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색조 회화 대표작가 박서보 별세…‘추상 진수’ ‘독재 부역’ 명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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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0여년간 벽지를 떠올리게 하는 단일한 색조의 추상그림(모노크롬) 창작 흐름을 이끌면서 한국 미술판을 움직여온 화단 실력자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한국적 추상회화의 진수'란 찬사와 '유신과 5공 독재의 시대상을 대변하는 몰지성적 그림'이란 비판 등 엇갈린 평가를 받은 박서보류 스타일의 단색조 회화는 2010년대 이후 국내외 미술시장에서 상품으로 재조명되면서 한국을 대표하는 현대미술사조로 부각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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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0여년간 벽지를 떠올리게 하는 단일한 색조의 추상그림(모노크롬) 창작 흐름을 이끌면서 한국 미술판을 움직여온 화단 실력자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회색조 화면에 수많은 사선을 죽죽 긋는 ‘묘법' 연작으로 세간에 알려진 단색조 그림의 대표작가 박서보씨가 14일 숙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92. 유족과 지인들은 “작가가 투병하면서도 그림 작업을 지속하다가 몸 상태가 나빠져 지난 12일 서울 은평구 성모병원에 입원했으며 14일 오전 9시34분께 영면에 들었다”고 전했다. 앞서 그는 지난 2월 자신의 페이스북에 폐암 3기 진단 사실을 처음 밝히면서 “캔버스에 한 줄이라도 더 긋고 싶다”며 화업에 계속 몰두하겠다는 뜻을 전한 바 있다.
고인은 1931년 경북 예천에서 태어나 홍익대 서양화과를 나왔다. 1950년대 대학 졸업 뒤 화실을 운영하면서 당시 ‘국전’으로 불린 대한민국미술전람회에 출품했으나 원로작가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수상작이 안배되는 실상에 환멸을 느끼고 국전에 반대하는 독립전시를 감행한 청년 작가들의 일원으로 두각을 드러냈다. 한국 추상회화 역사의 본격적인 서막으로 평가되는 2차 세계대전 전후 유럽 앵포르멜 회화에 영향받아 초창기에는 격정적인 내면 의식과 감각을 형상화한 ‘원형질’ ‘유전질’ 연작을 내놨고, 이 연작들이 화단의 관심을 모으면서 1950년대 후반~1960년대 초반 전위적 회화를 그리는 주요작가로 떠올랐다.
그는 1962년 홍익대 강사를 시작으로 1997년 퇴임 때까지 홍익대 회화과 교수를 지내면서 전위파 작가의 정체성을 벗어나 제도권 모더니즘 화단의 대표 작가로 떠올랐고 홍익대 미대 학맥의 중추인 화단의 실세 권력자로 군림했다. 팝아트와 개념미술풍 작업을 거쳐 1970년대 초중반에는 모노파 등 일본 현대회화 사조에 상당한 영향을 받아 수행적인 작업 행위의 흔적을 강조한 단색조 모노크롬 회화를 하종현, 허황, 이동엽, 권영우 등과 함께 개발해냈다. 그는 대표작이 된 ‘묘법’ 연작을 그때부터 2000년대까지 지속적으로 내놓으면서 단색조회화를 제도권 화단을 지배하는 추상사조로 정착시켰다.
‘한국적 추상회화의 진수’란 찬사와, ‘유신과 5공 독재의 시대상을 대변하는 몰지성적 그림’이란 비판 등 엇갈린 평가를 받은 박서보류 스타일의 단색조 회화는 2010년대 이후 국내외 미술시장에서 상품으로 각광받으면서 화상들이 한국을 대표하는 현대미술사조로 부각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1970년대 박정희 유신독재정권의 국가기록화 사업에 참여해 사실적인 기록화를 그렸고, 1980년 광주항쟁 당시 관변 예술단체 간부로 침묵하면서 80년대 내내 군사정권에 굴종한 이력은 큰 흠결로 남았다. 특히 올해 4~7월 열린 14회 광주비엔날레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박서보예술상’을 신설해 개막식에서 시상까지 했으나 지역 미술계와 청년 작가들이 동시대미술의 성격에 부합하지 않는 그의 작업 이력과 독재정권 부역 행위 등을 지적하며 거센 반대운동을 벌여 결국 1달여 만에 비엔날레 쪽이 상을 폐지하는 곡절을 겪기도 했다.
고인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1991년과 2019년 대형 회고전을 열었고, 60여차례의 단체전과 기획전에 참여했다. 지난 반세기 동안 국내외에서 수많은 개인전을 열었으며며 미국 뉴욕현대미술관과 구겐하임미술관, 시카고 아트인스티튜트, 일본 도쿄도 현대미술관, 프랑스 파리 퐁피두센터 등이 작품을 소장했다. 홍익대 미대 학장, 한국미술협회 이사장을 지냈고 국민훈장 석류장, 금관문화훈장, 제64회 대한민국 예술원상 등을 받았다. 2019년 작가가 세운 비영리문화재단인 기지재단은 올해 박서보재단으로 명칭을 바꾸고 지난 3월 착공한 박서보미술관 건립사업과 후배 작가 지원 사업 등을 벌이고 있다.
유족으로 부인 윤명숙씨와 아들 승조·승호씨, 딸 승숙씨가 있다. 빈소는 서울 연건동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차려졌다. 발인은 17일 오전 7시.
글·사진 노형석 기자 nu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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