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색화’ 이끈 박서보 화백 별세… 90세까지 활동했던 그의 열정
빳빳한 중절모자에 위아래 색을 맞춘 양복. 두툼한 알반지를 낀 손에 쥐어진 지팡이 하나. 생전 박서보 화백의 존재감은 어디서든 상당했다. ‘화단의 멋쟁이’로 불린 고인의 맵시는 매번 달랐지만, 부리부리한 눈으로 좌중을 둘러보며 큰소리치는 도깨비 같은 카리스마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기지재단은 최근 폐암 3기 판정받고 투병 중이던 박 화백이 14일 오전 별세했다고 밝혔다. 향년 92세.
1931년 경북 예천에서 태어난 고인은 1954년 홍익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추상미술을 이끌었다. 1956년, 25살에 기존의 가치와 형식을 부정하면서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와의 결별을 선언했다. 고인은 “반(反) 국전 선언을 신호탄으로 현대미술 운동을 벌이면서 별의별 ‘낮도깨비 짓’을 했다. 도깨비라 별명 불러주는 건 양반이었다. ‘천하의 몹쓸 놈’부터 ‘빨갱이’ 소리까지 들어야 했다”고 회고한 바 있다.
서보(본명 박재홍)라는 예명은 이 즈음부터 함께였다. 1955년, 동료이자 한학에 조예가 깊었던 맹인재(93)가 두 개의 아호를 가져왔다. 수헌(樹軒)과 서보(栖甫). 회화과 동료였던 이원용(93)이 수헌을 골랐다. 서보로서의 인생이 시작됐다.
국전과의 결별을 선언한 후 고인은 서울 종로구 관훈동에 작은 화실을 열었다. 가장 처음 화실을 찾은 학생은 서울올림픽 미술감독으로 잘 알려진 이만익(1938~2012). 그 후로도 김종학(86), 윤명로(87), 방혜자(1937~2022) 등 유능한 제자들이 고인을 스승으로 모셨다. 고인의 제자였던 이태현 화백(83)은 “예나 지금이나 아주 칼 같고 촌철살인이었다. 그러나 제자를 위하는 말이란 걸 다들 알고 있었기에 미워하기보다는 존경했다”고 말했다.
축적된 시간만큼 예술적 사유도 깊어갔다. 1970년대, 고인의 ‘묘법’(描法·Ecriture) 시리즈가 세상에 나왔다. 말 그대로 선을 긋는 행위의 결과물이다. 고인은 캔버스에 물감으로 밑칠하고 그것이 채 마르기 전에 연필로 선을 긋고 또 물감을 지우고 다시 그 위에 선을 긋는 행위를 되풀이해 작품을 완성했다. 1980년대 이후 본격화된 ‘후기 묘법’에서는 종이 대신 한지 위에 고도의 절제된 세계를 표현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단색화는 박 화백 회화 인생의 정점을 열었다. 고인의 소속 갤러리인 국제갤러리는 “도쿄도 현대미술관, 프랑스 퐁피두센터, 아랍에미리트 구겐하임 아부다비, 홍콩 M+미술관 등이 소장하고, 해외 유수의 비엔날레와 아트페어의 러브콜을 받는 등 한국 미술의 국제화를 이끌었다”고 평가했다.
고인은 오랫동안 홍대 미대 교수로 재직해 ‘홍대 미대 사단의 대부’로도 불렸다. 1962년 처음 강단에 선 후 1997년까지 홍익대 미술대 교수로 있었으며, 홍익대 미술대 학장(1986~1990)을 역임했다. 예술가이자 교육자, 행정가로 두루 활동해온 그는 1984년 국민훈장 석류장, 1994년 옥관 문화훈장, 2011년 은관 문화훈장에 이어 2021년 금관 문화훈장을 받았다.
자화자찬 화법의 일인자기도 한 고인은 “외국에서는 나를 한국 현대미술 아버지라고 부른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사뭇 뻔뻔해 보이지만, 그의 숨은 노력이 자랑의 근거다. 아흔이 넘어서도 매년 국내외 개인전을 열 정도였다. 고인은 아흔을 앞둔 당시 “지금 한창 숙성 중”이라고 자신을 표현했다. “지구에 살아있는 시간이 많지 않다”며 최선을, “앉아서 추락할 수는 없다”며 변화를 꾀하면서 말이다.
유족으로는 부인 윤명숙 씨와 2남 1녀가 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이다. 02-2072-2020
김민 기자 kimmi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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