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같은 것보다 다 다른 것이 나은 이유

한겨레 2023. 10. 14.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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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S] 남창훈의 생명의 창으로 바라본 사회][한겨레S] 남창훈의 생명의 창으로 바라본 사회
식물종 다양할수록 생육 활발…‘몰아주기 당연시’ 사회와 딴판
식물종 다양성 실험이 진행 중인 독일 예나의 경작지 모습. ‘예나 실험’ 누리집

제한된 자원을 공유하는 같은 수령, 같은 수종의 나무를 심고 시간이 흐르면 살아남은 나무 몸통 줄기의 지름은 커지면서 이에 반비례해 전체 나무 수는 감소한다. 이를 ‘자가 솎아내기’(self-thinning)라고 한다. 산림을 효율적으로 관리할 목적으로 오랜 기간 여러 실험을 반복해 얻어낸 규칙이다. 산림 관리자는 이 규칙을 통해 제한된 공간에서 간벌을 하며 식물 밀도의 균형을 유지함으로써 가장 경제적인 산림 관리를 꾀할 수 있다.

이 규칙은 식물 생태계에서 다양성을 완전히 제거했을 때 나타나는 나무들 간의 경쟁이 다른 변수들의 영향을 받지 않은 채 고스란히 드러난 결과다. 산에 같은 수종의 작은 나무들을 심고 몇년 지나고 나면 몇 그루의 거대한 아름드리나무가 우뚝 솟아 자라나는 모습은 여러모로 우리 사회의 모습을 상기시킨다. 사회 여러 분야에선 제한된 자원을 놓고, 응용·진학·수상·흥행 가능성을 기준으로, 시장지배력을 척도로 다양성이 제거된다. 다양성이 사라진 각 분야에서 끝도 모를 경쟁이 벌어지고 거기서 승리한 개체에게 자원은 집중된다. 그 결과 배타적으로 성장하고 몸집을 불린 개체는 휠씬 높은 확률로 그 사회에서 ‘선택’된다. 솎아내기의 결과이자 주체가 되는 셈이다.

자가 솎아내기가 벌어지는 산림 생태군 속에는 비정한 면모가 숨겨져 있다. 솎아내기 도중 도태된 나무들의 사체는 선택된 개체의 성장에 쓰인다. 누군가는 자연의 섭리가 원래 이렇게 비정한 것이라고 할 것이다. 다윈의 자연선택이 거론될 수도 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의 낮은 출산율이나 높은 자살률도 이 규칙을 통해 설명될 수 있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생각들은 생명의 원리에 대한 심각한 오해에 기초하고 있다. 생명의 원리는 이렇게 단순하고 비정하지 않다. 이 규칙은 생명체 간의 다양한 상호협력과 기댐에 근거한 생명 네트워크를 완전히 소거하도록 디자인된 실험들로부터 얻은 결과다. 생명 네트워크는 다양한 생명 개체들이 공존할 때 만들어진다. 오히려 이 실험과 규칙은 생명의 가장 중요한 속성 중 하나가 다양성이라는 것을 부지불식간에 역설한다.

다양성 실험이 확인한 순리

2001년부터 유럽연합(EU) 주관으로 독일 예나라는 도시 외곽 3만평 규모 대지에 20㎡ 크기의 100여개 중형 경작지와, 3.5㎡ 크기의 400여개 소형 경작지가 조성됐다. 국제컨소시엄에 참여한 연구자들은 경작지를 6개 그룹으로 나눠 각각 단일종, 2종, 4종, 8종, 16종, 60종의 식물을 심었다. 다양한 풀과 채소류, 키 작은 화초, 작고 큰 관목 등이 포함됐다. 각 식물종의 키와 뿌리 길이는 다양했고 꽃과 잎사귀의 모양도 달랐다. 각 식물종의 뿌리·줄기에 사는 박테리아나 식물을 섭식하는 곤충·포유류의 종류도 다양했고, 화초들의 꽃가루를 실어 나르는 나비 종류도 조금씩 달랐다.

연구진은 이 실험을 통해 같은 크기의 자원이 주어진 경작지에서 여러 다양성 규모를 지닌 식물종들이 자라면서 보이는 면모를 8만개가 넘는 변수를 통해 분석했다. 실험을 시작한 지 4~5년의 시간이 흐른 뒤부터 상대적으로 더 다양한 식물종이 자랐던 경작지에서 강점들이 발현되기 시작했다. 도태되지 않고 유지되는 식물종이 많았고 병원균, 홍수, 가뭄, 기후 변화에 대한 저항성이 강했다. 꽃가루받이(수분)와 탄소·인·질소 순환, 개체들의 생육 발달이 활발했고 토양 내 수분의 함량도 풍부했다. 식물종의 다양성이 많은 경작지와 적은 곳의 차이는 시간이 갈수록 확연하게 커졌다. 이 실험은 현재도 진행 중이다.

다양성 경작지의 강점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키나 뿌리의 길이가 서로 다른 식물이 함께 자라면 각기 다른 공간에서 침해하지 않으며 풍부하게 햇빛을 받고, 땅속 다양한 깊이에서 더 많은 물을 길어 올릴 수 있다. 조밀하게 맞춰진 3차원 레고처럼 상보적인 공간에서 자원을 분할하는 것이다. 단일종이 자랄 때보다 다양한 종의 식물이 자랄 때 이들을 섭취하는 초식곤충과 동물의 독점적이고 과도한 섭식이 방지되고 섭식자들이 식물 생태계에 미치는 영향도 완충된다. 공생하는 박테리아 종류도 늘어나 미생물 생태계 간의 상호 견제가 강화돼 여러 병충해로부터 식물을 보호하게 된다. 뿌리에 공생하는 뿌리근균의 종류도 많아져 각기 다양한 방식으로 질소를 흡수·대사하면서 양분의 종류와 양도 늘어난다. 다양한 화초식물이 자라날수록 각기 다른 시기에 꽃망울을 맺기 때문에 휠씬 효과적인 수분이 이뤄진다. 미생물, 곤충, 동물들과 여러 방식의 먹이사슬을 이루면서 관계를 주고받기 때문에 양분의 생산과 교류가 다양해지면서 생태계의 생체 총량은 커지고 자원도 더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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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교육·과학…선택과 집중의 참상

우리는 종종 선택과 집중을 마치 자연의 섭리인 듯 얘기하는 경우가 있다. 자연선택의 냉혹함도 덧붙인다. 하지만 이는 생명의 본질을 지독하게 왜곡한 주장이다. 엄격하게 설계된 ‘자가 솎아내기’ 규칙은 그 결과의 참상으로 이어진다. 거대도시로 모든 게 집중되면서 처참하게 소멸되는 지방 마을, 천만 영화에 환호하는 가운데 상영조차 되지 못하는 다양성 영화, 진학을 뒷받침하는 학력에 맞춰진 교육으로 제거되는 소질과 꿈, 세계적 시장 지배력을 바탕으로 날이 갈수록 번창하는 거대 기업과 그 주변을 배회하는 소모품이 된 소규모 기업, 응용과학기술에 집중된 지원 속에 기반을 잃어버린 다양한 주제의 기초과학연구. 우리가 지금 목도하는 현실들이다. 마치 가장 모범적으로 자가 솎아내기 규칙을 보여주기 위해 사회를 디자인하고 있는 듯하다. 세계 최저 출산율과 최고 자살률은 극단적 자가 솎아내기의 결과인지도 모르겠다.

‘예나 실험’이 보여주듯 생명의 본질에는 다양성을 통해 서로 기대고 의지하며 윤택하고 지속 가능한 전체 시스템을 구성하는 아름다운 속성이 내재돼 있다. 어울려 살아가는 게 생명체의 가장 중요한 능력이다. 다양성을 갖춘다는 것은 각자의 차이를 존중하고 그 차이를 바탕으로 풍부한 관계를 맺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양성의 존중은 차이를 차별로 변질시켜서는 안 된다는 약속에서 시작되며, 각자의 다름으로 나름의 소중한 기여가 발생한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으로 완성된다. 차이를 근거로 차별하며 하나의 강력한 기준을 강제하는 것은 생명과 존재에 대한 억압이다. 이러한 억압은 사회의 다양성을 소멸시킨다.

매 순간 우리 앞에는 선택과 집중의 구호를 통해 닦인 자가 솎아내기의 길과 다양성을 통해 서로 어우러지는 갈림길이 놓인다. 그중 어느 길을 선택할지는 우리에게 달려 있다.

대구경북과학기술원 교수

서울대와 프랑스 퀴리연구소, 영국 케임브리지 분자생물학연구소에서 생화학·면역학 등을 공부했다. 박테리오파지를 이용한 수용체 개발, 노화와 면역 사이의 연관 등을 연구하면서 대학 교육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부단히 모색 중이다. ‘탐구한다는 것’, ‘이타주의자’, ‘소년소녀, 과학하라!’ 등의 책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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