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험기] "60년 먼저 쓴 유언장"... 파릇파릇 청춘들이 웰다잉 준비하는 이유
청년 1만 7000명이 연명의료 중단 미리 밝혀
잇단 흉악범죄·사회재난에 "죽음, 멀지 않아"
"안녕,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마지막 인사라니 기분이 얼떨떨하다."
(한국일보 신입기자가 직접 써 본 유언장)
이름 김태연, 28세, 입사 2개월 차. 이제 막 사회인으로 첫발을 뗀 새내기 기자다. 취재 중 경찰서에서 만난 어르신으로부터 "창창한 미래가 펼쳐져 있다"며 부럽다는 인사를 받기도 한 청춘이다. 한국 여성 평균 기대수명이 86.6세(2021년 기준·통계청)니, 죽음은 지금으로부터 60년이나 남은 먼 미래의 일이다.
그러나 최근 2030 젊은 세대 중에선 '어떻게 하면 잘 살까'(웰빙)를 고민하는 한편으로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웰다잉)에 관심을 쏟는 이들이 부쩍 늘었다. 죽음에 대비하고 자기 삶을 중간점검하는 차원에서 유언장을 미리 쓰거나 사전연명의료의향서(자신이 임종을 맞이할 때를 대비해 호스피스나 연명치료 의향을 미리 밝히는 문서)에 젊은이들이 늘고 있는 것을 보면, 웰다잉에 대한 관심을 확인할 수 있다. 흉악범죄와 사회적 재난이 잇따르고 고령화가 극도로 심화하는 등 복합적인 원인에 따른 유행이란 분석이 나온다.
세계 호스피스·완화의료의 날(매년 10월 둘째 토요일·올해는 10월 14일)을 맞아, 본보 기자는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실제 유언장과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작성에 도전했다. 먼저 유언장을 쓰려면 준비 작업부터 실제 작성까지 약 2시간이 넘게 걸린다. 유언장이 법적 효력을 지니려면 다섯 가지 요건을 충족해야 한다. ①자필로 써야하며 ②작성자 이름 ③작성 날짜 ④주소지가 포함돼야 하고, ⑤도장이나 지장이 찍혀 있어야 한다.
조건에 맞춰 한 글자 한 글자 적었다. 유언장에 어떤 내용을 담을까를 궁리하고, 멀다고만 느꼈던 죽음을 곱씹다 보니, 오히려 담담한 마음이 들었다. 유언장을 누가 읽을지, 그들과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았는지, 어떤 태도로 삶을 대했는지 차분하게 되돌아보게 됐다. 장례 방식이나 유품 처리에 관한 내용도 담았다. 죽음을 염두에 두다 보니 역설적으로 지금 살아있다는 안도감, 앞으로 더 잘 살 수 있다는 희망을 느낄 수도 있었다.
연명의료의향서를 쓰는 2030
13일 국민연명의료관리기관에 따르면,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작성자는 이달 11일 200만 명을 돌파했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는 향후 임종과정에서 연명치료를 받을지 여부를 사전에 결정해 그 의사를 공공기관에 전달하는 절차로, 2016년 연명의료결정법(웰다잉법)이 제정되면서 도입됐다.
눈에 띄는 점은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작성자 중 청년 세대가 적지 않다는 것. 30대 이하 작성자는 1만7,104명으로, 호스피스·완화치료의 특성상 대상자 절대 다수가 고령층이란 점을 감안하면 상당히 많은 숫자다. 의향서 작성기관 중 한 곳인 국민건강보험공단의 관계자는 "최근 20대나 30대도 연명의료중단 의사를 밝히는 경우가 적지 않다"며 "예기치 못한 사고 등으로 인해 임종 과정에 이르게 될 것을 염려해 미리 작성하러 오는 경우가 대다수"라고 말했다.
12일 기자가 건보공단 서울용산지사를 찾아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상담을 받아보니, 누구나 쉽게 연명의료에 대한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15분 남짓 진행된 상담에서 연명의료중단제도의 도입 배경과 사전연명의료의향서 등록시 처리 방법 등에 상세한 설명을 제공 받았다. 결정을 고민하는 기자에게 상담사는 "오늘 당장 급하게 결정할 필요 없으니 집에 가서 오랜 시간 고민해보라"고 말할 뿐, 서명을 종용하지는 않았다.
"내 삶의 엔딩은 스스로 결정"
뜻이 맞는 친구들과 함께 유언장을 작성하는 청년들도 늘고 있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 작성을 고민 중이라는 대학생 김모(21)씨는 "삶의 의미를 추구할 수 없는 신체 상태라면 이미 그 삶은 종결된 것이나 다름없을 것"이라며 "생을 중단하는 결정을 스스로 하는 게 내 삶에 대한 존중이라고 생각한다"는 소신을 밝혔다. 이어 "친구들과 함께 유언장을 써보면서 삶의 의미를 상기해 보고 주변 사람들에게 마음을 표현하는 것을 주저하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게 됐다"고 말했다. 강원남 행복한죽음 웰다잉연구소 소장은 "죽음에 대해 알아보는 과정을 통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진지하게 고민하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고 말했다.
이런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2030세대를 주요 고객층으로 겨냥한 '웰다잉 스타트업'도 등장했다. 스타트업 '유언을쓰다(유쓰·YOUTH)'는 법적 효력을 지니는 유언장 작성을 돕기 위해 유언작 작성 가이드북과 용지, 봉투, 인주 등이 포함된 유언장 키트를 제공한다. 이청화 유쓰 대표는 "돌아가신 아버지가 유언장이라도 남겼다면 덜 힘들었을 것이라는 친구의 말에 죽음을 준비하는 일에 관심을 갖게 됐다"며 "한국의 유언장 작성 비율이 상당히 낮다는 점을 알게 돼 키트를 제공하게 됐는데 주문량이 상당하다"고 전했다.
전문가들은 죽음이 의외로 먼 곳에 있지 않다는 청년들의 자각이 이런 현상으로 이어진 것이라고 분석한다. 흉악범죄나 대형 재난 사고가 끊이지 않고, 이를 사회관계망서비스(SNS)로 가감없이 목격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영향을 끼쳤다는 진단이다. 신광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는 "최근 잇따른 범죄나 사고 등으로 죽음을 목격하는 빈도가 급격히 늘었다"며 "젊은 세대 사이에도 죽음이 멀게만 느껴지는 사건이 아니라는 인식이 팽배해 미리 죽음을 준비하는 현상이 나타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사회적 관습이나 남의 시선보다 '나 자신'에게 초점을 맞추는 청년 세대의 특징과도 맞닿는다. 성창원 고려대 철학과 교수는 "낙태 찬성 비율이 늘어나는 것에서 보듯 젊은 세대 사이에는 개인의 삶에 대한 통제권을 중시하는 문화가 자리잡고 있다"며 "내 삶의 마지막은 최소한 자기가 결정하고 싶다는 바람도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태연 기자 ty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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