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멸시효’ 위헌에 법무부, UN에선 “존중” 소송에선 “책임 없어” 딴소리 [주말엔]
"국가가 저에게 사과하게 하는 소송은 없습니까?"
62살의 목사, 박만규 씨가 자신을 도와준 변호사들에게 물었습니다. 변호사들은 "그런 소송은 없다. 하지만 손해배상 청구를 할 수는 있다"고 답했습니다.
박 씨가 사과를 받고 싶었던 이유, 이른바 '녹화 공작'으로 알려진 '대학생 강제징집·프락치 강요 공작 사건'의 피해자이기 때문입니다. 박 씨와 박 씨의 대학 동기인 이종명 씨는 군 복무 시절 보안사령부에 끌려가 가혹 행위와 함께 조사를 받고, 풀려난 뒤엔 학교 등에서 보안사의 정보원 역할, 이른바 '프락치'로 활동할 것을 강요 받았습니다.
[연관 기사] ‘녹화 공작’ 연루자 19년간 2,921명…“전역 후에도 프락치 강요” (2022.11.23. KBS1TV 뉴스9)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5608362
이 같은 내용은 이 사건을 조사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화위)가 지난해 진실 규명 결정을 하면서 밝혀졌습니다.
"학생운동 및 사회운동을 파괴하기 위해 대학생을 불법적으로 징집하여 사회와 격리시키고, 이들에게 위협, 폭력, 가혹행위를 통해 전향 및 사찰을 강요하고 국가와 국방에 대한 관념을 훼손함으로써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본질적으로 침해하고, 신체의 자유, 자기결정권, 사상과 양심의 자유등 인권을 총체적으로 유린한 사건이다.
국가와 이러한 불법적인 공작에 관여한 국방부, 행정안전부, 경찰청, 교육부, 병무청, 각 대학 등은 '국방의 의무'를 악용하여 중대한 인권을 심각하게 침해한 사실을 인정하고 피해자들에게 사과해야 한다." - 지난해 12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결정문 중
진화위는 국가가 피해자들에게 사과할 것을 권고했지만, 몇 달이 지나도 이들은 사과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난 5월, 소송을 시작했습니다.
■ 5년 전 헌재 "중대한 인권침해 사건에 장기소멸시효 그대로 적용은 '위헌'"
사실 이 같은 과거사 사건의 당사자들은 지금까지 국가 손해배상 청구 소송에서 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바로 '소멸시효' 문제 때문이었는데요.
소멸시효는 민법에 나오는 개념입니다. 쉽게 말해 법에서 정한 기간 동안 돈을 찾아가지 않으면 돈을 받아갈 권리 등이 사라진다는 것입니다. 특히 국가가 한 불법 행위에 대해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도록 한 '장기소멸시효'는 불법 행위가 발생한 때부터 5년, '단기소멸시효'는 피해자가 진상조사 등을 통 손해나 가해자를 알게 된 날로부터 3년으로 정해져 있습니다.
다시 말해, 인권침해 등을 당한 때부터 너무 오래 시간이 지났기 때문에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없다는 논리로 소송에서 지는 경우가 많았던 겁니다.
그런데 5년 전 있었던 헌법재판소의 결정으로 양상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헌법재판소는 2018년 8월, 민간인 집단 희생 사건이나 중대한 인권침해 등 피해자가 낸 국가배상 청구 소송에서 '장기소멸시효' 제도를 그대로 적용하는 것은 헌법에 어긋난다고 판단했습니다.
"국가가 소속 공무원들의 조직적 관여를 통해 불법적으로 민간인을 집단 희생시키거나 장기간의 불법구금·고문 등에 의한 허위자백으로 유죄판결을 하고 사후에도 조작·은폐를 통해 진상규명을 저해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불법행위 시점을 소멸시효의 기산점으로 삼는 것은 피해자와 가해자 보호의 균형을 도모하는 것으로 보기 어렵고, 발생한 손해의 공평·타당한 분담이라는 손해배상 제도의 지도원리에도 부합하지 않는다." - 2018년 8월 30일, 헌법재판소 결정문 중
이 같은 사건들은 오랜 시간 불법 행위가 은폐돼 진상규명이 저해된 것들인데도 불법이 발생했던 때를 기준으로 소멸시효를 따지는 건 법이 정한 취지에 맞지 않다는 뜻입니다. 다만, 재심 등으로 유죄 판결이 났거나 진상규명 결정이 있은 때로부터 3년 내에 손해배상 청구를 해야 한다는 '단기소멸시효'는 인정했습니다.
헌재 결정에 따라, 대법원 등에서도 과거사 사건에 대해서 '장기소멸시효' 적용을 배제하고 있습니다. 2019년 '구로농지 강탈 사건'에 대해서 대법원은 헌재 결정을 주요 근거로 국가배상 책임을 인정한 원심을 확정했습니다. 지난해 12월에도, '거창 양민학살 사건' 유가족들이 낸 국가배상 소송에서 대법원은 원고 패소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부산지법으로 돌려보냈습니다.
[연관 기사] 대법원 “거창 사건 국가배상 판단 다시 하라” 파기환송 (2022. 12. 14.)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5625761
■ 정부법무공단 "배상 못 해"…근거는 다시 '소멸시효'?
박만규 씨와 이종명 씨의 소송 이야기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이들은 대한민국을 상대로 소송을 냈습니다. 우리 정부에 대한 국가 손해배상 등 소송은 법무부 산하 공공기관인 '정부법무공단'이 맡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번 사건의 소송대리 또한 정부법무공단이 맡게 됐습니다.
이 사건에 대한 답변서에서, 정부법무공단은 박 씨와 이 씨의 청구를 모두 기각하는 판결을 내려달라고 적었습니다. 정부는 이들에 대해 손해배상을 할 수 없다는 취지였습니다.
그 이유는 이미 헌법재판소에서 적용을 배제하자고 했던 '소멸시효'였습니다.
소송을 낸 박 씨와 이 씨가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는 때는 1983년,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이기 때문에 공단은 피해가 있었던 시점으로부터 5년이 훌쩍 지났으니 손해배상 청구를 할 수 있는 권리가 사라졌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같은 논리는 다른 소송에서도 확인됩니다.
김모 씨의 오빠는 제주4·3사건에 휘말려, 1949년 반정부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국방경비법 위반 유죄 판결을 받아 사형 됐습니다. 이밖에도 김 씨의 아버지와 언니, 고모 등이 2005년부터 2019년까지 제주4·3사건의 희생자로 인정됐습니다.
김 씨는 자신의 오빠가 사형된 사건에 대해 2021년 제주지방법원에 재심을 청구했고, 같은 해 무죄가 선고됐습니다. 당시 재판부는 판결을 선고하면서 "오늘 이 판결의 선고로 피고인과 그 유족에게 덧씌워진 굴레가 벗겨지고, 나아가 이미 고인이 된 피고인은 저승에서라도 이제 오른쪽 왼쪽을 따지지 않고 낭푼(양푼)에 담은 지실밥(감자밥)에 마농지(마늘장아찌)뿐인 밥상이라도 그리운 사람과 마음 편하게 둘러앉아 정을 나누는 날이 되기를, 그리고 살아남은 우리는 이러한 일이 두 번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다짐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덧붙여 고인과 유가족을 위로했습니다.
이후 김 씨는 정부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냈습니다.
이 사건에서도 공단 측은 불법 행위가 있었던 때로부터 5년이 지나 장기소멸시효가 지났고, 또 진상조사 결과가 있은 지 3년이 지나 단기소멸시효 또한 지났기 때문에 배상 책임이 없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 정작 법무부는"헌재 결정·대법원 판결 존중하고 있다"
정작 이 사건들의 법률상 당사자이자 공단의 상급 기관인 법무부는 대외적으로 다른 입장을 밝혀 왔습니다.
지난 8월, 제54차 UN 인권이사회에서 우리 정부는 아래와 같은 내용을 적은 의견서를 냈습니다.
"법무부는 중대한 인권침해 피해자가 장기소멸시효로 인해 자신의 권리를 온전히 행사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국가배상청구 소송에 관여하는 관련 정부기관이 위 헌법재판소 및 대법원 결정을 존중하도록 조치하고 있습니다. "
- 지난 8월 29일, 제54차 UN인권이사회 대한민국 정부 측 의견서 중
이와 관련해 박용진 국회 법제사법위원(더불어민주당)이 법무부로부터 제출받은 답변 자료를 봐도, 법무부는 "국가배상소송을 수행하는 각 행정청이 헌법재판소 결정과 대법원 판결을 존중하여 소송을 수행하도록 지휘함으로써 중대한 인권침해 사건 등에서 피해자들의 권리 행사가 객관적 소멸시효로 인해 제한되는 일이 없도록 조치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정부가 UN과 국회에 밝힌 내용과 정부가 실제로 소송에서 주장하고 있는 내용은 정반대입니다. 앞서 정부가 UN과 국회에 밝힌 내용이 사실이라면, 정부법무공단은 소송의 당사자인 법무부 뜻과는 다르게 소송을 수행하고 있는 셈이 됩니다.
KBS는 법무부에 이 같은 내용이 법무부의 소송 지휘에 따른 것인지,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 공단에서 이 같은 주장을 하게 된 경위는 무엇인지 물었습니다. 하지만 법무부는 "특정 사건, 특정 당사자에 대해 현재 재판이 진행 중인 사안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답변드리기 어렵다"고만 답했습니다.
정부법무공단 측도 "개별 사건의 구체적 진행에 관해선 답변하지 않는다"며 공식 입장을 밝히지 않았습니다.
■ "국가의 2차 가해…왜 권리 안 지켜주나"
소송을 제기한 피해자 측은 이 같은 정부의 입장이 "국가의 2차 가해"라고 주장합니다.
박만규 씨의 소송대리를 맡은 최정규 변호사는 "정부 측은 진화위 권고 결정이 있었음에도 입증이 부족하다는 등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고, 소멸시효 항변 등 무책임한 소송 진행을 하고 있다"며 "이를 별도의 불법 행위로 구성해서 위자료를 증액 청구하려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소송 당사자인 박만규 씨도 "우리는 헌법상의 의무인 '국방의 의무'에 동원됐다가 정부 이데올로기를 위해 인권 침해를 당한 사람들인데, 소멸시효가 지났다고 해서 엉뚱한 얘기를 하는 걸 이해할 수가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진실규명이 된 날로부터 3년 이내에 국가배상을 청구해야 한다는 걸 공단이 모를 리가 없다. 이건 국민들의 권리를 한 번 더 짓밟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도 덧붙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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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숙 기자 (vox@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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