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칠줄 모르는 수행자’…박서보 화백, 하늘로 떠나다

김슬기 기자(sblake@mk.co.kr) 2023. 10. 14. 1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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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암 투병 끝에 92세 타계
한국 단색화 발전 이끈 거장
연필로 선긋는 ‘묘법’ 통해
한국 추상미술 발전 이끌어
폐암 투병에도 작업에 매진
영국 미국 등 세계에서 전시
홍콩 경매서 35억원 기록도
박서보 <조현화랑>
“하루 사이 바람의 결이 바뀌었다. 가을인가. 바닷 바위에 파도가 부딪히는 소리도 사뭇 차가워지고. 내년에도 이 바람에 귀 기울일 수 있으면 좋으련만.”

3주 전, 가을바람을 맞으며 남긴 마지막 말은 지켜지지 못하게 됐다. ‘한국 단색화의 거장’이자 ‘지칠줄 모르는 수행자’였던 박서보(본명 박재홍) 화백이 14일 오전 타계했다. 향년 92세.

지난 2월 폐암 3기 판정을 받고도 담담히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캔버스에 한 줄이라도 더 긋고 싶다”고 페이스북에 글을 쓰고 최근까지 왕성하게 활동을 해왔다.

박서보는 한국 추상미술을 대표하는 화가이자, 굴곡 많은 한국 현대사를 온몸으로 통과해온 화가다. 1931년 경북 예천에서 태어나 일제강점기의 암흑기에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는 충북 음성 출신 공무원으로 어린 시절을 경기도 안성에서 보냈다.

박서보의 홍익대 재학시절 [기지재단]
1950년 홍익대 동양화과에 2기로 입학했으나, 자유와 낭만이 넘치는 대학 생활은 석달 보름 만에 6·25 전쟁으로 일단락됐다. 미술대학 재학생이란 이유로 인민군에 끌려가 선무공작대에 분류되어 징집된 그는 연극 무대미술을 제작하기도 했다.

전쟁통에 전시학교가 있는 부산 홍익대 회화과에서는 동양화과 교수가 사라졌다. 그런 이유로 1952년 서양화과로 전과를 한 직후 수화(樹話) 김환기(1913-1976) 선생과 설초(雪蕉) 이종우(1899-1981) 선생이 마침 그해 홍대에 왔다. 김환기는 그의 롤모델이었다.

비싼 캔버스를 살 수 없어 미군이 내다 버린 전투식량인 ‘레이션 박스(Ration Box)’를 주워다 빨간 베레를 쓴 자화상을 그린 걸 보고, 김환기는 “이걸 처음 그렸다고? 이 사람, 천재네. 이제 대가네, 대가!”라고 칭찬하기도 했다.

대학 재학 중에는 생활고로 독한 됫병 소주와 일명 ‘꿀꿀이죽’으로 끼니를 때우면서도 중국음식점에서 점심시간에 초상화를 그리며 돈을 벌어 물감을 사서 그림을 그렸다. 1955년 가을에는 스승 김환기의 권유로 출품한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에서 입선을 하기도 했다.

이후 그는 특유의 외향적 기질로 화가들의 ‘기지’ 노릇을 한 이봉상회화연구소에서 동료들과 함께 그림을 그렸다. 함께 한 이가 김종학과 이만익, 김서봉, 윤명로, 김봉태, 방혜자, 김재임이다. 이어령, 유종호, 박희진 등 문인과도 어울렸고 많은 이들의 평론집이나 시집 표지를 그리기도 했다.

1956년 그는 전람회 미술을 거부하며 ‘반(反)국전’의 기치를 걸고 동방문화회관에서 4인전을 열었다. 이경성, 김영주, 김중업, 최순우, 정규 등과 함께 ‘한국미술평론가협회’를 발족해 국전을 식민잔재로 규정하고 사실주의 미학을 거부하며 새로운 미술 운동을 내세웠다. 반국전 운동은 큰 사건이 됐고 그는 1960년대 한국 미술계의 중심에 서게 됐다. 1962년 이후 홍익대 미술대 교수로 후학을 양성하면서 1986~1990년 미술대학장을 지냈다.

숱한 시행착오 끝에 1960년대 후반 화면에 물감을 바르고 연필로 수없이 선을 그은 대표작 ‘묘법’을 선보이며 독창적인 예술의 세계로 침잠해 들어갔다. 다섯 살 난 둘째 아들이 비뚤비뚤 글씨 연습을 하는 모습을 보고 ‘체념의 몸짓을 흉내내려 한 작품’이 바로 첫 묘법이었다. 친구 이우환의 주선으로 1973년 도쿄 무라마쓰 화랑에서 첫 묘법을 선보였다.

연필로 수백, 수천 번 긋기를 반복하는 행위는 자연스럽게 무늬를 만들어내고, 그 무늬는 수행의 결과물이 된다. 수행의 예술은, 치유와 위로의 힘을 가져다준다.

박서보의 ‘묘법’을 위시한 단색화는 50여년간 이어진 뚝심 있는 작업이었으나, 10여년 전부터야 제대로 평가받기 시작했다. 2012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40여년의 여정을 아우르는 이우환, 박서보, 정상화, 하종현, 정창섭 등이 참여한 ‘한국의 단색화’ 전이 열렸다.

한국 추상미술을 대표하는 김환기와 함께 단색화는 세계로 뻗어갔다. 2015년 제56회 베니스비엔날레의 병렬전시로 팔라초 콘타리니 폴리냑에서 연 ‘단색화’ 전은 세계에서 한국미술의 위상을 단번에 끌어올린 사건이 됐다. 이후 단색화는 한국을 대표하는 미술로 우뚝 섰다.

세계의 작가가 된 박서보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페로탕 파리에서 2014년 성대한 첫 해외 개인전을 열었고, 영국을 대표하는 화랑 화이트큐브 런던에서도 2016년 개인전을 열며 전 세계를 누볐다. 1975년 작 ‘묘법 No. 37-75-76′이 지난 10월 5일 홍콩 소더비 경매에서 260만달러(약 35억원)에 팔릴 만큼 한국 미술을 대표하는 작가가 됐다.

2019년 5월 17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에서 열린 회고전에 참석한 박서보. [기지재단]
2019년 5월 그는 국립현대미술관에서의 생애 두번째 회고전을 열었다. 둑이 터진 듯 관람 인파가 몰려들자 그는 특유의 중절모를 벗어들고 인사했다. “여러분들이 나를 만나기 전에 ‘뿔 난 도깨비’ 같은 사람이라는 풍문을 들었을 겁니다. 아침에 (뿔을) 다 밀고 왔습니다.”

매일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죽어서 무덤에 들어가서 후회하지 않으려고 지금 최선을 다해 그리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박 화백은 서양 미술은 자기 생각을 드러내고 감정을 토해내지만 단색화는 비워내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한국에서 대학을 나오고 끝까지 살아남아 단색화를 일궈내고 세계화시켰다”며 “외국에서는 나를 한국 현대미술 아버지라고 부른다”고 자부심을 드러냈다.

4년전 서울 연희동 주택가에 전시 공간을 겸해 설립한 기지(GIZI) 재단을 통해서는 자신의 화업을 담담하게 정리하고, 청년 작가들을 후원해 김지영 김덕한 이현종 등의 전시가 열렸다. 올해부터는 박서보의 과거와 현재를 담는 다큐멘터리가 제작 중이었고, 세계적인 출판사 리졸리에서 출간된 박서보 영문판 화집도 출간됐다.

박서보의 이름을 딴 첫 번째 미술관은 제주도 서귀포시에서 올 상반기 착공했다. 그는 만년까지도 인스타그램 등 SNS를 통해 젊은 세대와도 활발히 소통하는 ‘영원한 청년 작가’였다. 2021년에는 프랑스 럭셔리 브랜드 루이비통이 한국 작가로는 처음으로 박 화백의 작품을 이용한 핸드백을 내놓기도 했다.

2019년 제64회 대한민국예술원상 미술부문을 수상했고 2020년 제40회 올해의 최우수예술가상 공헌예술가상을 받았다. 2021년에는 금관문화훈장을 받았다.

고인의 유족으로는 화가인 부인 윤명숙씨를 비롯해 2남 1녀가 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JW메리어트 제주 박서보미술관(가칭) 기공식에서 박서보 화백과 아내 윤명숙 여사 <사진제공=JW메리어트 제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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