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기난동? 함부로 생략돼선 안 될 어느 ‘특수협박범’의 서사
발달장애·형제복지원 피해자, 칼 들고 거리 나왔다가 체포…경찰 위법 수사 논란 속 재판 중
“생년월일이 어떻게 되십니까?”
피고인에게 진술 거부권을 고지한 재판장이 물었다. 재판장의 질문을 받고 고민하던 피고인이 말했다.
“○월○일밖에 몰라요. 글씨를 모르니까요.”
법원 경위가 피고인석으로 다가가 판사의 질문을 다시 전했다.
“태어난 해 모르세요?”
“네? 태어난 해요? 언제 태어났냐고요?”
법정에 짧은 정적이 흘렀다. 피고인의 변호인이 판사에게 설명했다.
“피고인에게 발달장애가 있습니다. 지적장애가 있어서 숫자나 한글도 잘 읽지 못합니다.”
한달 전 ‘서울의 밤거리를 공포에 몰아넣은 특수협박범’으로 떠들썩하게 보도됐던 ‘60대 남자’의 첫 재판이 9월11일 오후 서울중앙지방법원(형사20단독 서수정 판사)에서 이렇게 시작됐다.
긴급체포와 긴급 탄원
피고인 유철용(가명)은 지난 8월17일 밤 경찰에 긴급체포됐다. 1시간 전 그는 칼을 들고 서울 종로구 대학로에 있는 자신의 집을 나섰다. 골목 안쪽에서 시민들의 통행이 잦은 거리로 휘청이며 걸어 나가 소리를 질렀다. 칼을 보고 놀란 시민들이 자리를 피하거나 뒷걸음쳤다. 유철용은 상해를 입힌 사람 없이 집으로 돌아갔다. 3건의 신고가 경찰에 접수됐다. 시시티브이로 동선을 확인한 경찰이 출동해 집에서 그를 체포했다. 18일 구속영장이 신청됐다. 19일 영장실질심사를 받고 20일 구속됐다. 23일 검찰로 송치돼 9월1일 기소됐다. 열흘 뒤 첫 재판이 열렸다. 신속하고 단호하게 처리됐다.
체포 이튿날 오전부터 기사들이 나왔다. ‘밖에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려 다 죽이려고 나갔다’는 진술이 경찰의 전언으로 보도됐다. 경찰이 제공한 시시티브이 영상이 방송 뉴스에 물려 ‘흉기 난동’의 증거로 퍼져나갔다. 무차별범죄와 거짓 살인 예고가 유행처럼 번지면서 경찰청장이 특별치안활동을 선포(8월4일)하고 2주째 되던 시점이었다. 사건 당일은 서울 관악구 신림동 등산로에서 30대 여성이 둔기에 폭행당해 숨진 날이기도 했다. 8월18일 오전 뉴스에서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폭처법) 적용을 말하던 경찰의 방침이 이날 밤 유철용의 구속영장 신청 사실을 전하는 보도에선 한층 강경해져 있었다. 경찰은 ‘칼을 든 모습에서 공포심을 느꼈다’는 목격자 진술을 토대로 죄명을 ‘특수협박’으로 변경했다.
“방청석에 피고인의 신뢰관계인이 와 있는데 ‘보조인’으로 참여할 수 있을까요?”(9월11일 재판)
검사가 기소 요지를 설명하기 직전 유철용의 변호인인 장서연 변호사(공익인권법재단 공감)가 재판장에게 요청했다. 공동변호인인 박영아 변호사(공감)도 말했다.
“오랫동안 보살펴온 분이어서 피고인의 진술을 도울 수 있습니다.”
발달장애인 권리보장 및 지원에 관한 법률(발달장애인법) 12조는 발달장애인이 재판의 당사자가 되거나 증인으로 신문받는 경우 형사·사법 절차가 보장해야 할 권리를 규정하고 있다. 보호자, 발달장애인지원센터 직원, 신뢰관계에 있는 사람이 보조인이 되거나 동석하도록 해야 한다.
고심하던 판사가 검사의 의견을 물었고 검사도 “허가해주셔도 좋을 것 같다”며 동의했다. 방청석에 있던 이동현(홈리스행동 상임활동가)이 유철용의 옆자리로 옮겨 앉았다. ‘여기 있으니 안심하라’는 듯 유철용의 다리를 살짝 두드렸다. 긴장한 유철용이 그와 짧게 눈을 맞췄다.
“앞으로도 계속 동석할 예정이신가요?”
판사가 묻자 이동현은 “예”라고 답했다. 그는 경찰 조사와 영장실질심사 때도 신뢰관계인 자격으로 조력했다. 수사·재판 과정에서 신뢰관계인은 장애가 있는 피의자·피고인에게 용어를 쉽게 풀어주거나 ‘함께 있다’는 사실로 정서적 안정을 주는 역할 등을 한다.
8월17일 밤 이동현은 휴대전화를 무음으로 돌린 뒤 잠들었다. 이튿날 아침 깨어났을 때 새벽 1~2시께 유철용이 남긴 부재중 전화 기록이 있었다. 아침 7시엔 그의 입감 사실을 알리는 경찰 문자가 날아왔다. 놀란 이동현이 경찰서로 전화해 상황을 파악한 뒤 홈리스행동 전·현직 운영위원인 박영아·장서연 변호사에게 법률 지원을 부탁했다. 영장실질심사가 8월19일 오후 2시30분으로 잡히자 그와 동료 활동가들은 긴급 탄원을 조직했다. 단체 명의의 탄원서를 쓰고 유철용이 오래 활동해왔던 홈리스야학의 학생·교사들 탄원서를 모았다. 시민들의 참여도 호소했다. 심사 당일 오전 11시부터 오후 1시까지 2시간 만에 1015명의 시민이 서명하며 불구속 수사를 탄원(법원은 범행의 중대성, 도주 우려와 재범 위험을 들어 구속영장 발부)했다.
“유철용님이 현상을 오해하여 칼을 들고 밖에 나가 소리를 지른 행위는 분명 발생하지 않았어야 하고 공포스러운 행위”라면서도 “그가 평소에도 괴성을 질렀다는 주변인들의 목격담을 전하며 마치 습관성 범죄자인 양 보도”하는 언론에 유감을 표했다. 지금까지 “그의 과잉행동이 타인을 향한 물리적 위해로 이어지는 일은 단 한번도 없었다”고 그들은 강조했다.
“소리 지르기는 유철용님의 가장 익숙한 절박함의 표현(이며…) 도움 요청의 신호입니다.”
그의 몸에 차곡차곡 쌓인 ‘쟁점들’을 이해할 때만 그의 행동과 괴성에 대한 책임도 ‘정확하게’ 물을 수 있다는 뜻이었다. 범죄자에게 서사를 부여해선 안 된다지만 함부로 서사를 생략해선 안 되는 ‘범죄자’도 있었다.
그의 몸에 쌓인 ‘쟁점들’
“서울역에서 오후 2시부터 저녁 8시까지 접수.”
2020년 12월7일 한종선 형제복지원 피해생존자 모임 대표가 페이스북에 공지글을 올렸다. 그는 전국을 돌며 피해자들의 진실규명 신청을 받고 있었다. 사흘 뒤 2기 활동을 시작하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 집단진정을 하기 위해서였다. 개별 접수가 쉽지 않은 피해자들을 고려해 주요 기차역에 테이블을 놓고 직접 신청서를 받았다. 그가 알린 서울역 접수 일정은 12월9일이었다.
글을 본 홈리스야학 교사 주장욱(28)이 동료 교사·활동가들과 상의했다. 평소 유철용은 형제복지원 시절의 고통스러웠던 시간을 띄엄띄엄 떠올리곤 했다. 장애가 기억들을 파편화했지만 “노란 완장 찬 사람들이 강제로 봉고차에 태워 입소시켰다”로 시작해 “곡괭이와 빠따로 맞”고, “기절도 몇번” 하고, “사람들이 엄청 많이 죽었다”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일관됐다. 그의 사례는 2013년 10월 ‘형제복지원 사건 진실규명을 위한 대책위(준)’가 주최한 피해자 증언대회의 자료집(‘살아남은 아이들의 낮은 목소리’)에도 수록돼 있었다.
‘친구들’이 그의 진실규명 신청을 돕기로 했다. 주장욱이 유철용과 서울역으로 나갔을 때 피해자들이 줄을 서서 신청서를 쓰고 있었다. 주장욱이 대신 정보를 기입하는 동안 “한종선 대표는 ‘할아버지’(유철용의 야학 활동명)가 기억들을 꺼내놓을 때마다 ‘맞다’며 확인해줬”다. 한종선은 그의 신청서를 더해 전국에서 받아 온 170명의 서류를 이튿날 진실화해위원회가 2기 활동을 개시하자마자 ‘1호 진정 사건’으로 접수시켰다. 지난해 1월 위원회 조사관들이 야학을 방문해 유철용의 진술을 청취했을 때도 주장욱은 신뢰관계인으로 동석했다. 7개월 뒤 ‘형제복지원 인권침해 사건’으로 피해를 인정(8월23일)받은 신청인 191명 중엔 유철용의 이름도 있었다.
“신청인은 4소대에서 생활하였다고 하고, 흙을 담아서 벽돌을 찍고 담을 쌓는 일과 낚싯바늘 만드는 일에 동원되어 강제노동을 했다고 진술하였다. 소대에서는 나룻배, 원산폭격, 담에 다리를 올리고 벌을 서는 등의 단체 기합을 받았다고 하였다. (…) 신청인은 장애 특성상 시기를 특정하는 것에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기억에 남은 상황들은 비교적 명확하게 표현했는데, 기록으로 입증되는 바가 있다.”(진실규명 결정통지서)
유철용은 고아였다. 출생은 신고되지 않았다. 그의 기억으로는 “9살 때 부모가 서울역에 두고 갔”다. “은평구의 아동보호소”로, “경주와 포항의 고아원”으로, 보내지고 다시 보내졌다. 1983년에야 1962년생으로 호적을 얻었으나 정확한 나이는 불분명했다. 시설을 옮겨 다니며 폭행과 배고픔을 견디며 살았다. 어느 단계에선가 신체 중요 부위의 회복할 수 없는 훼손을 겪었다.
형제복지원을 탈출했을 때 그를 맞은 것은 폭력과 구분되지 않는 가난이었다. 수박·참외 농가 등에서 무임금 노동을 제공하며 숙식을 구했다. 전국을 떠돌며 연탄 가게, 떡 공장, 양계장, 기도원, 노숙인요양원, 컨테이너 박스, 쪽방 등에서 지냈다. 마지막은 서울역·회현역 노숙이었고 그 고된 길들마다 질병이 동행했다.
그는 뇌경색과 급성신부전 등을 앓았다. 지난 3월 의식을 잃고 쓰러진 그는 집을 방문한 야학 학생에게 발견돼 한달 넘게 입원했다. 쇠약한 다리 탓에 자주 넘어졌다. 고시원 계단에서 굴러떨어져 팔이 부러지거나 목이 꺾여 병원으로 실려 가는 일이 일상이었다. 체포·구속 뒤에도 계속 넘어졌다. 경찰 조사를 받으러 이동하다 넘어졌고 영장실질심사를 받고 퇴정하다 넘어져 “통곡”했다. 검찰 대기실에서 검사실로 올라가던 중에도 중심을 잃고 계단에 얼굴을 부딪쳤다. 홈리스행동 일로 유철용과도 친분이 있던 변호인들은 “법정에 출석한 그의 얼굴이 너무 부어 있어 놀랐”다.
그는 장애등급제 폐지 이전에 2급의 지적장애(35~49의 지능지수와 3~7살의 정신연령)를 판정받았다. 인과관계 파악이 서툴렀다. 칼을 들고 나간 일도 집 앞 골목으로 택배 오토바이가 지나가며 낸 소음을 자신을 괴롭히는 소리로 오해해 발생했다. “지적장애 특성상 소리를 지르는 행위는 인지의 어려움으로 인한 매우 단순한 형태의 의사표현 방식”(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 탄원서)이었다. 그의 괴성은 오랜 폭력과 험한 삶의 경로가 누적된 몸의 비명과도 같았다. “공작새가 깃털을 부풀리듯 자신이 약하지 않다는 것을 과장하는 몸짓일 뿐 그를 아는 사람들 누구도 위협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이동현)다.
칼을 휘둘러 죽일 듯 협박?
체포 이튿날 오후 장서연 변호사와 이동현 신뢰관계인이 입회한 첫 경찰 조사가 있었다. 경찰은 특수협박을 입증하기 위해 ‘다 죽이겠다며 칼을 들고 나간 것이 맞는지’를 주로 확인했다.
사건 초기 경찰이 거론했던 폭처법 7조는 “정당한 이유 없이 범죄에 공용(供用)될 우려가 있는 흉기나 그 밖의 위험한 물건을 휴대하거나 제공 또는 알선한 사람”을 ‘우범자’로 처벌했다. 3년 이하의 징역이나 3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했다. 특수협박(형법 제284조)은 “단체 또는 다중의 위력을 보이거나 위험한 물건을 휴대하여” 사람을 협박하는 경우였다. 7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만원 이하의 벌금을 부과했다. 유철용이 특정인을 겨냥해 협박했는지가 관건이었다.
“(경찰은) 범행을 사전에 준비한 정황 등이 드러나면 살인예비 혐의를 적용하는 것도 검토하기로 했습니다.”(YTN ‘흉기 들고 대학로 활보한 남성…“밖이 시끄러워서”’)
두 사람이 조사실에서 나왔을 때 경찰서에서 틀어둔 보도채널의 뉴스가 그들 귀에 꽂혔다. 언급되는 처벌 수위가 “점점 강화되고”(이동현) 있었다.
발달장애인법은 법원에 지운 의무를 수사기관에도 동일하게 부과(12조 4항)했다. 조사·신문도 발달장애인 전담 검사와 전담 사법경찰관이 하게(13조) 했다. 사실관계 진술에 어려움을 겪는 발달장애인 조사의 전제조건들이었다. 유철용 긴급체포 직후 경찰은 변호인·신뢰관계인의 조력 전에 받은 그의 진술을 시시티브이 영상과 함께 언론에 공개했다. 당시 사회적 공포와 맞물려 ‘도시를 활보한 흉악범’의 영상으로 빠르게 전파됐다. 장애인차별금지추진연대는 “경찰의 행위는 그 자체로 위법”이라며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을 준비하고 있다.
“발달장애인들은 자신이 처한 상황 자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체포·연행 중 경찰이 당사자의 장애를 분명 인지했을 텐데도 조력자 없이 받은 진술을 언론에 노출해 방어권을 행사할 수 없는 장애인을 더욱 궁지로 몰았다.”(김성연 사무국장)
“최근 탈시설 등 지역사회로 나와 생활하는 발달장애인들이 조금씩 늘면서 그들의 행동에 이해가 부족한 비장애인들의 신고로 경찰이 출동하는 사례도 잦아지고 있”(김성연)다. 연행·조사 과정에서 인권침해 논란이 잇따르자 인권위는 경찰청장에게 ‘발달장애인 대상 현장대응 매뉴얼’ 마련을 권고(2021년 12월27일)했다.
경찰 대응을 둘러싼 문제제기는 끊이지 않고 있다. 지난 5일엔 발달장애인 9명이 경찰 등의 차별행위를 시정해 달라며 인권위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8월29일 고용노동부는 ‘중증장애인 지역맞춤형 취업지원사업’(동료지원가 사업) 예산 23억원을 전액 삭감했다. 중증장애인의 사회참여와 일자리 찾기를 돕던 장애인 동료지원가 187명이 일을 잃게 되면서 피플퍼스트와 장애인자립생활센터 활동가 등 27명이 9월18일 장애인고용공단 서울본부 상담실에서 농성을 벌였다. 그들은경찰에 현행범으로 체포되는 과정에서 “장애를 고려하지 않은 폭력적 연행”과 조력 받을 권리 침해 등이 발생했다며 인권위에 “강력한 시정 권고”를 요구했다.
“변호인 의견 밝혀주시기 바랍니다.”(9월11일)
검사의 기소 요지를 들은 뒤 판사가 주문했다. 장서연 변호사가 답했다.
“피고인이 흉기를 휴대하고 걸어간 것은 맞지만 협박을 했는지는 사실 확인이 필요합니다. 저희가 아직 수사기록을 확인하지 못해서 확인한 뒤 의견 밝히도록 하겠습니다.”
240자짜리 단 한 문장으로 작성된 검찰의 ‘공소사실’엔 유철용이 “피해자들에게 칼을 휘둘러 죽일 듯이 협박하였다”고 적혀 있었다. 변호인들은 첫 재판 일주일 뒤에야 수사기록 등을 열람·등사할 수 있었다. 유철용이 칼을 휘두르는 모습은 증거 영상에 없었다. 누군가를 ‘죽일 듯이 협박’하는 장면도 확인되지 않았다. ‘칼을 들고 30분간 거리를 배회했다’고 보도됐으나 유철용은 집에서 나온 지 5분 만에 집으로 돌아갔다. 변호인들은 “사회적 분위기와 특별치안활동 국면에서 경찰이 혐의를 과도하게 부풀린 것으로 보고 특수협박에 대해 무죄를 다툴 계획”이다. 이동현은 “시민들에게 두려움을 준 행위는 잘못이지만 잘못한 만큼만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했다. 사건을 지휘한 경찰 관계자는 반박했다.
“(특수협박 적용 이유는?) 공포심을 느꼈다는 신고자의 진술이 있었다. 꼭 칼을 가지고 사람 몸에 대며 죽이겠다고 해야만 협박이 (성립)되는 게 아니다. 판례 등을 보면 그런 행위가 없더라도 협박죄가 되는 경우가 많이 있다. (실제 칼을 휘두른 게 맞나?) 공소장에 (휘둘렀다고) 나와 있다면 검찰에 확인하는 게 맞지 않겠나. (송치 내용은 어땠나?) 이미 송치했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말씀드리지 않겠다. (입회 조력 전에 받은 진술을 언론에 공개한 까닭은?) 긴급 상황에서 일어난 객관적 내용을 꼭 신뢰관계인 참여 뒤에 언론에 내야 되나. 신뢰관계인이 참여해서 조사한다고 칼 들고나온 사실이 없어지는 건 아니지 않나.”
20년을 옆에서
“저런 일이 일어나면 지금까지는 경범죄 처벌 정도로 굉장히 관대한 처분을 하고 상당 부분 경고만 한 채로 귀가시키는 일들이 많았는데.”
대학에서 범죄심리학을 가르치는 한 유명 교수가 8월18일 오후 한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해 유철용의 행동을 분석했다. 붉고 굵은 글씨의 “홧김에 다 죽이려고”가 화면 자막으로 나간 뒤 교수가 말했다.
“흉기를 들고 다녔으니까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겨누기만 했으면 충분히 협박죄도 적용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에 (…) 법률적으로 불법행위에 대해 처분하면서 강제입원 치료를 시키는 게 지금 꼭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채널A ‘뉴스 TOP10’)
모두가 손쉬운 ‘처벌’과 ‘격리’를 말할 때 그보다 어려운 ‘함께 살기’를 택한 사람들이 있었다.
“지하철을 반대로 환승하는 바람에….”
9월11일 재판 방청을 위해 법원으로 오던 림보(활동명·57·야학 학생회장)는 결국 시간을 맞추지 못했다. “방청석에 앉아 있는 모습을 보여줘서 할아버지 마음이 조금이라도 안정되길 바랐는데 늦어버렸”다. “아이엠에프 때 다니던 회사가 망한 뒤 거리 생활을 시작”한 그는 2001년 서울 회현역에서 유철용을 처음 만났다. 두 사람은 지하도에서 붙어 잤다. 이동현 등과의 인연도 그때 시작됐다. 유철용은 핏줄로 엮인 사람 없이 혼자였지만 그의 곁에 아무도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한글과 글쓰기 등을 배우고 가르치며 그와 함께 반빈곤활동을 해온 야학 친구들이 오랜 시간 그를 지켜왔다. 구속으로 비어버린 대학로 집도 림보와 친구들이 찾아가 청소했다.
지난해 9월 입주한 그 매입임대주택은 유철용 평생에 ‘집이라고 부를 수 있는 첫 집’이었다. “할아버지 다리를 생각해서 엘리베이터 있는 빌라를 찾아다녔지만 기회가 안 나 어쩔 수 없이 1.5층에 있는 집을 얻었”(이동현)다. “집까지 계단이 8개인데 벌써 여러 차례 넘어졌”다. 이사 직후 유철용은 야학 친구들에게 말했다.
“(그동안 살아온 곳들 중) 지금 살고 있는 데가 제일 좋아. (…) 따뜻하고, 조용하고, 혼자 밥 먹을 수 있고, 세탁기도 갖다 놨으니까 이제 옷도 빨고. 티브이도 있고 전자레인지도 있고 냉장고도 있고. (…) 고시원은 말할 게 없어. 다 싫어. 쪽방도 싫고 다 싫어.”(2022년 가을학기 ‘홈리스야학 글쓰기반 문집’)
홈리스행동 활동가들과 야학 교사들이 수년에 걸쳐 작성해온 유철용의 ‘상담기록’엔 그가 지역사회에서 한 시민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옆에 있어준’ 수고들이 날짜별로 빼곡히 적혀 있다. 집을 얻고, 이삿짐을 나르고, 가구와 가전제품을 구하고, 주민센터 복지체계와 연결하고, 음식물과 쓰레기를 관리하고, 에어컨·보일러·카드키 사용 방법을 숙지시키고, 물 새는 천장을 수리하고, 홍보 포스터를 만들어 축하 집들이를 하고, 쓰러진 그를 병원으로 옮겨 입원시키고, 돌아가며 병상을 지키고, 의사와 연락하며 병의 추이를 살피고, 퇴원 뒤엔 통원 치료에 동행하고, 구속 뒤부턴 출소 이후의 삶(활동지원서비스 신청, 정신과 치료 등 전담 의료진 섭외, 이웃들과의 소통창구 역할 등)을 고민한다.
‘사정은 알겠지만 언제 다시 그런 일이 생길지 모르니 같이 살 수 없다’는 이웃의 반응을 친구들도 알고 있었다. 그들에게 친구들이 거듭 약속했다.
“지금까지 철용님 곁에는 홈리스 동료, 홈리스야학 학생들, 홈리스행동과 반빈곤단체 활동가들이 항상 있었습니다. 이 사건을 해결해나가는 과정에도, 그 이후로도 그러할 것입니다.”(탄원서)
이문영 기자 moon0@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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