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네와 모파상을 사로잡은 에트르타 코끼리 절벽에 서다 [최현태 기자의 여행홀릭]
엄마·아빠·아기 코끼리 거대한 석회암 절벽 신비롭고 장엄/에트르타에 반한 모네 ‘에트르타의 석양’ 등 작품 50여점 남겨/모리스 르블랑 소설 ‘기암성’ 주인공 아르센 뤼팽이 보물 숨긴 바늘바위도 신기
비취색 고운 바다와 은빛으로 반짝이는 해변. 몽돌을 악기 삼아 연주하는 파도. 해변 위에 높이 솟은 석회암 절벽과 그 위로 끝없이 펼쳐진 푸른 초원. 그리고 절벽 끝에 매달린 채 바다 깊숙이 코를 박고 선 거대한 코끼리 바위가 만들어내는 세 개의 아치. 저 문을 통과하면 천국으로 들어가는 걸까. 에트르타 팔레즈 다몽(Falaise d’Amont) 절벽 위에 섰다. 세상의 모든 미사여구를 다 동원해도 그 아름다움을 과연 눈곱만큼이나 표현할 수 있을까. 눈으로 직접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장엄하고 신비로운 풍경에 머리를 망치로 두들겨 맞은 듯, 한동안 옴짝달싹조차 할 수 없다.
◆신비롭고 영원한 전설, 에트르타
지베르니와 루앙을 거쳐 한 시간여를 더 달려 ‘빛을 그린 화가’ 클로드 모네의 삶을 따라가는 세 번째 여정, 프랑스 노르망디 북부 해안마을 에트르타(Etretat)로 들어서자 심장이 쿵쾅쿵쾅 방망이질을 시작한다. 버킷 리스트의 한 줄을 드디어 완성하는 순간이다. 마음은 해안으로 달려가고 있지만 발걸음이 더디다. 마을 중심가를 아무리 돌아도 주차장 빈자리를 찾기 어렵다. 1200명이 사는 작은 마을에 한 해 관광객이 150만명이나 몰리는 탓이다. 해변까지 20분가량 걸어야 하지만 마을 입구로 들어서는 내리막길을 따라 마련된 유료주차공간을 이용하는 것이 좋다. 신용카드를 잘 인식하지 못하고 지폐도 사용할 수 없으니 동전을 반드시 준비해야 한다.
마을로 들어서자 알바트르 해안으로 이어지는 길을 따라 늘어선 목조 골조가 드러나는 콜롬바주 양식 건물들이 여행자들을 반갑게 맞는다. 다양한 상점과 레스토랑, 카페를 구경하며 걷다 보면 왼쪽에 ‘엄마 코끼리’ 팔레즈 다발(Falaise d’Aval), 오른쪽에 ‘아기 코끼리’ 팔레즈 다몽을 거느린 해변이 펼쳐진다. 여행자들의 입에서 터져 나오는 감탄사는 한결같다. “뷰티풀! 원더풀! 어메이징.” 날렵한 코와 늘씬한 몸매를 지닌 다발 절벽은 한눈에도 엄마 코끼리를 닮았고 다몽 절벽은 몽실몽실한 몸과 짧은 코를 지닌 모양이 영락없는 아기 코끼리다. 그럼 아빠 코끼리는 어디 있을까. 해변에선 안 보인다. 엄마 코끼리 절벽으로 올라가야 비로소 나타난다. 많은 여행자가 해변의 굵은 자갈에 앉거나 누워 눈을 감고 따뜻한 햇살과 파도가 들려주는 노랫소리를 즐긴다. 천국이 따로 없구나. 눈과 가슴에 가득 담아 가야지.
에트르타 여행은 아기 코끼리 다몽 절벽에 올라 엄마 코끼리 다발 절벽을 바라보는 풍경이 핵심. 가파른 언덕길을 헉헉거리며 오른다. 고도를 높일수록 달라지는 다발 절벽 풍경은 팜므파탈을 보는 듯, 치명적 매력으로 넘친다. 20분을 올라 전망대에 서면 자연이 빚은 한편의 대서사시에 감탄이 저절로 쏟아져 나온다. 바닥이 들여다보이는 환상적인 옥색 바다를 완만한 곡선으로 품은 높이 90m의 거대한 석회암 하얀 절벽이라니. 크레이프 케이크처럼 오랜 세월 한겹씩 차곡차곡 쌓인 지질의 나이테가 선명해 신비함을 더한다. 파도와 바람은 끊임없이 석회암을 깎고 뚫어 솜씨 좋은 조각가가 실력을 한껏 발휘한 듯, 멋진 코끼리 모양을 조각해 놓았다. 해변에선 기다란 코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던 옆의 뾰족한 바늘바위도 잘 보인다. 바다에서 70m 높이로 솟아오른 독특한 모양이다.
전망대 언덕의 작은 교회는 1856년에 지어진 노트르담 드 라 가르드 예배당(Notre Dame de la Garde Chapel). 거친 바다에서 생활하는 어부들의 안녕을 기원하는 교회로 제2차 세계대전 때 파괴됐다 1950년 복원됐다. 지금은 사유지여서 개방되지 않는다. 벤치가 놓인 전망대에서 5분 정도 더 걸으면 아기 코끼리 등에 올라탄다. 절벽의 기기묘묘한 암석을 즐길 수 있지만 매우 아찔하고 위험하다. 아무런 안전펜스도 없고 경사가 급하니 주의하도록. 다몽 절벽을 지나서도 트레킹 코스가 계속 이어져 여유가 있다면 끊임없이 펼쳐지는 석회암 절벽을 감상하며 더 멀리까지 다녀올 수 있다.
◆맛있는 해산물로 원기보충해볼까
바다를 끼고 있는 에트르타는 해산물이 매우 풍부하다. 사실 이곳은 루이 16세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진상하는 굴을 생산하던 곳. 굴을 채취하면 당나귀나 말에 실려 하루 만에 베르사유 궁전에 도착해 왕비의 식탁에 올랐다고 한다. 아발 절벽에서 내려오니 마침 점심때라 배가 출출하다. 해변을 따라 레스토랑이 몰려 있는데 그중 한눈에도 고풍스러운 레스토랑 라 벨레 에포크(La Belle Epoque)에 앉아 해산물 샐러드를 주문한다. 싱싱한 새우와 토마토, 야채와 허브가 어우러지는 샐러드는 한눈에도 맛있어 보인다. 참지 못하고 한 입 떠 넣으니 에트르타 바다가 통째로 입안으로 밀려오는 기분이다.
몸이 건강해지는 기운을 받았으니 이제 엄마 코끼리 등에 오른다. 20여분을 천천히 걸어올라 전망대에 서니 이번엔 건너편 아기 코끼리가 아주 또렷하다. 석회암 절벽과 작은 교회가 어우러지는 예쁜 풍경은 덤으로 얻는다. 고개를 뒤로 돌리면 드디어 아빠 코끼리 만포르트(Manneporte) 절벽이 베일에 가린 모습을 드러낸다. 역시 아빠답게 듬직하고 우람하다. 코의 두께가 어마어마해 엄마의 두세 배는 돼 보인다.
여기까지 왔으니 아빠 코끼리 등에도 올라타 힘찬 기운을 더 받아야겠다. 다시 20여분을 걸어가 만포르트 절벽 정상에 섰다. 놀랍다. 해변에서 보던 엄마 코끼리 반대쪽 풍경이 예술이다. 특히 바늘바위가 손에 잡힐 듯 또렷하다. 기묘하게 생긴 바늘바위는 ‘대도’ 아르센 뤼팽을 창조한 유명 작가 모리스 르블랑에게도 큰 영향을 줬다. 뤼팽이 등장한 작품 중 가중 유명한 ‘기암성’에 바늘바위가 등장한다. 기암성은 기묘한 암석의 성이란 뜻. 뤼팽은 속이 비어있는 바위에 구멍을 뚫고 해저터널로 연결된 비밀창고에 보물을 숨긴다. 현재 에트르타 시내에 르블랑이 살던 집이 ‘아르센 뤼팽의 집’으로 꾸며져 여행자들을 맞는다.
세 개 절벽을 모두 오르는 트레킹 코스는 3시간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점심 식사까지 즐긴다면 5시간 정도의 여유가 필요하다. 그래야 에트르타를 제대로 즐길 수 있다. 파리에서 지베르니, 에트르타, 옹플레르, 몽생미셸 등을 묶어 당일치기로 다녀오는 상품들이 넘쳐난다. 렌트 비용을 아낄 수 있어 많이 이용하지만 추천하지 않는다. 달랑 다몽 절벽 전망대에서 30분 머무르는 겉핥기식 여행으로는 아무런 감동도 느낄 수 없으니 말이다. 더구나 파리에서 아침 일찍 출발해 다음 날 새벽에 파리로 돌아가는 일정이라 몸도 마음도 축나기 십상이다.
◆모네와 모파상이 사랑한 에트르타
에트르타가 코끼리 바위로 불리게 된 것은 ‘여자의 일생’으로 유명한 작가 모파상이 작품에서 ‘중간에 구멍이 훤하게 뚫린 그 둥그스름한 바위는 물속에 코를 처박은 거대한 코끼리와 비슷한 형상’이라고 표현하면서부터. 소설의 배경이 바로 에트르타이며 비운의 삶을 산 주인공 잔이 자살하려고 선 바위가 코끼리 바위다. 모파상은 노르망디 투르빌쉬라르크에서 태어났지만 어린 시절 부모가 별거한 뒤 어머니와 에트르타에서 자라 늘 대자연과 호흡했다.
모파상과 자주 만나던 모네 역시 에트르타에 반해 작품을 50여점이나 남겼다. 하얀 석회암 절벽은 거대한 자연 캔버스로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빛과 공기의 색을 담기에는 아주 매력적 대상이다. 대표 작품이 ‘에트르타의 석양’. 아몽 절벽에 올라 아발 절벽을 그린 이 그림은 노을 지는 아름다운 에트르타 풍경을 잘 담은 걸작으로 평가된다. 모네는 에트르타 인근 르아브르(Le Havre)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르아브르 항구를 그린 ‘인상, 일출’이 인상파의 시작을 알리는 작품이 됐다. 모네는 1883년 2월 무렵 3주 동안 에트르타에 머물며 노을 풍경을 그렸는데 미국 텍사스대 천문학 연구팀이 작품 속 태양 고도, 바닷물 높이, 작업 지점 등을 분석해 이 그림이 1883년 2월 5일 오후 4시53분의 모습이라는 사실을 밝혀내 화제가 됐다.
에트르타 풍경은 모파상과 모네뿐 아니라 많은 예술가를 유혹했다. 모네에 앞서 사실주의 대표 화가 귀스타브 쿠르베가 ‘폭풍이 지나간 에트르타’를 그렸고 앙리 마티스가 ‘에트르타, 거대 절벽’을 남겼다. 또 마르셀 프루스트, 빅토르 위고, 사무엘 베케트, 알렉상드르 뒤마, 앙드레 지드 등이 에트르타에 머물며 예술적 영감을 얻었다.
에트르타(프랑스)=글·사진 최현태 선임기자 htchoi@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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