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44년 전 ‘그날 기억’…부마항쟁 외침 민주주의 꽃피웠다
“그때 나는 고문 당하면서 ‘간첩 맞습니다’ 했다니까. 고통을 못 이겨서.”
1979년 10월 16일. 그날 부산대학교 학생들은 유신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며 거리로 나섰다.
▶ 1972년 10월 17일, 10월 유신 선포
[차성환 전 부마민주항쟁 진상규명위원회 상임위원] “박정희 대통령이 1972년 10월 유신헌법이라는 걸 만들었습니다. 헌정을 중단시키고 군대를 몰고 나와서 계엄령을 내리고. 일종의 쿠데타예요. 유신 헌법은 국민들의 동의라든지 이런 게 없어요.
형식상 국민투표라는 건 했습니다. 그런데 그 국민투표라는 것이 계엄령이 내려진 상태에서 치러진 국민투표였기 때문에 국민들의 찬성이 압도적으로 높았다라고 발표를 했지만 아무도 믿을 수가 없는 것이었죠.”
[신재식 부마항쟁 참가자/당시 민주투쟁선언문 작성 부산대 학생] “저는 행시 공부를 해야 되는데, 고시공부 핵심이 헌법입니다. 도저히 공부를 할 수가 없는 거예요. 머리에 안 들어오는 거지. 삼권분립도 되어있지 않고. 그러니까 그때부터 속된 말로 비뚤어지기 시작했죠.”
▶ 1979년 10월 15일, 유신 반대 시위를 위한 움직임
1972년 10월 17일, 그로부터 7년간 인권 유린과 민주주의 질식은 지속되자 부산대생 일부가 유신 체제에 저항하는 민주선언문과 민주투쟁선언문을 교내 곳곳에 배포했다.
학원 민주화. 언론자유/유신헌법 철폐
오전 10시 도서관 앞 집결 -민주선언문 중-
[신재식 부마항쟁 참가자/당시 민주투쟁선언문 작성 부산대 학생] “10월 15일로 날짜를 잡은 이유가, 10월 17일이 유신 선포일입니다. 저희들 잔칫날 벌이기 전에 하자”
15일 10시 35분께 학생 300여 명이 도서관 앞에 모였으나 이날 시위는 사복경찰과 보직 교수의 해산으로 불발됐다.
그러나 이날의 실패는 다음날 시위를 준비하는 원동력이 됐다.
▶ 1979년 10월 16일, 마침내 치솟은 거대한 불꽃
16일 오전 9시 40분께, 부산대학교 한 학생이 유신헌법 철폐 등의 내용이 담긴 선언문을 나눠주며 다시 시위를 주도했다.
오전 10시 20분께, 2000명으로 늘어난 학생 시위대가 정문을 향해 나아가고 페퍼포그(최루탄) 차량을 앞세운 경찰은 곤봉으로 학생들을 무차별 가격했다.
오전 11시께, 경찰의 폭력에 격분한 학생들이 대거 참여해 시위대 규모는 3000명으로 더 불어났으며 경찰의 봉쇄와 진압을 피해 시내 진입을 시도했다.
[차성환 전 부마민주항쟁 진상규명위원회 상임위원] “대학생들이 거리에 나오자마자 시민들이 열렬히 박수를 치면서 환호를 하고 먹을 걸 주고 이렇게 하면서 경찰에 쫓겨서 도망치면 숨겨주고. 뿐만 아니라 어둠이 깔리면서 시민들이 학생들과 함께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학생들이 중심이었는데, 어느덧 시민들이 중심이 된 거예요.”
17일 새벽 1시까지 1만 3000여명의 시위대는 번화가 일대에서 모였다 흩어졌다를 반복했다.
▶ 1979년 10월 17일, 부산 시민들의 대규모 유신 반대 시위
16일 부산대 학생 시위 소식이 동아대 학생들에게 전달되고, 부산대에서 시작된 항쟁은 동아대로 이어졌다. 시위 규모는 순식간에 1500명에 이르렀으며, 경찰의 제지에도 부산대 학생들과 합류하기 위해 도심으로 이동했다.
부산대, 동아대 학생들이 시내로 진출하자 시민들이 대거 합세해 시위 규모가 점점 커져갔다.
[차성환 전 부마민주항쟁 진상규명위원회 상임위원] “그렇게 되니까 17일 저녁에서 18일 자정 넘어가는 그 시간에 유신 정부가 부산 일원에 비상계엄령을 선포를 하거든요.”
▶ 1979년 10월 18일, 부산 비상계엄령 선포 그리고 마산 민주항쟁 발발
유신정권은 부산 일원 계엄령 선포와 동시에 총칼과 탱크로 무장한 군과 공수부대를 동원해 시위를 폭력적으로 진압했다.
[차성환 전 부마민주항쟁 진상규명위원회 상임위원] “군대가 들어오는 겁니다. 거기에 공수부대가 오고 해병대가 오고, 지역에 있던 육군이 오고. 이런 사람들은 사실 시위 진압에 보내면 안 되는 거죠 자기 국민들인데….”
유신정권은 부마민주항쟁이 일어나자 관련자를 간첩이나 폭도로 조작했으며 이는 살인적인 고문과 인권 유린으로 이어졌다.
[박상도 부마항쟁 참가자 / 시민운동가 ] “이 사람들이 제일 수습하는 데 좋은 것은 ‘빨갱이’가 폭동을 주도했다는 프레임을 갖다 붙이는 것이었죠. 부마항쟁은 시민들 스스로 일어난 게 아니고 이북의 조종에 의해서 폭동이 일어난 거다 라는 것을 만들어야하니까”
[이일호 부마항쟁 참가자 / 당시 고신대 학생] “옷을 벗겨서 삼각 팬티만 하나 입은 상태에서 거꾸로 매달아가지고는 수건을 들고 코를 막으니까 몸이 요동을 치더라고요.”
[이동관 부마항쟁 참가자 / 당시 동아대 학생] “나 고문 당하면서 간첩맞습니다 했다니까요. 고통을 못 이겨가지고.”
계엄령에도 시민들은 흩어졌다 모였다를 반복하며 시위를 이어갔고 시위는 인접도시 마산에도 영향을 미쳤다. 경남대에서 시작된 시위는 시민들도 합세하여 마산 전역으로 번졌고, 19일 새벽 1시까지 이어졌다.
▶ 1979년 10월 20일, 마산 위수령 발령.
위수령은 육군부대가 지역의 경비와 시시설을 보호하기 위해 내리는 명령이다. 20일 낮 12시 마산 위수사령관은 26일까지 마산과 창원지구 출장소 일원에 위수령을 발동했다.
▶ 1979년 10월 26일, 18년간의 유신 독재 종식.
[차성환 전 부마민주항쟁 진상규명위원회 상임위원]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의 총에 맞아서 서거합니다. 근데 이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방아쇠를 당기게 된 결정적인 이유가 바로 부마항쟁입니다.”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재규는 부마민주항쟁이 일어나자 부산에 와서 현장을 살폈다.
김재규는 부마민주항쟁으로 인해 국내 여론이 심각하다는 것을 인지, 박정희 대통령에게 정치 개혁을 건의했다. 당대 정권의 실세로 통했던 차지철 청와대 경호실장과 박정희 대통령이 강경대응을 주장하며 의견이 충돌하자 1979년 10월 26일, 세 사람이 모인 저녁 자리에서 둘을 총으로 사살했다.
- 1979년 12월 18일, 김재규 군사재판 법정 최후 진술 녹음 중
[김재규 전 중앙정보부장] “차지철 경호실장은 ‘캄보디아에서는 300만 명을 죽였는데 우리 대한민국에서 100만, 200만 명 정도 죽인다고 까짓 거 문제 있겠습니까?’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들으면 소름이 끼칠 일들입니다”
기나긴 박정희 유신독재는 1961년 5·16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지 18년만에 막을 내렸다.
김재규는 1980년 내란 목적 살인 및 내란미수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그해 5월 24일 서울구치소에서 사형됐다.
[전홍 부마항쟁 참가자/당시 생산직 노동자] “‘야 니 살았다’, ‘박정희 죽었다’ 그때부터 욕을 안 하더라고. 형사들도 참 사람이 교활하데. 금방 사람들이 ‘임마’, ‘개새끼’ 하더니 이놈들이 말도 부드러워지고 ‘당신들 참 고생했다’ 하고 우유도 주고….]
[이동관 부마항쟁 참가자 / 당시 동아대 학생] “처음에는 얘기를 안 해주더라고요. 한 30분 있다가 얘기를 해주는데 박정희 서거했다는 거예요. 그 얘기를 듣자마자 유치장에서 우와 하는 함성과 손뼉치고 노래를 한 1시간정도 불렀습니다. 그런 기쁨이 없죠. 박정희 죽었으면 희망이 생기는 거예요.”
▶ 4대 민주항쟁으로 평가받지만
[차성환 전 부마민주항쟁 진상규명위원회 상임위원] “부마항쟁이 일어났을 때는 언론이 보도를 못했어요. 긴급조치 제9호라는 게 있었거든요. 유신헌법을 반대하거나 비판하는 행위들을 보도 자체를 아예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보도하면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처벌을 받아야 돼요. 그래서 부마항쟁의 모습이 제대로 알려지지 못했습니다.
근데 이 10.26 사건은 긴급 조치고 뭐고 너무나 어마어마한 사건이니까. 모든 신문, 잡지, 언론, 방송이 대대적으로 보도를 하지 않습니까. 이 사건에 대한 기억은 우리 국민들의 기억 속에 아주 강하게 박혀있습니다.“
그러나 부마민주항쟁은 4·19혁명(1961), 5·18민주화운동(1980), 6·10민주항쟁(1987)과 함께 한국의 대표적인 4대 민주화운동으로 평가받지만, 40주년이 되는 2019년에서야 국가기념일로 지정되는 등 이제야 그 의미를 찾아가고 있다.
▶ 부마민주항쟁을 어떻게 바라봐야할까
[차성환 전 부마민주항쟁 진상규명위 상임위원] “우리가 부마항쟁을 기념하고 이런 것도 필요하죠. 그러나 기념을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고 오늘날 한국의 민주주의가 어떻게 되어 있느냐. 우리가 유신독재에 반대해서 저항을 했던 그 역사가 그 위대한 역사가 있는데 그 역사의 정신을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되는지 뭘 해야 되는지 이런 것을 고민하는 것이 부마항쟁의 정신을 살리는 길이다라고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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