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레스타인 외면한 ‘중동 평화’라는 허상, 전 세계를 흔들다
중동은 다시 과거로 돌아갔는가? 그보다는, 숨겨졌고 가리고 싶던 현실이 폭로됐는가? 팔레스타인 분쟁이 중동분쟁의 핵심이고 그 해결 없이는 중동은 평화로울 수 없다는 것은 과거사인가, 아니면 숨겨진 현실인가?
지난 7일 팔레스타인 하마스의 전면공격으로 시작된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은 이를 우리에게 묻고 있다. 이번 사태는 2020년 9월15일 이스라엘이 미국의 중재로 아랍에미리트연합 및 바레인과 수교하면서 가시화된 중동의 새로운 역내 질서가 얼마나 취약한지를 보여줬다.
유대인과 아랍인의 공동 조상이라는 아브라함의 이름을 딴 아브라함조약은 이스라엘과 아랍 국가들과 관계를 완전히 정상화시켜, 중동에 새로운 질서를 만들려는 야심찬 프로젝트였다. 2020년 12월에는 이스라엘-모로코, 2021년 1월에는 이스라엘-수단 수교로 이어졌다.
이스라엘-사우디 수교 ‘급제동’
아브라함조약의 백미는 이슬람권의 종주국을 자처하는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스라엘의 수교이고, 이는 최근 급진전됐다. 사우디의 실권자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는 지난 9월20일 미국 폭스뉴스와의 회견에서 “(두 나라가) 매일매일 가까워지고 있다. 처음으로 진지한 것 같다”며 “냉전 종식 이후 가장 큰 역사적 거래”라고 말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 행정부가 추진한 아브라함조약은 애초부터 이스라엘-사우디 수교를 목표로 했고, 이는 중동의 지정학을 바꿀 대형 이벤트다.
아브라함조약은 이란의 이슬람혁명(1979년)부터 시작돼 미국의 이라크전쟁(2003~2011년)으로 완전히 바뀐 중동분쟁의 판도에서 나왔다. 그 이후 중동분쟁 구도는 사우디 중심의 수니파 아랍 세력 대 이란 주도의 시아파 연대 사이의 대결로 바뀌었다.
애초 전후 중동분쟁의 큰 축은 1948년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 땅에 건국되면서 발생한 팔레스타인 분쟁이었다. 이스라엘과 이집트 등 아랍 국가들이 1973년까지 4차례 전쟁을 벌였다. 그 이후 서로를 인정할 수밖에 없던 이스라엘과 이집트는 1979년에 수교했다. 바로 그때 이란에서 이슬람혁명이 발발했다. 시아파 이슬람공화국으로 변신한 이란은 미국의 동맹에서 이탈해, 사우디 등 수니파 보수왕정을 위협했다. 또, 아랍민족주의를 대신해 이슬람주의가 아랍 대중들을 휩쓸었다.
이란을 견제하던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정권이 미국의 이라크 전쟁으로 몰락하자, 사우디 등 수니파 보수왕정 국가들은 이란을 직접 상대할 수밖에 없게 됐다. 중동은 ‘이란-시리아의 바샤르 아사드 정권-레바논의 시아파 무장정파 헤즈볼라-팔레스타인의 하마스’로 이어지는 시아파 연대 대 사우디를 중심으로 한 수니파 아랍 국가들의 대결 구도로 재편됐다.
수니파인 팔레스타인의 하마스가 시아파 연대에 낀 것은 팔레스타인의 고립과 분열 때문이다. 이스라엘-이집트 수교와 이란 혁명 이후 팔레스타인은 잊혔다. 1987년에 결국 팔레스타인에서 인티파다(민중봉기)가 발발해, 이슬람주의 세력인 하마스가 부상했다. 국제사회는 다시 팔레스타인 평화협상을 재개해, 1993년 9월 팔레스타인 독립국가를 약속하는 오슬로협정이 미국의 중재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해방기구(PLO) 사이에 체결됐다. 그러나 가자와 서안에 팔레스타인 국가를 세운다는 오슬로협정서는 휴지 조각이 됐다. 이스라엘과 협상했던 팔레스타인해방기구는 서안에서 허울뿐인 자치정부를 구성했고, 이스라엘을 부정했던 하마스는 가자에서 둥지를 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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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스타인 분쟁 잊히고 협상카드로만
2005년 이스라엘은 가자에서 일방적으로 철수하고 가자를 봉쇄하는 정책으로 선회했다. 팔레스타인 분쟁을 가자에 가둬두는 정책이다. 이집트 등 아랍 국가들도 하마스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스라엘과 주적이 된 이란 및 연대 세력들이 가자의 하마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2006년부터 가자에서는 이스라엘이 침공하는 4차례의 전쟁을 포함해 17년 동안 분쟁이 계속됐다. 3500명이 죽고, 1만5천명이 다쳤다.
서울의 절반 크기에 220만명이 봉쇄된 삶을 사는 가자는 창살 없는 감옥, 노천 감옥, 세계에서 가장 큰 감옥이었다. 그런데도 서방, 아랍 국가, 이스라엘은 팔레스타인 분쟁이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봉쇄 상황에서 분쟁과 전쟁이 가자에서 벗어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2018년 출범한 트럼프 미 행정부는 이란과의 국제핵협약을 다시 파기하고, 사우디 등 수니파 국가와의 동맹을 다졌다. 사우디도 이제 이란을 견제하는 데 이스라엘과 손잡을 생각을 했다. 이는 아브라함조약으로 추진됐다. 사우디의 무함마드 왕세자는 이스라엘과 수교 조건으로 팔레스타인 문제 해결을 내세웠으나, 미국과 이스라엘로부터 다른 것을 따내려는 카드로 사용했다.
이란은 지난 3월 중국의 중재로 사우디와 수교를 회복했으나, 이스라엘-사우디 수교는 자신들의 안보를 위협하는 문제였다. 미국이 사우디에 안전 보장을 약속하는데다, 수교가 되면 이스라엘은 이란을 거침없이 위협할 수 있게 된다.
지난 4월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하마스 대표단은 헤즈볼라 지도자 하산 나스랄라를 만나 이스라엘에 대한 “저항의 축”으로 양자 협력을 논의했다. 8월 말 하마스의 2인자 살리흐 아루리는 레바논 언론과 한 회견에서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극우 정권 출범 이후 예루살렘의 이슬람 성지 알아크사 사원에 대한 이스라엘 쪽의 도발을 지적하며 “우리는 전면전을 준비한다”며 “모든 관련 당사자들과 이 전쟁의 전망을 긴밀히 논의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마스 지도자 이스마일 하니야는 이스라엘을 공격한 지난 7일 방송에서 “저항자들 앞에서 자기 자신도 지키지 못하는 실체는 어떤 안전 보장도 해줄 수 없다. 당신들(아랍 국가들)이 이들과 서명한 모든 관계 정상화 합의는 (팔레스타인) 갈등을 해소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하마스에 공격당하는 이스라엘과 수교해봤자, 중동분쟁은 끝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팔레스타인을 뺀 중동평화 노력은 무위가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은 지난 12일 하마스가 잡아간 이스라엘 인질들을 석방할 때까지 가자에 전기·가스·물 등을 전면 차단할 것이라고 밝혔다. 더 나아가 이스라엘은 ‘불에 달궈진 돌멩이’인 가자를 삼켜야 한다. 그동안 팔레스타인을 외면한 대가는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중동과 세계 전체에 미칠 것이다.
정의길 선임기자 Egil@hani.co.kr
한겨레에서 국제 분야 글을 쓰고 있다. 신문에 글을 쓰는 도중에 ‘이슬람 전사의 탄생’ ‘지정학의 포로들’ 등의 책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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