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스토리] 73년 전 '유모차 수송작전'을 아시나요?
['제주스토리'는 제주의 여러 '1호'들을 찾아서 알려드리는 연재입니다. 단순히 '최초', '최고', '최대'라는 타이틀에만 매몰되지 않고, 그에 얽힌 역사와 맥락을 짚을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또한 그 속에 담긴 제주의 가치에 대해서도 전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제주도에 전국 최대 규모의 보육원이 있었다는 사실 혹시 들어보셨나요?
한국전쟁 당시 고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이른바 '유모차 수송작전(The Kiddy Car Airlift)'이 전개됐는데, 이 작전으로 천 명에 육박하는 어린이들이 제주도로 오게 된 것이 그 시초라고 합니다.
절대적 빈곤과 배고픔, 혼란 속에서도 미래세대를 보호하기 위해 헌신했던 사람들에 대해 알아봤습니다.
■ 1천 개의 '유모차', 하늘 날아 제주로
한국전쟁이 발발한 해인 1950년 12월.
국가보훈부 등에 따르면, 당시 중공군의 참전으로 서울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게 되자, 딘 헤스 대령과 블레이즈 델 대령은 서울에 남은 약 950명의 고아와 80명가량의 고아원 직원들을 제주로 옮기는 '유모차 수송작전'을 펼치게 됩니다.
당시 작전에는 수송기 16대가 동원돼 김포 군사공항에서 제주로 어린이들을 수송했다고 합니다.
이 작전에 참여한 딘 헤스 대령은 훗날 '전쟁고아의 아버지'로 불리게 되는데, 올해 5월엔 국가보훈처의 '한미 10대 참전영웅'으로 선정돼 미국 뉴욕 타임스퀘어 광장에서 홍보 영상이 상영되기도 했습니다.
수송기를 타고 제주에 도착한 아이들은 미군 트럭에 나눠 태워져 수용 장소인 제주농업학교(현재 한국토지주택공사 제주지사 일대)로 옮겨졌고, 이후 연령별로 천막과 교실 등에 분산 수용됐다고 합니다. 사무실, 의무실, 창고, 취사장 등도 임시로 마련됐다고 합니다.
당시 아이들을 보호했던 곳이 한국보육원이었는데, 이 수송작전과 함께 자연스럽게 제주에 자리 잡게 됐습니다.
한국보육원의 원래 명칭은 서울시립아동양육원으로, 유엔(UN)군의 지원으로 전쟁고아를 보호하기 위해 설립(1950년 10월)된 민간 보육원이었다고 합니다. 이 시설은 제주로 자리를 옮긴 이후인 1951년 3월 한국보육원으로 이름이 바뀝니다.
원장은 황해도 연백 출신의 당시 50대 초반의 여성 황온순 씨로, 이승만 대통령의 권유로 원장직을 맡게 됐습니다.
UN 지원을 받아 설립됐다고 해서 제주도민들은 한국보육원을 'UN고아원'이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합니다.
한 기록에는 한국보육원이 서귀포시 서홍동에 있는 현재 제남보육원 자리에서 운영됐다는 내용도 있습니다.
한국보육원외에도 명진보육원, 화생보육원 등이 당시 전란을 피해 다른 지역에서 제주도로 옮겨 왔습니다.
그러나 한국보육원을 제주도 최초의 보육원이라고 단정 짓기는 조심스러운 점이 있습니다.
이 시설에서 보호하는 아이들은 소위 육지에서 피난 온 아이들에 한정됐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제주도엔 제주4·3으로 부모를 잃은 제주 아이들이 많았지만 이들을 돌볼 시설은 이때까지도 전무했다고 합니다.
최초로 생겨난 전국 최대급 규모의 보육원이었던 것은 맞지만, 이를 두고 쉽사리 제주도 최초 보육원이었다고 단정 지어 말하기 어려운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한국보육원은 1956년 11월 다시 서울로 옮기게 됐고, 1970년 경기도 양주군으로 다시 자리를 옮겨 현재까지 운영되고 있습니다.
■ 제주 아이들을 위한 보육원
제주 아이들을 위한 보육원이 처음 생긴 것은 1951년 4월입니다.
제주도사회복지협의회가 발간한 『제주사회복지 발자취(1996)』에 따르면, 제주 최초의 보육원인 제주보육원 개원엔 인천에서 넘어온 명진보육원의 이사장인 허천만 씨가 관여했습니다.
허천만 씨가 제주 삼성혈에 부모를 잃은 제주도 어린이만을 보호할 목적으로 천막시설을 지어 운영을 시작했습니다.
당시 보호 아동은 남녀 85명으로 제주4·3의 피해가 컸던 제주시 조천읍 함덕, 북촌, 선흘, 송당 등 제주 동부지역의 어린이들이 주를 이뤘습니다.
허씨는 서울이 수복되자 1952년 육지부로 돌아가게 됐고, 이를 이어 실질적인 초대 원장으로 평가받는 탁명숙 당시 대한부인회 제주지회장이 시설의 운영을 맡게 됐습니다.
많은 수의 아이들을 보호하다 보니 생활공간이 부족해졌고 제주시 용담동과 화북동으로 몇달 간 자리를 옮겨 다니다가 1952년 9월에야 지금의 위치인 제주시 내도동에 있는 현재 자리에 터를 잡게 됐습니다.
정부 지원을 기대할 수 없었던 당시 시대상으로 인해 보리밥과 소금국으로도 허기진 배를 채울 수 없었다고 합니다. 미군 부대와 비영리단체인 월드비전의 지원은 절대적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교육열이 뜨거워 거의 모든 원아가 고등학교까지 졸업했습니다.
강지영 현 제주보육원장은 선대 원장으로부터 당시 미군이 보육원의 돌담을 쌓는 일을 도왔다는 이야기나, 구호단체로부터 현금을 받아와 보육원 살림을 꾸렸다는 등의 이야기를 들었다고 전했습니다.
1955년에는 서귀포시 대정읍 모슬포에 있는 미군의 지원을 받아 40평 규모의 원사 2동을 신축했고, 기존에 있던 30평 크기의 건물과 함께 100여 명의 어린이가 생활할 수 있는 최초의 시설을 확보했습니다. 1980년에는 열악한 시설을 개선하기 위해 독일 세계식량기구에 계획서를 제출해 3만 마르크의 지원금을 타내기도 했습니다.
강지영 원장은 "보육원 운영에는 월드비전의 지원이 컸다"며 "당시 계좌이체도 없던 시절에 원장님이 직접 일명 '007가방'을 들고 서울로 가서 월드비전 관계자에게 현찰로 운영비를 받아와 보육원을 운영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민항기가 없어서 군용기를 이용했다고 한다"라고 말했습니다.
한편, 현재 제주보육원에는 대학생을 포함해 53명의 원생이 있습니다. 2대 원장인 탁명숙 원장에 이어 강도아 3대 원장이 1971년부터 2009년까지 시설 운영을 맡았고, 현재는 4대 원장인 강지영 원장이 아이들과 생활하고 있습니다.
제주도엔 제주보육원을 비롯해 홍익아동복지센터, 제남아동센터, 천사의집 등의 보육원 시설이 운영되고 있습니다. 이 보육원들은 모두 1950년대부터 문을 열어 아이들을 보호해 오고 있습니다.
JIBS 제주방송 신동원 (dongwon@jibs.co.kr)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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