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약 중독, ‘마약과의 전쟁’ 만으론 끝낼 수 없다 [평범한 이웃, 유럽]
초등학교 2학년인 둘째 아이는 매주 월요일 아침 취리히 도심에 있는 한 고등학교 건물로 등교한다. 일주일에 한 번 학교 수업 대신 자신이 원하는 분야를 더 깊이 공부하도록 하는 취리히시의 프로그램에 따른 것이다. 그런데 첫 수업 직전 교사에게 이런 이메일이 왔다. “학교 인근에서 마약 투약이 증가하는 상황에 대해 모든 교사와 교직원이 경찰로부터 정보를 받았습니다. 쉬는 시간에 아이들만 남겨두지 않고 잘 보겠습니다. 아이들이 학교 주변에서 주사기를 발견하면 만지지 말고 저에게 말하라고 하겠습니다.”
교사의 이메일은 최근 나온 언론 보도 때문이었다. 이 학교 건물이 위치한 도심 지역은 중독자들이 대놓고 마약을 하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는데, 얼마 전에는 평일 아침 학교 근처에서 피 묻은 주사기 여러 개가 버려진 게 발견됐다. 헤로인 투약에 쓰였으리라 짐작되는 주사기 사진 보도는 특히 학부모들 사이에 큰 우려를 일으켰다. 제아무리 훌륭한 교육 프로그램이라도 마약에 쓴 주사기가 버려진 길로 아이가 통학하길 바라는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마약이 어제오늘의 문제는 아니지만, 최근 상황은 우려스럽다. 유엔마약범죄사무소(UNODC)의 2023년 ‘세계마약보고서’에 따르면, 전 세계 성인(15~64세) 인구 17명 중 한 명은 2021년에 마약을 투약한 경험이 있다. 10년 전보다 23% 증가한 수치다. 가장 흔한 마약은 대마초로, 전 세계 성인 인구의 4.3%가 2021년 대마초 투약 경험이 있었다. 암페타민, 코카인 등이 뒤를 이었다. 마약 소비가 증가하는 이유는 단순하지 않다.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인한 몇 차례 록다운 및 재택근무 증가를 지적하는 의견도 있지만 그 영향은 마약 종류마다 다르다. 청소년과 젊은 층이 주로 쓰는 대마초의 경우 팬데믹 때 오히려 소비가 줄었다(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면서 딜러와 접촉할 기회가 줄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보다는 마약 가격이 전반적으로 낮아진 게 원인이라는 주장이 더 그럴듯하다. 스위스 중독협회 프랑크 초벨 부회장은 최근 일간지 〈타게스 안차이거〉 인터뷰에서 “스위스에서 코카인이 요즘처럼 대용량으로 싼값에 거래된 적이 없었다. 로잔(스위스 서부 도시)에서는 순도 70~90%의 코카인 1g을 10스위스프랑(약 1만5000원)에 살 수 있다”라고 말했다.
마약에 대처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다. 예방 및 교육을 우선순위로 두기도 하고, 투약자에 대한 강력 처벌에 집중하기도 한다. 개중에 스위스 사례는 특히 흥미롭다. 1980~1990년대 전 세계 중독자들의 허브로 불릴 만큼 최악의 마약 문제를 겪다가 2000년대 들어 상황이 크게 개선되는 극적 변화를 거쳤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는 다른 나라에서 볼 수 없던 정책이 있었다. ‘해악 감소(harm reduction)’가 그것이다. 간단히 말하면 중독자들이 마약을 끊도록 하는 대신, 중독된 상태에서 더 위생적이고 안전한 방식으로 마약을 투약하도록 도움으로써 이들의 삶의 질을 개선하는 것이다. 직관적으로 잘 와닿지 않는 방식이고 당시에는 국내외의 비판도 거셌지만, 시간이 흐른 뒤 이 정책이 성공적이었다는 평가가 많았다. 이를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 우선 마약 허브였던 1980년대 취리히로 돌아가보자.
헤로인을 처방하는 마약 치료법?
취리히 중앙역 뒤편에는 스위스 국립박물관이 있고, 박물관 뒤로 이등변삼각형 형태의 넓은 녹지가 펼쳐져 있다. 질강과 리마트강이 양쪽에서 합쳐지는 가운데 섬처럼 뾰족하게 빚어진 이 녹지의 이름은 플라츠슈피츠(Platzspitz), 말 그대로 ‘뾰족한 광장’이다. 14세기 말부터 사격장으로 쓰였고, 취리히의 최대 축제인 청소년들의 사격 시합 크나벤쉬센(Knabenschiessen)도 여기서 처음 시작됐다. 시민들의 휴식 공간이던 플라츠슈피츠는 1960년대 말 이후 변화를 맞는다. 당시 서유럽 전역에서 주류 문화를 거부하는 반문화 운동이 퍼지며 마약, 특히 헤로인 소비가 급증했다. 스위스는 주변국보다 훨씬 심했다. 지금도 명확히 원인이 규명되지 않았으나 전문가들은 공급 네트워크가 스위스에서 예외적으로 잘 작동된 것이 이유 중 하나라고 본다. 헤로인은 1980년대 스위스의 큰 골칫거리였다. 최대 도시 취리히에서는 공공 화장실과 거리에서 대놓고 투약하는 사람들이 늘고 시민의 불만도 치솟았다. 취리히 시의회는 중독자들을 일단 한곳에 모아놓고 보자는 생각으로 마약 소비 장소를 플라츠슈피츠로 제한한다는 계획을 1985년 발표했다. 마약을 하려면 이 공원 내에서 해라, 대신 모른 체하겠다는 거였다.
길거리에서 헤로인 중독자가 줄어든 효과는 있었으나, 법망을 피해 마음껏 마약을 할 수 있는 장소가 취리히에 있다는 소문은 유럽 전역으로 빠르게 퍼져 중독자들을 불러모았다. 유서 깊은 시민 공원 플라츠슈피츠에 마약 중독자가 하루 최대 2000명이나 모였다. 이 공원은 이제 ‘니들 파크(Needle Park·바늘 공원)’라는 영어 이름으로 전 세계에 알려졌다. 1985년 스위스의 마약 투약자는 약 1만명이었는데 이 수치는 1988년 2만명, 1992년에는 3만명으로 급증했다. 문제는 헤로인 중독뿐 아니라 그와 연계된 HIV(인체 면역결핍 바이러스) 감염이었다. 스위스 연방보건청 자료에 따르면, 1985년 당시 주사기를 이용하는 헤로인 중독자들의 HIV 감염률은 38%였다. 유로HIV(HIV 감시를 위해 2007년까지 존속한 유럽연합 산하기관)에 따르면, 스위스는 1980년대 유럽에서 HIV 감염률이 가장 높은 나라였다.
이대로는 안 된다는 경각심이 사회에 퍼져나갔다. 취리히의 의사들 중 일부는 헤로인 중독자들의 메타돈(마약이지만 헤로인 중독 치료제로 쓰인다) 이용 문턱을 낮출 것, 사용한 주삿바늘을 새것으로 교환해줄 것 등을 정부에 요청했다. 취리히 정부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러자 1988년 의사 약 300명이 모여 정부가 불법으로 규정한 주삿바늘 교환 자원봉사에 나섰다. 심지어 경찰도 의사들 체포를 거부했다. 당시 상황에 대해 미국과 스위스의 보건학자는 논문 〈스위스, HIV 그리고 실용주의의 힘:마약 정책 개발을 위한 교훈〉(Csetea & Grobb, 2011년)에서 이것이 일종의 ‘시민불복종’ 운동이었다고 규정한다.
자원봉사는 ‘칩-에이즈(ZIPP-AIDS, Zürich Intervention Pilot Project-AIDS)’라는 프로젝트로 이어진다. 이 시점에서 스위스 연방보건청과 취리히시는 개입의 필요성을 인정하고 의사들을 지원하기 시작했다. 스위스 적십자도 협력했다. 1988년에서 1991년까지 ‘칩-에이즈’ 프로젝트를 통해 플라츠슈피츠의 헤로인 중독자들에게 주사기와 바늘 약 280만 개, 알코올 패드 800만 개 등이 무료로 지원됐다. 자원봉사자들이 헤로인 과다 복용 사건에 개입해 중독자의 목숨을 살린 것만 6700건에 달했다. 프로젝트는 플라츠슈피츠 밖에서도 이어졌다. 봉사자들은 공공 화장실이나 거리에서 마약 이용자들에게 B형 간염 백신을 접종했다. 이들의 활동은 크게 주목받았지만 반발도 만만치 않았다. 마약을 끊도록 해야지, 위생적이고 안전한 환경을 만들어주는 건 마약을 더 하라고 부추기는 셈이라는 주장이다. 논란을 거쳐 플라츠슈피츠는 결국 1992년 2월5일 폐쇄된다.
중독자들을 한 장소에 모으고, 돕고, 다시 해체하는 과정에서 스위스 정부와 시민 사회는 교훈을 얻는다. 한 가지 방식으로는 마약에 대처할 수 없다는 교훈이다. 1991년 스위스 정부는 마약 문제에 대응할 ‘네 기둥 정책(four-pillar policy)’을 수립한다. 네 기둥이란 예방, 치료, 해악 감소 그리고 처벌을 뜻한다. 이 중 눈여겨볼 것이 ‘해악 감소’다. 무조건 금지하고 처벌할 게 아니라 중독자들의 투약 환경을 개선함으로써 장기적 효과를 노리는 것이다. 주삿바늘 교체, 백신접종 등이 이에 해당한다. 해악 감소 정책은 1994년 스위스 정부가 주도한 헤로인 조력 치료법(HAT, heroin-assisted therapy)이라는 획기적인 파일럿 프로젝트로 이어졌다. 헤로인 중독 치료제인 메타돈마저 더 이상 듣지 않는 장기 중독자들에게 헤로인을 합법적으로 처방하는 것으로, 대상자는 아침과 저녁 하루 두 번, 각 0.5g이 채 안 되는 헤로인을 관리센터에서 감독이 지켜보는 가운데 주사한다. HAT는 국내외에서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극우 성향의 스위스국민당(SVP)은 이를 금지하려 1997년 ‘해악 감소 반대 법안’을 국민투표에 부쳤으나 반대 70%로 기각되었다. 일반 국민들이 보기에도 해악 감소 정책이 효과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국민의 지지를 업은 HAT는 2023년 현재 전국에 23개 센터를 두고 환자 약 1600명을 치료 중이다.
“마약보다 인간이 중심에 놓여야”
실제 결과는 어떨까. 1994년 헤로인 투약자 중 35세 이하가 약 78%였으나, 2011년에는 이 비율이 17%로 줄었다. 새로운 중독자가 급감했다는 의미다. 1985년 스위스 내 신규 HIV 감염자의 68%는 마약과 관련되어 있었다. 이 수치는 1997년 15%, 2009년 5%로 떨어진다. 또 1990년 신규 B형 간염 감염자 중 51%가 마약중독자였으나 2010년에는 10% 이하였다. 강도, 폭력 등 중독자들의 범죄율도 꾸준히 낮아졌다(위 논문에서 인용). 스위스의 해악 감소 정책에 대한 반응은 엇갈린다. 유럽연합 산하기구인 약물 및 약물중독에 대한 유럽감시센터(EMCDDA)는 스위스의 경험과 증거를 높이 평가하지만, 국제마약감시기구(INCB)는 시종일관 스위스식 접근에 강력히 반대해왔다.
통제가 되는 듯했던 마약이 최근 다시 증가하는 걸 보면 마약을 뿌리 뽑기란 불가능한 듯하다. 상황에 맞춰 유연하고 실용적인 대책을 세울 필요가 있다. 취리히시와 취리히 대학이 대마초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지난달 시작한 ‘취리 칸(Züri Can)’이라는 프로젝트도 하나의 예가 될 수 있겠다. 현재 스위스에서 대마초는 THC(환각을 일으키는 주성분)가 1% 이하인 상품을 스스로 소비할 목적으로 10g 이하를 소유하는 것, 그리고 치료 목적으로 의사에 의해 처방된 것만 합법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암시장에서 유해 물질이 다량 함유된 상품도 쉬이 유통된다. ‘취리 칸’ 프로젝트는 성분 함유량이 명기되어 있고 유해 물질이 없는 고품질 대마초 상품을 합법화할 때 소비자의 소비 패턴과 건강에 나타나는 변화를 연구하는 게 목표다. 앞으로 3년 동안 참가자 2100명이 지정 판매처 21곳에서 다양한 대마초 제품을 구입할 수 있다.
취리히(Zürich)와 대마초(Cannabis)의 앞부분을 따서 지은 이 프로젝트 이름(Züri Can)은 ‘취리히는 할 수 있다’처럼 들리기도 한다. 한국은 어떨까.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예산을 확대 편성했다고 하지만, 대책은 예방교육이나 재활센터 확장 등 새로울 게 없다. 어쩌면 다른 접근법이 필요한 때인지도 모른다. 2016년, 당시 스위스 보건장관이던 알랭 베르세의 유엔 연설 한 토막에서 시작해보는 것도 좋겠다. “마약이 아닌 인간이 현재 생각의 중심에 놓여야 합니다.”
취리히·김진경 (자유기고가)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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