫 묘법’이었다. 고인은 ”체념의 몸짓을 시도해본 작품“이라고 했다.
1967년 시작한 묘법 작업은 연필로 끊임없이 선을 긋는 전기 묘법시대(1967∼1989)를 열었다.
첫 묘법(Ecriture·描法) 이 세상에 나온 것은 친구 이우환의 주선으로 나가게 된 1973년 도쿄 무라마쓰 화랑에서였다.
1980년대 이후엔 ‘후기 묘법’ 시대를 알렸다. 종이 대신 한지를 풀어 물감에 갠 것을 화폭에 올린 뒤 도구를 이용해 긋거나 밀어내는 방식이었다. 2000년대 들어선 자연의 색을 작품에 끌어들인 유채색 작업까지 변화를 이어졌다.
수백, 수천 번 ‘긋기’를 반복하는 행위는 수행의 시간이었다. 끊임없이 긋고 또 그으며 그는 작가로의 예술 세계를 연마했고, 한 사람으로의 삶을 다듬었다. 고인 스스로도 ”그림 그리기는 수행이라고 생각한다“며 ”색칠과 선 긋기를 반복해 만들어낸 깊은 맛은 서양인들은 도저히 흉내낼 수 없는 것“이라고 했다.
지난 50여년간 뚝심을 가지고 이어온 고인의 ‘묘법’이 온전히 평가를 받은 것은 불과 10여년 전이었다. 2012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고인을 비롯한 이우환 정상화 하종현 등이 참여한 ‘한국의 단색화’ 전이 열리면서다. 2015년엔 제56회 베니스비엔날레의 병렬전시로 팔라초 콘타리니 폴리냑에서 연 ‘단색화’ 전을 통해 국제 무대에서 한국미술의 위상을 높였다.
한국을 넘어 세계의 작가가 됐고, 그는 ”외국에서는 나를 한국 현대미술의 아버지로 부른다“는 말을 종종 전하기도 햇다. 실없는 농이 아니었다. 이미 2014년 프랑스 페로탕의 전속 작가가 돼 개인전을 열었고, 이후 2016년 영국 대표 갤러리인 화이트큐브의 전속 작가로 개인전을 선보였다.
그의 1979년작 ‘묘법 NO. 10-79-83’은 2017년 5월 열린 크리스티 홍콩 경매에서 1천26만 홍콩달러, 당시 한화 기준으로 약 14억7400만원(수수료 포함)에 거래됐고, 이후 수많은 경매에서 현재까지 고인의 작품은 ‘베스트셀러’다. 1975년 ‘묘법 No. 37-75-76′은 지난 10월 5일 홍콩 소더비 경매에서 260만달러(약 35억원)에 팔렸다.
세계의 작가이자, 한국 미술을 대표하는 거장인 고인은 미술계의 ‘큰 어른’이었다. 2019년부턴 후진 양성을 위한 재원을 기탁해 ‘기지재단’을 설립했다. 연희동 주택가에 전시 공간을 겸해 설립한 이곳에서 자신의 화업을 정리하고, 청년 작가들을 후원하는 전시를 열었다. 기지재단을 찾는 이들에게 고인은 언제나 짱짱하고 강건한 모습을 보여줬다.
한 미술계 관계자는 “정작 30~40대 청년들은 지쳐있는데 아흔이 넘은 선생님의 체력은 지칠 줄을 몰랐다”며 “밤새도록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하고, 작품을 보여주겠다며 데리고 다니신다. 급기야 가족들이 ‘다들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셔야 하니 오늘은 그만 정리하자’고 말릴 정도였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언제 어느 곳에서나 흐트러짐도 없었다. 공식 석상에 모습을 드러낼 땐 중절모자에 위아래 색을 맞춘 양복을 차려 입었고, 두툼한 알반지로 포인트를 줬다. 젊은 세대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는 형광색 티셔츠를 멋스럽게 차려입은 모습은 힙스터 자체였다. ‘화단의 멋쟁이’라는 말로는 아쉬울 만큼 패션 감각까지 남달랐다.
현재 고인의 작업을 기록하는 일들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올해엔 박서보의 과거와 현재를 담는 다큐멘터리가 제작 중이었다. 세계적인 출판사 리졸리에선 박서보 영문판 화집도 출간됐다. 2021년엔 프랑스 럭셔리 브랜드 루이비통이 한국 작가로는 처음으로 박 화백의 작품을 이용한 핸드백을 내놓기도 했다. 그의 이름을 딴 첫 번째 미술관은 제주도 서귀포시에서 올 상반기 착공했다.
한국 화단의 거장인 그의 이름 옆엔 무수히 많은 영예들이 남았다. 국민훈장 석류장(1984년)과 옥관문화훈장(1994), 은관문화훈장(2011), 대한민국 예술원상(2019)을, 2020년 제40회 올해의 최우수예술가상(2020), 금관문화훈장(2021) 등을 받았다.
유족으로는 화가인 부인 윤명숙씨와 2남 1녀가 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이다.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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