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구 금메달리스트 전지희가 쓴 ‘인생역전’ 드라마
(시사저널=김경무 스포츠서울 전문기자)
2008년, 중국에서 탁구공을 치며 청소년 유망주로 성장하던 10대 선수가 한국에 왔다. 그리고 4년 후인 2012년, 그는 대한민국 국적 선수로 새로운 탁구인생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지구촌 이곳저곳에서 열리는 국제대회에 다니며 랭킹포인트를 쌓고 실력을 키운 끝에 결국 태극마크를 달았다. 그리고 대한민국 여자탁구 에이스로 우뚝 섰으나, 국제대회에만 나가면 자신이 태어난 중국 선수들에게 번번이 맥을 못 추고 당했다. 아시안게임에서도 동메달이 최고 성적이었다.
그런데 귀화 12년 만에 한국 최고의 선수와 환상의 케미를 이뤄 10월8일 막을 내린 제19회 항저우아시안게임 탁구 여자복식에서 금메달을 획득했다. 숱한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일궈낸 아시아 정상이었다. 주인공은 바로 '국민 삐약이' 신유빈(19·대한항공)과 호흡을 맞춘, 1m59의 작은 거인 전지희(31·미래에셋증권) 선수다.
어릴 때부터 선수 출신 아버지로부터 탄탄한 기초 쌓아
10월2일 중국 항저우 궁수 캐널 스포츠파크 체육관에서 열린 여자복식 결승. 12세 차이 띠동갑인 전지희-신유빈은 인민공화국기를 가슴에 단 북한의 차수영-박수경을 4대1로 물리치고 금메달의 감격을 맛봤다. 33년 만에 아시안게임 탁구 종목에서 이뤄진 남북 탁구 경기였기에 관심은 더욱 뜨거웠다. 21년 만에 아시안게임 탁구에서 한국이 일궈낸 금메달이었기에 감격은 더했다.
경기 후 공식 기자회견에서 전지희는 "좀 긴장됐는데, 유빈이가 도와줘 잘할 수 있었다. 감사한다"고 짝꿍한테 공을 돌렸다. 신유빈도 "아시안게임 첫 결승에 올라 신기했는데, 결과에 만족한다. 지희 언니가 잘 이끌어줬다. 금메달을 따서 행복하다"고 말했다.
사실 크고 작은 각종 WTA(월드테이블테니스)투어 대회에 출전해 랭킹포인트를 쌓은 전지희-신유빈 조는 여자복식 세계랭킹 1위이긴 해도 사실상의 세계 최강 조인 중국의 쑨잉샤-왕만위, 첸멍-왕이디 등이 홈그라운드의 이점까지 안은 채 버티고 있었기에 금메달을 자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뜻밖에도 행운이 찾아왔다. 중국 선수들이 8강전에서 잇따라 충격적인 패배를 당하면서 기회가 생긴 것이다. 전-신 조는 준결승에서 일본의 '무서운 10대' 하리모토 미와(15)-기하라 미유유(19)와 접전 끝에 4대1 승리를 거두고 고비를 넘겼다.
전지희-신유빈은 지난 5월 남아프리카공화국 더반에서 열린 2023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 은메달 쾌거를 이룬 터였다. 당시 둘은 준결승에서 세계 1위를 달리던 쑨잉샤-왕만위를 3대0으로 꺾고 기세를 올렸다. 하지만 결승에서는 첸멍-왕이디에 0대3으로 지고 말았다. 그리고 5개월 만에 세계 탁구 최강국인 중국에서 열린 아시안게임에서 가장 높은 자리로 비상했다.
전지희는 중국 허베이성 랑팡시 출신으로 중국 탁구 청소년 국가대표까지 지낸 경력의 소유자. 2008년 김형석 당시 서울시청 감독의 권유로 대한민국에 첫발을 디뎠고, 새로운 탁구 인생을 시작한 지 15년 만에 맛본 최고 성적이었다. 전지희는 어렸을 때 선수 출신 아버지와 훈련을 하면서 기초를 탄탄히 쌓았고, 13세 때 산둥 루넝클럽에 입단해 본격적인 선수생활을 시작했다. 이후 아시아청소년탁구선수권 여자단식 2위를 차지하는 등 어릴 때부터 유망주였다. 그렇다면 왼손잡이 전지희는 어떻게 신유빈과 함께 환상의 케미를 이루며 시너지 효과를 냈던 것일까?.
전지희의 오늘을 있게 한 김형석 감독(현 화성시청)은 "신유빈이 친 공은 끝이 길고 무겁다. 그렇다 보니 상대 선수들이 유빈의 공을 제대로 처리하기 어렵고 수비에 급급한다. 그래서 공이 쉽게 넘어오고, 지희한테 공격 기회가 많이 온다. 유빈이 만들어주고 지희가 결정을 내는 것이다. 이번에는 이런 케미가 좋았다"고 우승 비결을 설명했다. 김 감독은 "둘의 조합은 중국 선수들도 부담스러워한다"고 했다.
전지희는 그동안 국내 무대에서 백핸드와 까다로운 서브만으로도 토종 간판스타들을 잇따라 물리쳤다. 그 정도 기술과 실력으로도 대한민국 여자탁구 에이스로 군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최근 백 사이드에서 적극적으로 돌아서서 포핸드를 치는 훈련에 집중했고, 파워 면에서도 중국 선수들에게 밀리지 않는 왼손 구질을 완성하면서 귀화 12년 만인 올해 화려한 꽃을 피운 것이다.
특히 이번 아시안게임에서 그는 공격력이 상대적으로 약한 신유빈보다 파워 넘치는 공격으로 포인트를 많이 따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전지희의 실력 향상은 중국인 코치 슈커 덕분이다. "슈커는 전지희보다 한 살 많다. 그가 2020년 한국에 들어와 당시 포스코에너지 소속이던 전지희를 집중 지도했다. 슈커 때문에 지희의 기술이 좋아진 것이다."
김형석 감독은 "전지희가 메달을 따려면 우리 코치로는 안 되겠더라. 그래서 중국인 코치를 두 번 붙여줬는데, 모두 실패했다. 슈커는 세 번째 코치다. 2년 반 열심히 슈커가 가르치면서 전지희 탁구가 바뀌었다. 포핸드 기술이 다양해졌고, 구질과 임팩트가 중국 선수들처럼 바뀌었다"고 설명했다.
내년 파리 올림픽에서 국가대표의 화려한 피날레 꿈꿔
그런 슈커도 지난해 말 불미스러운 일로 포스코인터내셔널에서 경질됐고, 전지희도 그해 12월 팀을 떠나 미래에셋증권으로 이적했다. 전지희는 지난 5월 더반 세계선수권 여자복식 은메달을 딴 후 "아직도 믿을 수 없는, 무슨 상황인지도 모르겠고 꿈같았다. 세계선수권대회 결승에 한번 올라보는 게 꿈이었다. 일단 파트너(신유빈)가 너무 고맙다"고 말한 바 있다. 이번에 인생 최고의 금메달을 따고도 전지희는 신유빈 때문에 잘할 수 있었다고 거듭 감사를 표시하기도 했다.
사실 전지희는 귀화 이후 우여곡절이 많았다. 2014 인천아시안게임 때 혼합복식에서 김민석과 동메달을 획득했으나 2016 리우올림픽 때는 메달권에 들지 못했다. 그러다가 2018 자카르타-팔렘방아시안게임 때 여자단식 동메달을 획득하며 다시 한번 자신의 존재감을 과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2021년 열린 도쿄올림픽 때는 노메달에 그쳤다. 같은 해 열린 휴스턴 세계탁구선수권 때는 신유빈과 짝을 이뤄 여자복식에 출전했으나, 신유빈이 오른 손목 피로골절로 기권하면서 그의 메달 꿈도 무산됐다.
이렇듯 롤러코스터를 탔던 전지희는 내년 파리올림픽에서 선수생활의 종지부를 멋지게 장식하려 한다. 그런데 올림픽 탁구에는 여자복식 종목이 없다. 남녀단체전과 남녀단식, 혼합복식 등 5종목만 치러진다. 전지희와 신유빈을 앞세운 한국팀이 여자단체전에서 좋은 성적을 내려면 전지희와 신유빈의 단식 실력이 더욱 향상돼야 한다.
전지희는 이번 아시안게임 때는 여자단식에 출전하지 않았다. 국가당 2명만 나갈 수 있는데, 수비 전형인 서효원(36·한국마사회)에게 양보했다. 하지만 서효원은 16강에서 탈락했고, 신유빈이 동메달을 획득했다. 전지희는 지난해 10월 중국 신시앙에서 열린 2022 WTT 컵 파이널스 여자단식 1라운드(16강전)에서는 중국의 왕이디한테 단 20분41초 만에 0대3으로 참패를 당한 흑역사도 있다. 전지희로서는 이제 여자단식에서 중국에 대한 경쟁력을 키우는 게 당면한 과제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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