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고픔과 고독은 사치다”…산악계 오스카상 김창호 대장 미공개 수기

전현진 기자 2023. 10. 14.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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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년 9월, 파키스탄 카라코람산맥의 해발 6150m 박마브락 정상 인근에 오른 김창호. 김창호는 전인미답의 이 산에 혼자 올라 인류의 발자국을 처음 찍었다. 김창호기념사업회 제공

2003년 7월 10일, 작열하는 태양과 더위가 파키스탄의 작은 도시 길기트를 감쌌다. 바자르(전통시장)의 아스팔트 바닥에 발자국이 남을 정도였다. 카라코람산맥과 파미르고원 등반의 중간기지 역할을 하는 이 도시는 크고 작은 공사로 번잡했다. 하지만, 34세 청년 김창호는 17시간을 달린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이 도시에 정감을 느꼈다.

앞으로 3개월 동안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은 6000m급 5개 봉우리를 오르는 것이 목표다. 미지의 여정에 그가 챙겨온 짐은 약간의 장비와 라면 10개가 전부였다.

20년 전 당시는 산악 영웅들의 시대였다. 1990년대부터 이어진 ‘8000m급 14좌 등반 레이스’는 대중의 큰 관심을 받았다. ‘고산 정복’이라는 트로피를 위해 원정대가 꾸려졌다. 원정대는 수억원에 달하는 후원과 국민적 지지에 힘입어 정해진 루트를 따라 고봉을 하나씩 올랐다. 산악인으로 경력을 쌓으려면 원정대에 합류하는 것이 상식이었다.

김창호는 다른 선택을 했다. 그는 혼자 산에 올랐다. “홀로 여행하는 사람은, 지옥 끝까지 내려가든 하늘 끝까지 오르든 가장 빨리 닿을 수 있다”는 작가 러디어드 키플링의 말을 되뇌였다. 위험도 성과도 모두 그의 것이었다.

산악 잡지인 <월간 산>에서 받은 원고료와 지인과 어머니가 건네준 돈이 전부였다. 현지 식재료로 배를 채우고 홀로 빙벽을 오른다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2003년 파키스탄 정부는 6500m 이하 봉우리의 입산료를 폐지했다. 이번 여정은 김창호가 2000년부터 2004년까지 이어간 파키스탄 탐사의 하이라이트였다. 1988년 서울시립대에 입학해 시작한 산악 인생에 찾아온 변곡점이었고, 훗날 국내 최초 무산소 14좌 등정, 산악계의 오스카라 불리는 ‘황금피켈상’ 수상으로 이어진다. 그가 남긴 미공개 수기와 탐험기를 토대로 그 여정을 살폈다.

주민들은 그를 위해 양을 잡았다

출국 전, 탐사 도중 많이 먹지 못할 것을 대비해 미리 체중을 5㎏ 정도 찌웠고, 체중을 유지하며 하루 두끼만 먹는 연습을 3개월 전부터 했다. 지역도 철저히 조사했다. 그의 서가에는 수백권의 관련 서적으로 채워졌다. 길기트까지 정복한 고구려계 당나라 장군 고선지의 서역 정벌 기록과 신라 승려 혜초의 여행기 <왕오천축국전>을 반복해서 살폈다. 먼 옛날 미지의 세계로 떠난 선조를 떠올리며 골방에 걸어둔 카라코람산맥 지도와 대동여지전도를 바라봤다.

첫 목표는 세계 제2의 고봉 K2를 닮은 해발 6225m의 딜리상사르(Dehli Sang Sar)였다. 그는 아프가니스탄 국경 지역 차푸르산 계곡에 있는 조오드쿤 마을로 왔다. “중간에 바위가 있는 봉우리”라는 뜻의 딜리상사르로 가는 출발지다. 이 산은 지도상에 ‘딜리 상 이 사르(Dehli Sang-i-Sar)라고 표기됐다. 1927년 차푸르산 계곡을 탐사한 영국인의 기록이 근거였다. 그러나 김창호는 이곳에 거주하는 소수민족 와키인 주민을 통해 ‘i’가 덧붙여 진 것은 잘못된 표기라는 것을 알아냈다.

2003년 7월 김창호가 파키스탄의 해발 6225m 고산 딜리상사르에 오르기 위해 직접 노트에 그린 등반루트. 김창호기념사업회 제공

7월 15일 해발 4600m 지역에 캠프지를 정했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이었다. 사전 조사 결과 한 낮에는 눈이 녹아 체중을 지탱할 수 없었다. 등반은 야간에 시작해 무박 2일로 마칠 계획이다. 옛 탐험가처럼 노트에 봉우리를 그려 넣고 출발과 귀환 시간도 적어뒀다.

7월 17일 첫 시도를 앞두고 긴장한 듯 헛구역질이 멈추지 않았다. 그냥 누워 잠들고 싶다는 유혹을 이겨내기가 걷는 것보다 힘들었다. 차를 끓여 마시고, 천막 주위를 계속해서 돌았다. 두려움과 고독감을 지나 편안해졌다가 다시 고독감이 밀려왔다. 서쪽으로 해가 저물고 정상 위로 북두칠성이 떠올랐다.

밤 9시 30분, 캠프지를 떠났다. 미숫가루와 커피, 그리고 비스킷과 치즈를 챙겼다. 텐트에는 등반 일정을 적어둔 노트를 펼쳐놓고, 여권과 돈이 든 수첩을 뒀다. 반드시 돌아오겠다는 다짐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달이 남동쪽 산등을 돌아 떠올랐다. 랜턴을 켜지 않아도 될 만큼 밝았다. 하얀 폭포가 쏟아지는 듯한 설산이 모습을 드러냈다. 무더운 한여름이었지만 설산의 밤은 추위가 감돌았다.

미리 계획한 시간에 맞춰 산을 올랐다. 정상 앞 봉우리(전위봉)에 새벽 4시45분 도착했다. 동쪽 하늘을 보니 수평선이 붉게 물들며 해가 떠오르려 하고 있었다.

오전 9시30분 주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에 거대한 설탑이 보였다. 해가 떠오른 탓인지 눈이 녹아 크레바스(빙하 표면에 생긴 깊은 틈)가 보였다. 정상을 앞두고 잠시 쉬었던 게 실수였다. 고민 끝에 눈 표면이 얼 때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한 낮이 되자 다시 태양열이 쏟아졌다. 해가 지기까지 지루한 기다림이 이어졌다. 오후 7시15분 다시 정상으로 향했다. 하지만 육체적인 힘은 물론 열정과 정신력도 우물이 바닥나듯 사라졌다.

하산하기로 했다. 올라온 만큼 위험하고 고통스러운 하산 길에 문뜩 떠올랐다. “왜 나는 혼자지?” “내 친구는?” 그는 뒤를 돌아보면서 마을로 내려왔다.

첫 시도를 실패한 뒤 절치부심하다 2차 시도에 나섰다. 7월 22일 오후 6시 캠프지를 떠나기 전 ‘7월22일 오후에 반드시 돌아오겠다’는 말을 노트에 적었다.

한 번 온 길이라 이전보다 수월했다. 출발 약 10시간 만에 정상에 도착했다. 동쪽으로 지평선이 조금씩 밝아졌다. 돌 위에 주민이 준 나무장식품을 매달아두었다. 하산을 마치고 돌아오니 조오드쿤 주민들이 양 한마리를 잡아 인류의 딜리상사르 첫 등정을 축하했다.

딜리상사르 정상에 오른 후 바위에 매달아 둔 나무조각. 현지 주민이 선물해준 것으로 정산 등반을 알리는 작은 징표로 삼았다. 김창호기념사업회 제공

딜리상사르 등정 후에도 김창호의 여정은 계속됐다. 9월에 접어들어 산 위의 풀들은 갈색으로 물들었고 추위가 매서워졌다. 김창호는 양치기가 파는 계란과 치즈 등으로 버텼다. 연료가 떨어져 동물의 마른 대변을 연료로 썼다.

의욕이 떨어져 하루 종일 침낭에 들어가 텐트를 나서지 않는 날도 있었다. 마음이 흔들릴 때면 노트에 “나에게 배고픔과 고독은 사치다”라고 적었다. 등반 장비인 피켈의 날을 갈며 마음을 다잡았다.

등반은 모두 혼자였다. 동료와 무전기로 상황을 주고 받는 것과는 다른 완전한 격리상태였다. 혼자 떠난 등반은 늘 위험하다. 김창호는 아무도 없는 산 속에 남았을 때 한국의 지인과 가족에게 미리 연락하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그는 ‘‘내가 이곳에 있다는 사실을 한국에서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적었다.

단독등반을 2003년 원정의 중요한 규칙으로 삼았다. 그러면서도 위험을 감수했다. 고정로프를 이용한 등반은 ‘노동에 불과하다’고 하거나, ‘낮은 수준의 등반행위’라고 봤다. “히말라야 등반에서 위험을 빼면 도대체 뭐가 남는단 말인가.”

김창호는 이 원정에서 미등정인 아타르코르(Atar Kor 6189m), 하이즈코르(Haiz Kor 6105m), 박마브락(Bakma Brakk 6150m) 등 6000m급 산을 혼자 올랐다. (처음 계획했던 5개 봉우리 중 하나인 혼브록(Honbrok 6459m)은 일본인 원정대의 등반 기록을 이후 발견했다.) 해발 4000~5000m의 4개 고개도 처음으로 넘었다. 전인미답의 산과 고개에 발자국을 남기고 그 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2003년 7월 파키스탄 딜리상사르 등반을 앞두고 쉬고 있는 김창호. 그는 가지고 온 카메라를 세워두고 혼자 사진을 찍었다. 김창호기념사업회 제공
수직의 산 오르며 넓어진 수평의 세계

그의 파키스탄 원정은 2004년 한 차례 더 떠난 뒤 마무리됐다. 파키스탄 단독 원정을 통해 그는 산악인으로서 가진 자신의 잠재성과 동시에 한계도 깨달은 것으로 보인다.

그는 높은 이상과 순수한 열정에 사로잡힌 뛰어난 등반가로서의 자질과, 고집스럽고 비판적인 타협불가의 태도를 모두 지니고 원정에 나섰다. 생사를 오가는 두려움과 체력의 한계를 겪었고, 현지인들과 부대끼며 낯선 땅을 더 깊이 이해해 갔다.

한국 산악인들의 사고 소문을 듣고 안타까워 하며 동료 산악인의 소중함도 생각했다. 수직으로 오르내리는 것이 전부인 산악계에서 그의 세계는 수평으로 저변을 넓혀 갔고, 더 높이 오를 수 있는 넓고 단단한 기초가 됐다.

김창호는 2005년부터 다른 동료들을 모아 원정대를 직접 조직하거나, 다른 원정대에 참여하며 활발할 등반 활동을 이어갔다. 그리고 2013년, 7년 10개월 6일 만에 무산소 8000m급 14좌 등정에 국내에서 처음으로 성공했다. 당시 기준 세계 최단기 기록이었다.

뛰어난 업적을 축하할 여유도 없었다. 해발 0m 갠지스강 어귀에서 8848m 에베레스트 정상까지 무산소 무동력(카약, 자전거, 도보)으로 오르는 마지막 원정에서 오랜 시간 함께 한 동료 서성호를 잃었다.

김창호는 이후 서성호 대원의 유지를 잇는 히말라야 펀드를 조직했다. “젊은 대학생 등반가들이 히말라야와 고산등반을 어렵지 않게 도전할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서성호의 뜻을 이어 산악인들이 십시일반 돈을 모았다.

그리고 시작한 게 ‘코리안웨이’ 프로젝트였다. 인간이 오르지 못한 미등정 봉우리와 고산의 거벽에 도전해 등반루트를 새롭게 만드는 작업이었다. 고정로프, 캠프, 고소등반 셰르파, 보조장비 없이 순전히 산을 오르는 등반자의 힘으로 달성하는 알파인 등반을 추구했다.

2017년 산악계 오스카상인 최고 권위의 프랑스 황금피켈상을 동료들과 수상했다. 국내 최초였다. ‘2016년 코리안웨이 강가푸르나’ 원정의 성과 덕분이다. 그는 “남들이 갔던 길을 따라 간 사람에게 주어지지 않는 상”이라며 뿌듯해 했다.

김창호는 2003년 9월 파키스탄의 해발 6105m의 미등정 봉우리 하이즈코르를 등반했다. 김창호기념사업회 제공
언제나 곁에 있던 죽음과 ‘존재 등반론’

2018년 10월 11일, 김창호는 모두 9명(한국인 5명, 셰르파 4명)으로 구성된 원정대를 꾸려 네팔 서부 구르자히말(7193m)에 코리안웨이를 개척하던 중 남벽 아래 베이스캠프에서 눈사태를 만나 사망했다.

죽음은, 갑작스러웠지만 언제나 그의 곁에 있었다. 그는 “설산을 오르는 산악인은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늘 서 있다”고 했었다. 2003년 원정 당시 “자신이 스스로 선택한 길에서 만나게 되는 고통은 더 이상 고통이 아니다. 그것은 참을 만하며 기쁨으로 승화된다. 심지어 죽음까지도”라고 적었다.

죽음 후에도 그의 유지는 이어졌다. 지난해 김창호기념사업회가 출범했고, 첫 김창호 특별상 수상자로 산악인 우석주씨(35)가 선정됐다. 우씨는 등반 파트너인 아내와 설악산의 미답의 신루트를 개척했다. 김창호가 평소 강조했던 도전 정신과 창의적인 모습이 높게 평가받았다.

2003년 김창호의 원정은 지난 6월 ‘역사적 여름’(Historic Summer)라는 제목으로 미국의 <아메리칸 알파인 저널>에 소개됐다. 원정 20년 만에 처음으로 그의 탐험이 세계적인 매체에 소개되는 순간이었다. 김창호의 동료였던 오영훈 인류학 박사(한국등산연구소 부소장)가 저널 편집장의 요청으로 쓴 기고글이다.

김창호기념사업회 총무이사이기도 한 오 박사는 “김창호가 주도한 코리안웨이는 ‘산까지의 접근은 탐험의 가치가 있는가?’ ‘산이 원주민 문화에서 어떤 의미를 가졌는가?’ 라는 기준으로 등반할 산을 선정했는데, 이는 세계적으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하고 유일한 관점이고 파키스탄 원정이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산과 사람, 사람과 사람의 조화를 강조한 김창호는 자신의 등반 철학을 ‘존재 등반론’이라고 불렀다. 산을 정복하는 대상이 아닌 깊은 교감의 대상으로 여기고, 현지 주민과 동료 산악인, 미래세대와 어울리는 등반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20년 전 파키스탄으로 떠나면서 새롭게 개척하려던 게 이 길이었을까. 김창호가 세상을 떠난지 5년이 흘렀다.

고 김창호 대장은 등반가일 뿐 아니라, 산악계를 깊이 바라보는 연구자, 비평가, 철학자였다. 전인미답의 길을 개척하면서 수직의 산을 오르는 것 뿐 아니라 산이 있는 지역과 현지인들의 삶을 이해하고, 동료들과 함께 하며 수평의 세계도 탐험해 가는 존재등반론을 이야기했다. 미지의 세계를 개척하며 자신의 내면 세계도 새롭게 알아가고 넓혀간 결과다. 김창호기념사업회 제공

전현진 기자 jjin23@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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