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는 생각하지 마!’…저출산 프레임에서 빠져나오자[이미지의 포에버 육아]

이미지 기자 2023. 10. 14.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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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four)에버 육아’는 네 명의 자녀를 키우며 직장생활을 병행하고 있는 기자가 일상을 통해 접하는 한국의 보육 현실, 문제, 사회 이슈를 담습니다. 단순히 정보만 담는 것을 넘어 저출산 시대에 다자녀를 기르는 맞벌이 엄마로서 겪는 일화와 느끼는 생각도 공유하고자 합니다.
사진 출처 yes24 홈페이지
조지 레이코프는 미국의 유명한 인지언어학자다. 국내에서는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라는 저서로 잘 알려져 있다. 이 책의 표지에는 검은 실루엣이 그려져 있는데, 제목을 본 뒤 이 그림을 보면 누구나 코끼리를 떠올리게 된다. “코끼리는 생각하지 말래도!” 해봐야 소용없다. 코끼리를 생각하지 않으려면 이미 코끼리를 떠올릴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레이코프는 이게 언어의 ‘프레임’이라고 설명한다. 말이 인식의 틀(프레임)을 정해버린다는 것이다.

● “저출산이라는 말, 사회에 만연”

사진 출처 yes24 홈페이지
이런 언어의 프레임 사례는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레이코프는 ‘지구 온난화’라는 말이 그 부정적인 뉘앙스를 싫어하는 기업들 때문에 언제부터인가 서서히 ‘기후 변화’라는 중립적인 말로 대체됐다고 주장했다. 올 초 우리 정부가 노동 개혁의 일환으로 야심 차게 들고나왔던 근로 시간 개편안 역시 발표 직후 ‘69시간제’라는 별칭이 붙으면서 개편안 취지와 여러 순기능은 제대로 꺼내보지도 못한 채 69시간이냐 아니냐는 공방만 하다 원점 재검토에 들어갔다. 내년 22대 총선을 6개월 앞둔 가운데 정치권은 각자 프레임 주도권을 잡기 위한 전략에 골몰하고 있다.

얼마 전 국내 인구 정책에 정통한 한 전문가와 함께 식사하는 자리가 있었다. 여러 유익한 이야기가 오고 간 가운데 인구 문제와 관련한 이야기를 하던 그가 갑자기 저출산이란 단어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우리는 ‘저출산’이라는 말을 너무 많이 쓰고 있어요.”

저출산이라는 말이 너무 만연해서 오히려 인구 정책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갈수록 저출산이라는 용어에 오히려 갇힌다는 느낌이 들어요.” 이 전문가는 2006년부터 5년에 한 번 발표되고 있는, ‘저출산·고령사회 기본계획’이라 명명된 인구계획을 설계한 학자 중 한 명이다.

● 저출산의 홍수…무감해진 사람들

저출산이라는 시사 용어는 어느덧 한국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들을 수 있는 일상 용어가 됐다. 언제부터 통용되기 시작했을까. 포털사이트 네이버 뉴스에서 저출산을 검색하면 1992년 처음으로 ‘저출산력시대’라는 말이 등장한다. 하지만 1990년대까지만 해도 저출산은 ‘1년에 한두 번 검색될까 말까’한 생소한 단어였다. 그러다 2000년대 이후 그 사용량이 눈에 띄게 증가한다. 요즘 온라인에서 저출산을 검색하면 하루에도 수십 개의 새 게시물이 검색된다. 말 그대로 저출산 콘텐츠의 홍수다.

저출산 상황이 200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심각해졌으니 자연스러운 일이다. 1980년대 초반 80만 명대에서 지난해 24만9000명으로 40년 새 반의 반토막이 났다. 한 여성이 평생 낳는 아이의 수를 계산한 합계출산율은 2018년 처음 1명 미만을 기록한 이래 계속 떨어져 지난해는 0.78명을 기록했다. OECD 선진국들은 물론 합계출산율을 발표하는 나라들을 통틀어 최저 수준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저출산 뉴스가 넘치다 보니 오히려 과거보다 저출산 소식에 무덤덤해진 분위기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얼마 전 방영된 한 저출산 관련 다큐멘터리에서 미국의 교수가 한국 합계출산율 수치를 듣고 머리를 감싸 쥐며 “대한민국 완전히 망했네요”라고 놀라는 장면이 화제가 됐다(이미지의 포에버육아-‘엄마’가 사라진다…출산율 올라도 출생아 줄어드는 역설 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20230901/120967581/1 참고). 하지만 정작 한국 사람들은 발표 당시 그 정도로 충격받지 않았다. 전년부터 출산율 감소가 예고되기도 했지만, 이미 오랜 기간 출산율이 곤두박질치는 데 익숙해진 탓이 컸다.
EBS 캡처 화면
얼마 전에도 지난달 출생신고 건수가 1만7926건으로 역대 최저치를 기록했다는 발표가 있었다. 하지만 별달리 회자되지 않았다. 지인에게 이야기하니 역시나 심드렁한 반응이 돌아왔다. “계속 줄어온 거 아니야? 하루 이틀 일도 아닌데 뭘.”

● ‘저출산 경고’ 반복, 되레 체념 강화

코끼리를 상상하지 말라고 하면 되레 코끼리에 대한 온갖 의심이 머릿속을 채운다. ‘코끼리한테 무슨 문제가 있나?’ ‘왜 콕 집어 코끼리지? 혹시 사실은 진짜 코끼리인 거 아니야?’ 마찬가지로 곳곳에서 저출산을 극복해야 한다고 외치면 오히려 현재 처한 저출산 상황이 더 강하게 인식될 수 있다.

최근 며칠간 갓 입사한 젊은 기자 후배들과 만날 기회가 있었다. 20, 30대 초반인 이들 1990년대생 후배들에게서 들은 이야기는 무척 인상적이었다. “다들 저출산이라는데 ‘나는 꼭 결혼할 것’이라 말하는 친구가 있다. 특이하다고 생각했다.” “심각하다, 심각하다, 계속 듣다 보니 과연 해결 방법이 있나 의문이다. 솔직히 ‘내가 뭘 해본들 바뀌겠느냐’하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말하는 후배들에게서 이제 ‘결혼하지 않고 출산하지 않는 삶이 주류’이고, ‘그것을 쉬이 바꾸기 어렵다’는 단단한 체념이 읽혔다. 어렸을 때부터 저출산이 심해지고 있다는 우려를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온 탓이었다. 저출산을 타개하기 위해 경각심을 고취한 말들이 되레 저출산을 보편적인 상황, 바꾸기 어려운 상황으로 만들어버린 아이러니였다.

영화 ‘82년생 김지영’의 한 장면. 영화 화면 캡처
그런데 갈수록 미디어에는 ‘저출산 콘텐츠’들이 늘어간다. 결혼, 육아로 경력 단절되는 여성, 여전히 육아휴직이 어렵다는 아빠, 결혼은 지옥이라는 부부, 줄어드는 산후조리원과 어린이집, 늘어나는 사교육비로 한국 양육비 세계 1위라는 뉴스, 또 최저치라는 출생아 수 발표 등. 이런 저출산 디스토피아를 매일 접하는데 과연 누가 시대를 역행하는 용자가 될 수 있을까.

● ‘저출산’을 축출하라

한국에 앞서 합계출산율이 1명 아래로 떨어졌던 나라가 있다. 바로 이웃 나라 대만이다. 대만의 출산율은 2010년대 0.9명대로 떨어졌다. 이때 대만 정부가 취한 태도는 온 사회에 저출산 ‘적색경보’를 울리는 게 아니라 대책은 마련하되 ‘출산에 대한 과도한 관심은 끄는 것’이었다고 한다. 이후 대만의 출산율은 소폭이나마 반등해 다시 1명대로 돌아갔다.

반면 한국은? 1981년 86만 명대였던 출생아 수가 절반인 43만 명대로 떨어지는 데 32년이 걸렸는데(2013년 43만6455명), 이후 전 사회적인 저출산 경보가 시작됐음에도 최근 9년간 출생아 수는 24만 명대로 다시 절반 가까이 폭락했다. 저출산 속도가 오히려 더 가속화된 셈이다.

동아일보DB
지금과 같이 온 국민을 대상으로 ‘위험하다, 일단 뛰어야 해’하고 겁을 주는 것이 과연 현명한 방법일까 돌이켜 볼 시점이다. 저출산 용어에 문제를 제기한 인구 정책 전문가는 그날 기자에게 “초기 저출산·고령사회 기본계획은 전 국민에게 ‘겁을 주는’ 정책이었다”며 “이제 그런 정책의 유효기간은 끝났다”고 말했다. 그는 “저출산 겁주기도 하지 말고, 저출산 정책이라는 말도 차라리 없애는 편이 낫다. 출산·육아 지원은 저출산 정책이라는 말 없이도 할 수 있다”고 했다.

물론 대만의 출산율 반등이 언어 프레임 때문만은 아니었을 테다. 저출산은 복잡다단한 문제가 얽힌 결과다. 하지만 분명 그의 말에 일리는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부 스스로 저출산이란 말을 반복 재생산해가며 현실 인식을 고착화시킬 필요는 없지 않을까. 이참에 저출산고령사회위원회도 ‘인구위원회’나 다른 미래지향적인 이름으로 바꾸는 것을 고려하면 어떨까 싶다. 탄소중립녹색성장위원회에서 ‘탄소중립’, ‘녹색성장’은 우리가 지향해야 할 바다. 반면 우리가 ‘저출산’, ‘고령사회’를 지향하고 있는 건 아니지 않은가.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고 하면 누구든 자꾸 코끼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이미지 기자 imag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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